장선숙(55세)김포시 거주, 김수정(45세) 부산시 연지동 거주, 박정희(46세) 평택시 거주, 우경자(46세) 수원시 팔달구 거주. 첫사랑이란 주제에 가감없이 인터뷰 응해주신 분들입니다. 인터뷰 내용은 사전허락하에 편집하였습니다.
진짜 첫사랑은 중학교 3학년때였어. 우리가 같이 과외를 했거든. 근데 이상하게 선생님이 우릴 일부러 연결해 주시는 거 같았어. 선생님이 그때 집을 새로 지으셨는데 우리 둘만 데리고 가서 공부시키셨거든.
근데 공부하다가 이렇게 슥 나가시는 거야. 그때 그 친구가 그래.
"너 막 이런 데 와서 밤새도 돼?"
나는 참 별일이다 그랬지. 선생님이 불러서왔지 뭐 내가. 근데 그 친구가 그때 고백을 한거야. 자기가 날 좋아하는 거 같다구. 그러면서 팔로 이렇게 이렇게 날 안아줬어. 그러다가 갑자기 막 밖에 나가가지구 뛰고 운동을 하고 그러더라구. 막 나두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거야.
한대 노천극장 알죠? 거기 무지 크거든요. 근데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5월인데 하늘에 별이 너무 많고. 그때 백허그를 처음 해줬어요. 그 친구가. 상상해 봐요. 내 귀에 대고 별보며 문학이야기하고 속삭이고. 얼마나 감미롭던지. 지금 생각하니까 새록 새록 생각나네? 우리 신랑은 모르는데 어쩌지? 그러다가 어느 날부턴가 자기 학교와서 같이 공부하자는 거에요. 그래서 거기서 공부했죠. 거기 엘리베이터안에서 첫키스를 했어요. 뭐 뽀뽀인가?
첫사랑의 시기가 언제쯤이란 정석은 없다. 풋풋한 십대였을 수도 있고 꽃같은 이십대일 수도 있고 혹은 더 늦을 수도 있다.
나의 첫사랑은 늦게 찾아왔다. 그리고 느닷없이 찾아왔다. 예고도 없었고 사전 리허설도 없었다. 그가 잡아주는 손에 이끌려 한없이 걸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지워져 버렸거나 희미한 배경이 된 듯했다. 꽤 긴 거리를 걸었음에도 단 한발자국 내딛었을 뿐이란 생각을 했다. 잡은 손은 밤공기의 습한 기운에 촉촉히 젖어 갔지만 놓을 수가 없었다. 아니 놓기 싫었다. 따뜻하게 안아주는 그 품의 온기도 좋았다. 버스에 오르는 순간까지도 놓지 못하는 손바닥의 여운, 그리고 손가락 끝 마디마져 놓치고 싶지 않은 애달픔. 첫사랑은 그렇게 희뿌연 안개 속을 정신없이 걷게 만들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그 첫사랑을 앓는 동안 단 한순간도 제정신일 수 없었다.
그땐 정말 가슴이 쿵쿵거리고 그랬어. 근데 조금씩 어긋나더라구. 그 친구가 딴 여자애랑 막 얘기하구 그러니까 저 여자아이를 좋아하는구나 싶었어. 그래서 그 친구한테 돌려서 물었지.
"어떤 애가 누구를 좋아하는데 그 애는 딴 애를 좋아하는 거야. 어떻게 하면 좋겠어?"
그 친구가 그 말을 오해를 했나봐.
"그 애가 좋으면 그 애 만나면 되잖아"
그러고 화를 내는 거야. 난 자기 얘기한건데...
고등학교 가서 나 진짜 속앓이 많이 했어. 공부를 제대로 못하겠더라구. 고등학교 공부를 다 망쳤어. 대학도 힘들게 갔고.
대학교 2학년때였어요. 근데 우린 초등학교 동창이었어요. 고2때 연락이 와서 처음엔 편지를 주고 받았어요. 그러다가 서로 대학 들어가서 사귀기 시작한거죠. 그 친구가
학교 기숙사 오픈 하우스 하는 날 오기로 했어요. 정말 전 하루 종일 기다렸어요. 근데 안 온 거에요. 하숙집에도 연락하고 해봤는데 연락이 안되더라구요. 그 당시 그 친구 학교에서 혼자 공부했어요. 추억을 더듬으려구요. 찾을 수가 없으니까 그 친구를. 사랑한다고 말도 못해봤어요. 그저 좋았어요. 그 친구 학교 앞 학원에서 혼자 '토플'도 들었어요. 혹시 거기서 마주칠까봐. 너무 맘이 많이 아팠어요. 그래서 다음에 다시 사랑을 하면 내 맘 아프게 하지 않는 사랑을 하겠다 그랬죠.
첫사랑의 끝은 상상보다 아팠다. 이별 뒤의 고통은 첫사랑의 달콤했던 추억을 조금씩 조금씩 삼켜 버렸다. 죽은 것도 살아 있는 것도 아닌 시간들이 매일매일 반복됐다. 단 하루도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난생 처음 겪어본 첫사랑의 후유증은 그렇게 시간으로도 치유되지 않았다.
4학년 가을 쯤에 크게 싸웠어. 한 열흘 정도 말을 안했거든. 열흘 지나서 전화가 오더라구. 그 오빠가 자기가 지금 같은 동네 여자를 만난다고 하는거야. "잘 됐네요."했지. 그럼 뭐라고 그래? 그 전화를 끊고 가방챙겨서 친구집 가는 버스를 타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친구집 가서도 엄청 울었어.
그 후에 혼자서 카페가서 두꺼운 노트에 내 맘을 적었어. 매일 매일. 그렇게 쓴 노트를 소포로 오빠한테 보냈는데 아무 연락이 없는 거야.
가끔은 나도 첫사랑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첫사랑이 그리운건지 첫사랑의 감정이 그리운건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무작정 그 사람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잘 지내고 있는지. 행복한지. 한번쯤 만나 따져 묻고 싶기도 하다. 도대체 그때 왜 그랬는지. 나한테 왜 그랬는지.
부산에 갔을 때 연락해서 만났어요. 그동안 받은 선물들을 다 상자에 담아서 줬어요. 주니까 받더라구요. 눈만 멀뚱멀뚱 뜨고 쳐다보면서. 뒤도 안돌아 보고 왔어요. 왜 그랬냐고 이유도 안물어 봤어. 가끔은 나이도 먹었겠다 만나서 한번 물어보고 싶어. 속시원하게. 그때 왜 안왔었는지. 왜 연락을 끊은건지.
헤어지고 6개월 정도 지나서 지방을 가다가 우연히 그 오빠랑 친했던 오빠친구를 만났어. "너 마음 돌리면 안되겠니? 그 녀석이 기다려. 네가 연락하면 만날거야"
근데 그땐 이미 힘들만큼 힘들었어서 마음이 정리된 후였어. 결혼 하고 신혼 초에 그 오빠 다니는 회사에 전화해봤지. 그때 통화해서 결혼했다고 말했는데 그 오빤 안했더라구. 그리고 나서 한참 뒤 다시 통화했었어. 그땐 결혼했다 하더라구.
찾으려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근데 안찾죠. 옛날 추억 들추기가 남편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들추고 나서 혹시 실망할 수도 있구요. 그냥 아련한 추억으로 묻어 두고 싶어요. 가끔 엘리베이터 타면 생각나요. 노천극장 봐도 생각나고. 왜 시간이 지나면 좋은 추억만 남잖아요.
영화처럼 그 친구를 길에서 스치듯 본거야. 삼십년이 지나서. 서로 스쳐지나갔거든. 근데 기분이 이상해서 돌아봤는데 진짜 영화처럼 저쪽도 돌아서 나를 보고 있는 거야. 근데 진짜 첫사랑 나이들어 안만나는 게 좋아.
많이 늙었더라구. 변하기도 많이 변했고.아마 그 친구도 날 보고 그렇게 느꼈겠지.
그런 감정이 나한테 또 올 수 있을까? 아니 나에게도 그런 감정이 아직 있기는 한걸까? 그게 너무 궁금한거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만큼 힘들고 걷다가 벼락맞을 확률만큼 어려운 첫사랑과 결혼을 한 그녀는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 되버린 자신의 선택이 가끔 후회될 때가 있다고 한다.
그 사람은 나에게 우리가 서로 맞지 않는다고 했다. 그와 결혼했다면 불행했을 수도 있지만 행복했을 수도 있다. 가보지 않은 길이라 그 결과를 알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첫사랑이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료하듯 받은 전화기 음성이 첫사랑 이야기에 어느 순간 격해지고 소용돌이 치면서 십대의,혹은 이십대의 그 풍랑같은 시간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 자신은 몰랐겠지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숨소리 한가닥 한가닥이 춤추듯 흥분에서 절정으로 가고 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차 한잔을 사이에 두고 그녀는 첫사랑을 이야기하며 점점 그 시간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처음에는 기억나는듯 마는듯 이야기를 꺼내다가 어느새 그 시절의 숨막히는 첫사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들에게 얘기해 주고 싶었다. 인생의 절반을 살아 눈가주름 켜켜히 내려앉은 우리들이지만, 갱년기란 손님을 어느 순간 맞아야 하는 중년의 우리들이지만. 꾹꾹 눌러담아 숨겨두었던 첫사랑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여전히 아름다운 여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