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불길이 휩쓸고 지나간 풍경은 아주 따끔따끔했다. 새까만 잿더미와 그을음, 울부짓는 소리만 가득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형언할 수 없는 절망과 무기력이 온몸을 휩싼다.
참담한 시련이 세차게 몰아닥친 듯 불모로 변해버린 곳, 그 시커먼 폐허에서 새하얀 '아이'가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었다. 외면할 겨를도 없이 그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얼굴의 정체는 분명 '상처'였다. 염치 좋은 아이가 떡 나타나서 '나 죽었소' 겁주는 것이 아니었다. 전쟁과 폭력, 기아와 억압에 곪아 터진 상처가 건네는 경고였다.
쉴 새 없이 가슴이 두근두근 방망이질 쳤다. 세상이 불지옥이 된 것은 우리 안의 포비아이고, 이타심의 결여가 불러 온 폭력이었다. 총칼을 들고 해하지 않아도 타인의 목숨과 삶을 참혹하게 피괴할 수 있다. 말 한마디, 손가락질 한 번, 서류 한 장으로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 물질과 권력에 굴복된 산업사회에서는 더한 일이다.
이동환 작가는 저 '아이'를 빙자해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치열한 '저항주의'일 게다. 아주 작은 정치사회적 부조리들을 하나하나 끊어내려는 노력이 냉연하게 채워지지 않으면 온 세상이 화마에 휩싸이고 만다는 암시다.
이동환 작가의 작품은 대부분 진중하지만 그 이면에 내재된 정서는 밝고 가벼워 마음이 편했다. 위트에 쩔은 '꼬꼬댁'이나 '병적인 웃음'을 볼 때는 그냥 웃음부터 나왔다.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은 이 작가의 낙천적 성격 탓일 게다. 오랫동안 봐왔던 그는 어떤 갈등 상황에서도 인간에 대한 불신을 놓을 줄 몰랐다. 참된 삶의 의미를 망각하거나 고난으로부터 도망치려는 도피도 없었다. 고뇌까지도 웃음으로 변용할 줄 알았다. 그런 생활의 진실성이 그림에 힘을 불어넣었고, 관람객도 함께 동화됐다.
이동환 작가의 신작도 결이 다르지 않다. 이미지만 보면 아비규환에 빠진 세상, 고통과 암흑, 번뇌와 공포 같은 단어들이 한데 어우러지고, 좁은 공간에 갇혀 신음하는 인간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좀더 깊게 관찰하면 당신이 '깨어 있으면' 세상은 잿더미가 되지 않는다고 읽힌다. 민중이 깨 있으면 독재하는 권력이 나타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언제부턴가 밝은 희망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이성이 허락하기 어려운 역설을 끌어안고 사는 것 같았다. 독자분들도 그런 생각이 든 적이 있는가?
이동환 작가의 작품과 마주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 작가의 작품 앞에 서면 뇌관 심지에 불이 붙은 것처럼 곧 터질 지경의 화마를 보게 된다. 반면 그런 끔찍한 재난 앞에서 오히려 화마가 번지지 않는 세상을 꿈꾸는 역설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된다.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이동환 작가의 개인전 'FROM ZERO'전은 7월 3일까지 Gallery Jacob1212(갤러리야곱1212, 북창로25)에서 열린다.
이동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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