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플렛
크기는 작았고, 두께는 얇았고, 제목은 구호였다. 책의 완성도 대신 팜플렛의 긴장을 택했다. 저자의 새로운 글쓰기이다.
1917년 9월 코르닐로프의 반동을 피해 핀란드 국경을 마주한 라즐리프 호숫가, 간신히 웅크리고 앉을 정도로 좁은 움막에서 레닌이 쓴 ‘국가와 혁명’도 팜플렛이었다. 레닌은 미완의 글을 보류하며 ‘혁명의 경험을 쌓는 것이 그것에 대해 쓰는 것보다 더 즐겁고 유익한 일’이라고 썼다. 이 책 역시 긴급한 호소를 담고 있다. 그리고 미완의 결론은 마지막 장인 ‘국민입법센터문을 엽니다’란 제목으로 실천을 향해 열어놓았다. 그리고 국민입법센터대표라는 직함으로 자신을 주체로 세웠다. 이 책은 논리의 완성 대신 이정희대표의 의지와 실천을 통해 완성되는 구조인 것이다. 책에서 걸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지난 선거에서 이정희 대표는 민중당지지연설을 통해 전국민고용보험제를 언급했다. 순식간에 주목을 받았으며 결국 대통령의 입을 통해 기정사실화되었다. 수많은 의제 중에 오직 하나에 집중했고, 적중했으며, 현실이 되었다. 그의 말이 씨가 되어 정책을 움직였다. 망치로 쳐도 요지부동이던 것을 침 하나를 찔러 움직이게 했다.
이제 저자는 수많은 정치의제 중 국민입법제에서 혈도를 찾아냈다. 진보정치가 준연동형비례대표제를 법으로 만들어놓고도 무참히 실패한 직후다. 대표선출방식은 법을 바꿔야하는 일이었지만 국민이 법을 만드는 것은 헌법을 바꾸어야 한다.
대통령이 개헌안으로 제출했기에 이미 정부의 과제가 되었다. 그럼에도 국민입법제는 현 정부능력의 최대치가 소요될 과제중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노무현정부 때 국가보안법폐지를 공약하고도 실행하지 못한 것처럼, 조건을 탓하며 좌초될 수 있다. 정부에만 맡기는 것이 불안한 이유다. 법률개정은 체제내 변화지만 헌법개정은 체제자체의 변화이다. 거대한 싸움이다.
대의제와 직접민주주의
대의제와 직접민주주의는 정치의 계급투쟁을 가르는 전선이다. 그만큼 거대한 이데올로기투쟁이 노정되어 있다. 저자는 선거일 하루만이 아닌 ‘365일내내 주권자’가 되는 선택(p.8)을 주장한다. 이는 루소의 다음 주장과 맞닿아 있다.
영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는데 이것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오직 의회구성원들을 뽑는 선거 때만 자유로울 뿐이다. 의원들이 뽑히자마자 인민은 노예가 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1)
루소에 따르면 정치란 인민의 자기지배이다. 그것은 정치가의 지배가 아니다.
대표라는 개념은 근대에 와서 생긴 것이다…법이란 일반의지의 표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입법권을 행사하는데 있어서 대표자를 내세울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집행권을 행사하는데 있어서는 대표자를 내세울 수 있고 내세워야만 한다.2)
저자는 정당과 정치인의 ‘타협과 절충이 아니라 인민의 자기지배가 민주주의의 핵심’(p.52)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슘페터에게 민주주의는 ‘정치인의 지배’이다. 정치인 개인이 인민의 결정권, 즉 권력을 획득하는 제도적 장치이다.3) 여기서 말하는 개인들은 정치적 기업인들이다.4) 슘페터에게 인민의 의지는 정치가에 의해 ‘제조된 의지’이다. 대표는 주어진 인민의 의지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설득, 선전, 세뇌를 통해 제작한다. 그에게 인민의 의지는 정치의 원인이 아니라 정치의 결과이다.5) 인민이 정치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이 유권자를 좌지우지하고, 지지자와 적을 나누고 통제한다. 반면 인민(투표자)은 정치인을 권력의 자리에 앉힐 수 있으나 그들을 통제하지는 못한다.6) 인민(유권자)은 정부를 선출한 뒤 다음 선거 때까지 어떠한 압력도 행사해서는 안 된다. 인민의 능력을 무시하고 수동적 존재로 전락시킴으로서 슘페터의 민주주의는 ‘주인과 대리인의 관계’를 전도시킨다. 그의 민주주의가 반민주적이라 평가되는 이유이다.
조건
인민의 자기지배는 법칙이지만 가능성일 뿐 그 자체만으로 현실은 아니다. 자기지배의 가능성은 필요조건의 충족을 통해 현실이 되고, 외적조건을 내적인 것으로 만들 때 필연이 되며, 원인과 결과는 다른 것이면서도 같은 것이라는 모순마저 포함할 때 필연적 인과성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인민이 처한 조건은 가능성의 문턱에서부터 좌절된다.
권력자나 재벌들은 노동자나 서민들에 비해 국회의원을 비롯한 사회 고위층에 접근하기 쉽다. 입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과 전화하고 식사같이 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재벌의 이익을 지키는 법이 조용히 통과되는 배경이다.(p.41)
정조가 즉위한 1776년에 출간된 「국부론」에서 아담 스미스는 지금이라고 해도 낯설지 않은 진술을 하고 있다.
고용주들은 수적으로 적기 때문에 훨씬 더 쉽게 단결할 수 있으며, 또한 법률은 고용주들의 단결은 인정하거나 적어도 금지하지 않지만, 노동자들의 단결은 금지하고 있다…모든 쟁의에서 고용주들은 훨씬 오랫동안 견딜 수 있다. 토지소유자·차지농업가·공장주·상인은 노동자를 한 사람도 고용하지 않더라도 이미 획득한 자본으로 1년 또는 2년은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직업을 가지지 않는다면, 1주일을 버틸 사람이 많지 않으며 1개월을 버틸 사람은 거의 없고 1년을 버틸 사람은 아무도 없다.7)
인민이 자기지배의 민주주의원리를 발견하고도 250년 넘게 근본적인 조건의 변화를 이루지 못함으로서 원리는 현실이 되지 못했다. 인민이 자기지배를 실현할 수 없기에 엘리트들에게 지배를 양보해야 했고 엘리트정치인들은 그것이 조건 때문이 아니라 원래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하기에 이르렀다.
인민의 자기지배를 본질적동일성으로만 주장하는 것도 오류이지만 다양성과 차이로 해소하는 주장도 오류이다. 1과 2는 차이를 갖지만 1+1=2라는 계산식을 통해 동일해진다. 또한 2=2는 동일성이지만 2+0=2라는 계산식을 통해 차이를 갖는다. 차이는 동일해지고 동일은 차이로 구별된다. 다양한 차이들은 관계를 통해, 계산을 통해 통일되며 그 결과 풍부해진 현실로 나타난다. 저자는 인민의 자기지배를 진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산만하게 나열하는 대신 모순적인 두 조건의 통일을 보여준다.
민주주의라는 버스에 오른 승객들은 두가지 도구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가속기는 ‘국민발안권’ 제동장치는 ‘국민거부권’이다.(p.17)
가속장치와 제동장치는 서로 대립되지만 또한 긴밀히 연관되어 통일됨으로써 버스라는 자동기계를 현실로 만든다. 발안권과 거부권은 그 자체로는 구별·대립하지만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음으로서 국민입법제를 현실로 만들 것이다. 우리는 저자 덕에 구별되는 상이한 조건을 국민입법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사고할 수 있는 지평을 얻게 되었다.
제도
제도(制度)8)는 나무를 칼로 잘라 다듬어 척도를 만든다는 뜻이다. 제도는 질서를 지향한다. 잔가지를 쳐내고 기둥을 만들면 한 가지의 유용한 기능이 생성되는 대신 다른 가능성은 포기하거나 배제된다. 이처럼 베거나 자른다는 점에서 제도는 배제를 전제한다. 배제된 자9)들은 제도가 완전해지는 것을 방해하는 위협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완전한 제도란 항상 불완전한 것이다.
우리가 연동형비례제법안을 통과시키고도 위성정당이란 꼼수에 좌절되는 장면을 경험했듯이 제도만으로 주권이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제도란 배제하기와 배제당하기의 물러설 틈 없는 치열한 투쟁의 결과물이다. 제도만으로는 안 되지만 제도 없이도 안된다.
권리에 의해 제도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제도에 의해 권리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권리는 등가교환 제도에서 탄생되었고 등가교환이 사라지면 권리도 소멸할 것으로 예견된다. 경제적 가치와 법적 권리의 뿌리는 같다. 권리는 발휘됨과 동시에 제약된다. 그래서 외화된 권리는 권한이 된다. 추첨을 통해 권리를 위임받은 자들은 제한된 권한만을 행사한다. 그러나 투표제는 권한이 아닌 권력을 만드는 제도이다. 권력은 합의에 의해 양도된 권리를 초과하는 잉여에서 발생한다. 국회의원 개인은 ‘독자적 헌법기관’이라는 말은 자신을 지지해준 사람들을 배신하라는 고상한 표현이다. 따라서 민중에 의해 위임된 권한을 배신하지 않을 탁월한 정치인을 만들어 투표에서 승리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대의제에서 더 많은 탁월한 정치인을 진출시키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대의제 자체의 한계를 보완·극복하여 인민의 자기지배를 실현할 제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한 점
정치적 탁월함이란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시키는 능력이다. 투표일에도 시간이 없어 투표장에 가지 못하는 민중에게 법과 제도는 멀다. 법률용어는 그들만의 암호로 되어 있어 읽히지도 않는다. 민중에겐 걸리지 않으면 다행인 것이 법이다. 그래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지렛대가 있으면 지구를 들어 올릴 수 있다. 지렛대는 한 점을 중심으로 지구를 든다. 한 점을 선택하는 것은 개인적 선호나 이해관계가 아닌 과학이다. 저자는 그 한 점에 대해 계산이 끝난 모양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단호히 말한다.
헌법가운데 단 하나만 먼저 바꿔야 한다면 바로 국민입법제 도입이다!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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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 J. Rousseau, Du Contrat Social, (Gallimard, 1964), p.123/이태일 역, 「사회계약론」, (서울:범우사, 1987), p.123
2) J. J. Rousseau, Du Contrat Social, (Gallimard, 1964), p.123/이태일 역, 「사회계약론」, (서울:범우사, 1987), p.124
3) Joseph A. Schumpeter,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 (New York:Harper Torchbooks, 1976(1942), p.369/이상구 역, 「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 (서울:삼성출판사, 1991), p.383, 362.
4) Jon Elster, “The Market and the Forum:Three Varieties of Political Theory.” Jon Elster, Aanund Hylland, eds. Foundations of Social Choice Theory, (Cambridge: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p.127
5) Joseph A. Schumpeter,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 (New York:Harper Torchbooks, 1976(1942), p.263
6) 임혁백, 「대의제 민주주의는 무엇을 대의하는가-일반의사와 부분의사, 그리고 제도디자인-」, 「한국정치학회보」 Vol.43 No.4, (한국정치학회, 2009), p.38
7) 아담스미스, 김수행역 「국부론」(상), (서울:동아출판사, 1992), p.73
8) 制는 未+刀로 未는 나무가 겹쳐 있는 모습이다. 나무를 칼로 잘라 맞춘다는 의미이다. 「한한대자전」, (서울:민중서림, 1997), p.292
9) ‘몫 없는 자들’(part of no-part/sans-part)은 지젝과 랑시에르 등이 사용하는 개념이다. 아감벤은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자(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슬라보예 지젝, 박정수 역,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그린비, 2009), p.14; Jacques RANCIÉRE, Aux bords du politique, (Paris:La Fabrique, 1998)/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역,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서울:길, 2008), p.243; Giorgio Agamben, Homo sacer, (Giulio-Einaudi, 1995)/조르주 아감벤, 박진우 역, 「호모 사케르」, (서울:새물결, 2008), p.156
이시우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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