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약해진 영혼과 마주쳤다. 완벽한 물질의 노예였다. 순간적으로 두려움이 엄습하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사내는 멍한 표정으로 핏물 빠지는 생선을 들고 있었다. 또 다른 사내는 갈 길마저 잃어버린 듯 자신의 분신을 품에 안고 주춤거렸다. 그것은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부패 중인 시체였다.
남자의 잘못이 아니었다. 눈부신 환영을 쫓다 무너져버린 상실의 부유물이었다. 현대 자본주의는 인간의 무의식을 공략해 풍요로운 미래를 세뇌시켰다. 또 개인의 욕망을 폭발시키도록 조장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을 거세했다.
다시 말하면 한국 사회 권력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도르래로 금전이 총검을 대신했고, 부정부패가 폭력적인 압제를 갈음했을 뿐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나 성완종 리스트 사건을 봐도 알 수 있다. 지배계층의 무분별한 탐욕과 횡포, 정의를 무너뜨리는 일은 멈춰지지 않았으며,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간의 정신 또한 세속화되면서 진리를 보는 눈은 멀게 됐다.
예술가들은 이러한 시대를 반영하거나 비판하는 작품을 만들어왔다. 전시 <환영과 환상>도 자본주의사회가 심어 놓은 환영 속에서 떠다니는 인간의 심층을 들여다봤다. 자본주의의 배면에 깃들어 있는 결핍과 타락, 퇴폐에 함몰돼 자기를 상실하는 인간을 그대로 까발렸다.
전시된 작품을 보면 저절로 탄식이 새어 나온다. 극도의 피로감을 넘어서 온몸에 멍한 느낌을 줄 정도다.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인간의 도리를 부정하는 사회는 언제나 무너지고 말았다. 스스로 뿌리를 갉아먹고 쑥쑥 자라다 죽어버리는 나무와 같았다. 우리 사회는 스스로 되돌아볼 시점을 이미 넘어섰다.
선인장 앞에 섰다. 이광호 작가의 선인장은 초조와 불안을 느끼게 했다. 극단적으로 커다랗게 성장한 선인장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들춰내는 것 같아서다. 처음 선인장을 볼 때는 모호함과 생경함, 사실적인 묘사에 탄성이 절로 나왔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고해성사를 하듯 스스로 넌더리를 치게 만들었다. 인간의 결함과 사악함이 주는 세상과 비켜서서 조용하게 살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작품이다.
어둡고 흉측한 작품과 마주했다. 천성명 작가의 작품 ‘그림자를 삼키다’다. 작가는 어두운 내면을 성찰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담았다고 했다. 하지만 극복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혹독한 성찰에서 극도의 두려움에 떨며 짐승의 소리와 같은 괴성을 지르는 사내가 보일 뿐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작가의 말대로 평온한 상태, 진정한 자아를 회복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너무도 무섭고 고통스럽다.
가판대에 인간과 동물의 신체 부위들이 널려 있다. 우리 몸도 잘라 펼쳐보면 아마 그런 형태로 진열될 것이다. 최수앙 작가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자극적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진열대 위의 자극은 세상의 자극을 따라가지 못한다. 물질과 권력에 굴복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지 우리는 목도해왔다. 반면 그의 작품은 세상의 자극을 환기시키는 면에서는 절묘했다.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자신의 정서가 어느 정도 황폐화돼 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즉 충격을 크면 클수록 정서는 섬세하겠다.
색다른 느낌의 사진이 발길을 사로잡았다. 이 작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속사정을 알게 되면 입이 떡 벌어질 것이다. 그 노동의 의미와 가치는 이 그림이 얘기하는 그 이상의 메시지를 함의한다. 유현미 작가는 실제 공간에 일상의 오브제나 조각을 설치하고 그 위에 그림처럼 칠을 한 뒤 사진을 찍는다. 현실과 비현실의 모호한 경계 사이에서 조각과 회화, 사진의 과정을 모두 담아낸다.
고명근 작가의 작품도 유현미 작가의 작품과 비슷하게 읽혔다. 고 작가는 자연과 인간, 시간이 담긴 건물에서 채집한 사진을 재구성해 투명한 사진 조각을 만들었다. 이 조각들은 평면과 입체, 시간과 공간, 비움과 채움 등 대립적인 이미지들이 빛과 시각에 따라 다른 이미지를 연출했다. 고명근과 유현미 작가의 작품은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대변하지 않을까 싶었다. 정신과 물질, 생과 사 등 복잡한 대립들이 얽혀 만들어져 하나의 인생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압도적인 인물 초상화다. 작품 속 인물과 자연스레 시선을 마주치게 할 정도로 강렬한 이미지다. 강형구 작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인의 외형에 작가가 상상력을 더해 풀어낸다. 주름이나 눈빛, 솜털을 표현한 붓칠은 진짜 살아 있는 것 같은 생명감을 느끼게 한다.
가장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메시지 전달만큼은 직관적인 작품은 시선을 끈다. 강영민 작가의 작품에는 여러 가지 문구들이 삽입돼 있다. 이를 테면 ‘불평등에 분노하지만 나의 아들은 엘리트로 성장할 것이다’, ‘대출의 노예로 사는 것이 나의 선택이다’, ‘최대한 이윤을 추구하며 친환경적이라는 모순’, ‘조기 교육은 생존 전략이다’ 등의 문구로 사색을 이끌어낸다. 강 작가는 분절된 요소들을 재겹합해 새로운 상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사회 안에 감춰진 트릭들을 밖으로 드러내려는 의도겠다.
놓쳐서는 안되는 전시다. 전시 <환영과 환상>전은 오는 17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다. 참여작가는 강영민, 강형구, 고명근, 유현미, 이광호, 천성명, 최수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