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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세상의 아름다움을 희구하다 미술가가 된 최대선 작가
최대선 작가
최대선 작가ⓒ민중의소리

원색적인 팝아트에 익숙해져서일까? 순간적으로 매료시키는 구상 미술에만 현혹돼 왔을까? 전시장에 가득 찬 고요한 열정이 어색하지만 흥미롭게 마음을 뒤흔든다.

분명한 것은 위대한 화가의 미술만 주류를 구성하는 것도, 일반인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것도 아니다. 미술사적 해석의 틀로만 작품을 이해하려는 것도 우매한 감상법이다. 정확한 데생력과 색채가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미술도 있지만 마음속에 색다른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미술도 존재한다.

최대선 작가의 작품이 그렇다. 그는 유다른 표현력과 예사롭지 않은 인내심으로 작품에 묵직한 기품을 담아낸다. 자신만의 독특한 비구상 예술세계를 구축해 나가면서 인간과 사회를 더 깊이 통찰하려고 애쓴다. 그가 비구상 작품을 시작한 이유도 오랜 연습과 통찰의 과정 중에 발현됐다. ‘자율성과 자유로움,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을 표현’하기에 비구상이 가장 적절했다.

긁어낸 종이 골 사이에 담긴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그의 바람이 닿을 곳 어디에?

고즈넉한 저수지 물위를 가로지르는 돌멩이. 거대한 바다에 일렁이는 잔잔한 파도. 텅 빈 집안을 흐릿하게 비추며 흔들리는 촛불. 적막한 밤을 하얗게 뒤덮는 흰 눈. 적요한 자연의 풍광이 작품과 겹친다. 잠잠하고 평온한 이미지다. 하지만 결코 가볍게 다가오지 않는다. 억세고 사나운 역동성이 꿈틀거린다.

작품 속에 깃든 노동의 흔적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흘린 작가의 땀과 정신적인 노력이 느껴져서다. 이와 함께 등줄기에 와 꽂히는 묵직한 주제의식도 감지된다. 그의 작품에는 우리 시대의 찬란한 기쁨과 함께 강렬한 비참함이 공존하는 것만 같다. 그 이유는 인터뷰 도중 알게 됐다. 작품에 사용된 재료 탓이었다.

능구, 162.2x130.3cm, newspaper on canvas, 2016
능구, 162.2x130.3cm, newspaper on canvas, 2016ⓒ민중의소리

최대선 작가의 작품은 기하학적 조형미가 돋보였다. 사발과 술병, 항아리 같은 이미지들이 빗살과 직선 무늬와 섞이며 특이한 미(美)를 연출했다. 구조적으로 섬세하고 조화로운 작품이 그러하듯이 그의 작품도 180도, 360도 돌려 걸어 놓고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듯싶었다.

캔버스는 투박하고 거무튀튀한 물질로 정교하게 발라졌다. 자세히 들여다봐도 어떤 물질인지 눈치 채기 힘들었다. 눅진한 풀이나 에폭시, 지점토, 백시멘트 같은 퍼티에 종이와 물감을 적절하게 섞어 만든 것 같다는 추측만 들었다.

추측은 얼추 비슷했지만 틀렸다. 최 작가는 작품의 주요 재료로 신문을 썼다. 잘게 찢은 신문을 물속에서 두 달 동안 삭힌 뒤 접착제와 혼합해 사용한다. 그는 이것을 캔버스에 펴바르고 나무나 쇠 젓가락으로 무늬를 넣어 작품을 완성한다.

최 작가가 수많은 종이 중에 신문을 주요 재료로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우리 시대에 내뱉고 싶은 이야기와 관련이 있을 듯싶다.

그는 신문지를 재료로 선택한 이유는 “재료비가 적게 나가기 때문”이라며 웃어버렸다. 신문 보급소를 하는 성당 대부님의 도움을 받아서 신문을 재료로 쓰게 됐다는 것. 하지만 꼭 ‘돈 걱정’을 해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문이라는 매체의 함의가 상당이 나에게 와 닿았다. 어렸을 때부터 신문을 많이 봤다. 신문이라는 게 우리나라에서 영향력이 큰 미디어 중 하나인데 그 안에서 진실이라든가 맥락 없이 팩트만 중요하게 보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기사들이 우리 사회의 공동선에 걸림돌이 되는 것을 느꼈다. 그런 영향력이 큰 매체가 우리 사회를 좀 더 좋은 쪽으로, 아름답게 만드는 쪽으로 사용됐으면 좋겠다는 염원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기사를 읽고 신문지를 찢어 물에 불렸다. 신문에는 여러 세계의 소식도 들어가 있고, 매일매일 각 지역의 아주 많은 사람의 인간사가 들어가 있다. 나는 한 날, 여러 시공간에 있던 것들이 집적이 돼 있는 신문을 찢어서 숙성을 시켰다. 그렇게 되면 모든 시공간이 다 얽히고설켜 융합이 된다. 신문을 보면서 느꼈던 답답했던 부분이나 공감했던 부분, 분노했던 부분들을 삭혀 시공간을 다 없애버리고 캔버스에 새로운 세계를 만들었다. 새로운 시공간 위에 개인의 역사를 쓰는 마음으로 작업했다. 신문은 세속적이고 가시적인 세계다. 개인적인 염원이지만 그것을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면 비가시적이고 질서와 조화가 있는 나만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최대선 작가의 얘기를 들으면서 비구상보다는 구상이 그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훨씬 더 정확하게 전달하는 형식 같았다. 비구상 이미지는 대상의 본질적인 특성을 추상으로 풀어내기 때문에 시각적인 형상만으로 주제를 전달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보통 비구상 작품을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가의 의도다.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은 어차피 관람객의 태도와 몫이 아닌가.

최대선 작가
최대선 작가ⓒ민중의소리

예술가로서의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라도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기란 녹록치 않다. 위정자들의 추악함을 폭로하거나, 사회악을 들춰내거나, 민중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고심하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자유분방한 생활을 다지는 책임감 못지않게 먹고 사는 일은 난관 그 자체다.

게다가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예술가를 이해 못하는 풍토도 여전하다. 모든 가치를 돈으로 따지다보니 이름을 날리지 못하는 작가를 낮잡아 보기도 하고 예술가들을 신세 편한 사람이라고 곁눈질 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예술가로서 산다는 것은 가시밭길을 걷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최대선 작가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예술가로서의 삶을 저버리지 않고 영위할 수 있었던 노하우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한국 사회에 대못처럼 서 있는 비정규직의 현실과 마주하고 있지 않을까?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고 있다. 학습지 선생님도 1년 넘게 했고, 회사에서 전공과 상관없이 자재 납품하는 일도 했다. 도로 공사할 때 지주와 표지판 납품을 하면서 경남일대를 다 돌아다녔는데 알고 보니까 4대강 사업에 일조했던 회사였더라.(웃음) 중국어 과외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다. 마지막으로 다녔던 회사는 자동차 에어컨을 만드는 회사였다. 무역국인데 사무도 봤고 물류팀이 없었기 때문에 ‘까대기’라고 해서 컨테이너도 부리고, 싣고 했다. 그거 하다가 디스크가 심해져서 실업자가 됐다. 디스크가 나아지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원을 차리거나 여행사 일을 해볼까 하고 있다. 미술로 밥벌이가 안 될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다. 좋은 스승님을 만나야 그림도 할 수 있더라. 아직도 학생 마음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림이 본업이고 다 수단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미술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았던 그의 집념은 애당초 그가 미술을 시작하게 된 이유까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무역회사에 근무하면서 중국 주재원으로 10년 가까이 일했던 그에게 미술은 어떤 의미였을까.

“중국에서 제품을 구매해 일본이나 한국에 팔았는데, 보니까 환경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중국의 큰 공장, 영세한 공장도 다 다녀봤는데 내가 원하는 삶의 형태가 아니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은데 주위의 사람들도 그렇고, 보게 되는 것도 모두 환경파괴 아니면 돈으로만 취급하고 판단해 힘들었다. 지금도 그랬지만 그때도 좀 순수했다. 사람들과 일은 열심히 했지만 접대를 잘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회사 그만두고 1년 동안 중국여행을 다녔는데 사람들도 순박하고 중국도 아름다운 나라더라. 이후에 액세서리 장사를 해봤다. 남대문에서 샘플링해 중국 사람들한테 팔아보고, 가내수공업처럼 만들어서 해보려고 했는데 내 길이 아니었다. 장사 타입도 아니었던 것이다. 미술을 배우고 싶다는 일념으로 귀국해 지금 스승님 밑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최대선 작가의 행보가 궁금하다. 각고의 노력 끝에 세계적인 예술가로 성장할 수도 있고, 깨끗한 이성과 높은 의지로 자족하는 삶에서 예술가로서의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도 있다. 말해두지만 돈이나 출세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예술가를 순수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모진 처사다.

“당연히 좋은 인간, 좋은 작가가 되고 싶다. 세속적으로 잘 알려진 대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겠다. 그런 작가가 되더라도 한국 사회 안에서의 울림보다 인류 보편적인 울림을 주는 작가가 되고 싶다.”

최대선 작가는 8월 25일부터 뉴욕 갤러리 디 아르떼에서 다른 외국 작가들과 함께 단체전을 연다. 11월에는 독일 베를린에서 무(無)그룹 단체전에 참여한다. 개인전은 허리 디스크 때문에 내년에나 만나볼 수 있다.

이동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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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작가 최대선을 소개하는 인터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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