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배달 전성시대다. 중국음식을 시작으로 성장을 거듭해온 국내 배달시장은 치킨과 피자 등으로 확대된 이후 한식, 족발 등 가능분야가 점차 늘어났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배달대행업이 생겨났고, 이후 배달이 안 되는 분야를 찾기 힘들 정도로 배달은 대중화했다. 그러다 2020년 초반부터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법적인 조치와 함께 감염을 걱정한 소비자들이 매장을 찾는 비중이 줄어들면서 이제 배달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배민라이더로 일하고 있는 이성희는 이런 배달의 역사를 모두 경험한 산증인이다. 중국집에서 배달을 시작한 뒤 24년째 배달노동을 이어오고 있는 그를 지난 7월 23일 서울 마포에 있는 배민라이더스지회 휴게실에서 만났다. 이성희는 배달노동자로 일해온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일자리는 사라지고, 일거리만 남았다”고 말했다.
‘숙식제공, 월급 70만 원’이란 신문광고에
1997년 대구 대진각에서 시작한 배달노동
“대구 시내에서 다니면 친구들하고 마주칠까 봐
모르는 동네에서 배달일을 시작했어요”
그가 배달노동을 시작한 건 IMF 외환위기가 우리나라를 휩쓸던 지난 1997년이었다. 당시 대구에 있던 조선일보 지국에서 영업직으로 일한 이성희는 배달일을 시작했다. “대구에 월세방을 얻고, 조선일보 지국에서 영업직으로 일하고 있었어요. 월급이 60만 원에 수습이 6개월이라고 했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월세 내고 나면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두달만에 그만뒀어요. 그런데 신문에 나온 ‘숙식제공, 월급 70만 원’이란 광고가 눈에 들어왔어요. 그렇게 27살이던 1997년 12월에 대구 달성군에 있는 대진각에서 배달노동을 시작했어요.”
배달노동을 시작할 때만해도 이 일을 오래 할 생각은 아니었다.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들에게도 중국집에서 배달을 한다고 알리지 못했다. 평소 생활하던 대구 시내가 아닌 대구 외각인 달성군에서 배달일을 한 것도 누가 볼까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대구 시내에서 다니면 친구들하고 마주칠까 봐 모르는 동네에서 배달일을 시작했어요. 중국집 주방 옆에 조그만 방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먹고자면서 아침 여덟시부터 저녁 아홉시까지 한달에 두 번만 쉬면서 일했어요.”
당시 배달노동은
‘철가방’, ‘아저씨’, 심지어 ‘짱깨’에
이르기까지 마구잡이로 불리면서
제대로 된 일자리로 대접받지 못했다.
지금은 ‘라이더’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가 일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철가방’, ‘아저씨’, 심지어 ‘짱깨’에 이르기까지 마구잡이로 불리면서 제대로 된 일자리로 대접받지 못했다. 그리고, 배달노동을 하찮게 취급하는 사회적 시선은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2004년에 서울 강남지역에서 음식 배달을 할 때 이런 일도 있었어요. 도곡동 타워팰리스에 배달을 갔는데, 타워팰리스는 각 동별로 평수가 달라요. 당시에 E동에 배달을 갔는데, E동은 100~120평으로 넓은 평수였어요. 근데 배달을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어느 부모님이 저를 가리키면서 초등학생 자녀에게 ‘B동하고 어울리지 마. 그러면 이 아저씨처럼 돼’라고 말하더라구요, B동은 평수가 작거든요. 너무 황당한 나머지 뭐라고 말도 못하고 내렸어요.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뭐라고 항의라도 할 걸 후회가 들어요.”
배달노동을 하며 느낀 보람
“배고픈 이들을 위해서 밥을
나른다는 게 매력적이었어요.”
하지만, 배달노동은 그에게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보람도 가져다 주었다. 배달노동이 가져다준 보람과 매력은 그가 20년 넘게 배달노동에 머물 수 있게한 힘이 됐다.
“음식을 배달하면 반겨주는 이들도 있고, 짜장면을 빨리 가져다주면 고마워하는 사람도 많아 나름의 보람이 느껴졌어요. 내가 이 시간에 배고픈 이들을 위해서 밥을 나른다는 게 매력적이었어요.”
대구에서 2년 넘게 중국집에서 배달을 한 그는 잠시 배달일을 떠나 신발유통업에 뛰어들어 2년 가까이 일했다. 그리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1년 정도 사업을 준비하다가, 지난 2002년 서울로 올라와 배달노동을 다시 시작했다.
“날짜를 지금까지 안 잊어요. 2002년 2월 26일에 서울에 와서 음식 관련 배달노동을 시작했어요. 중국집, 한식, 돈까스, 분식집 등 다양한 업소에서 일했어요. 2004년 배달 대행이 국내에서 처음 시작된 이후엔 간간히 배달대행으로 일하곤 했었어요. 그러다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배달대행으로 나서게 됐어요. 배민라이더스에선 2019년 9월부터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직고용이 아니다 보니
4대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힘들고,
모든 게 개인의 책임이 됐어요.”
그가 서울에 올라와 배달을 다시 시작한 지 20년 가까이 지났다. 그동안 배달노동도 많이 변했다. 그가 처음 배달노동을 시작했던 대구와 서울에 올라와 일한 초창기만해도 식당 주인이 그려놓은 약도를 무조건 외워서 배달에 나섰다고 한다. 메모도 하고, 암기도 해가면서 나름의 노하우로 빠른 길을 익히는 게 배달의 속도를 좌우했다. 오랜 배달 경력과 노하우가 그대로 수입으로 이어지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배달노동자들에게 무엇보다 큰 변화는 가게에 직접 고용된 직고용 노동자에서 대행업체를 통해 수수료를 받고 일하는 노동으로 바뀐 것이다.
“배달 대행이 2004년에 시작됐어요. 당시엔 PDA를 활용해 배달에 나섰는데, 배달금액의 20%를 수수료로 받았어요, 그리고, 부릉 등 일반 배달대행업체와 배민 등 배달 플랫폼이 주류가 되면서 배달노동은 ‘일자리’가 아닌 ‘일거리’로 바뀌었어요. 직고용이 아니다 보니 4대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힘들고, 모든 게 개인의 책임이 됐어요. 일거리를 따라 움직이다보니 현장 라이더들도 쿠팡이츠, 배민라이더스 등 단가 높은데로 계속 옮겨 다니면서 일해요.”
배달노동자들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일거리’를 따라 일하는 신세가 됐지만, 배달일을 하려고 하는 이들은 계속 넘쳐난다. 이들을 유혹하는 가장 큰 단어는 바로 ‘자유’다. 배민라이더스, 쿠팡이츠 등 기존의 배달노동 이외에 단시간 노동이 가능한 ‘배민 커넥터’, ‘쿠팡이츠 쿠리어’까지 생겨나면서 배달노동에 뛰어드는 이들은 더욱 늘어나고 있다. ‘배민 커넥터’, ‘쿠팡이츠 쿠리어’는 ‘쉬운 꿀 알바’, ‘자유로운 스케줄’을 강조하며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이성희가 배민라이더스에서 일하게 된 계기도 ‘자유’였다.
“자유는 배달 플랫폼 시장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이자,
가장 매력적인 유혹이에요.
‘자유롭게 일할 수 있다’는 말은
매혹적으로 들리거든요. 하지만,
그 말은 곧 내 안전도, 수입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거예요.
“2019년 9월에 배민라이더스에 들어갔어요. 그전엔 일반 배달대행업체인 ‘부릉’에서 일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일반 배달대행은 출퇴근이 자유롭지 못했어요. 근무시간도 오전 11시부터 밤 11시까지로 정해져 있고, 휴무일을 내가 정할 수도 없었어요. 배민라이더스는 그런 부분이 비교적 자유로웠어요. 그리고, 당시에 배민라이더스에서 배달 건당 기본요금 6500원 이벤트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시작했어요.”
그가 생각했던 ‘자유’와 배달 플랫폼 시장이 말하는 ‘자유’가 어떻게 다른지 일하면서 여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일하는 시간만 자유로운게 아니라 나의 안전, 고용 등 모든게 자유로워진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자유는 배달 플랫폼 시장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이자, 가장 매력적인 유혹이에요. ‘자유롭게 일할 수 있다’는 말은 매혹적으로 들리거든요. 하지만, 그 말은 곧 내 안전도, 수입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거예요. 자유가 나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어요. 라이더 배달 요금은 수요공급에 따라 변해요. 배달 단가가 올라가면 각종 이벤트로 라이더를 끌어 모아 단가를 떨어뜨려요. 그러다 낮은 단가 때문에 라이더들이 줄어들면 다시 단가를 올려요. 이런 일을 계속 반복합니다. 월 기본 수입이 예상되고, 노동시간도 어느 정도 예상 돼야 하는데, 그때그때 달라요. 단순한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직업적으로 배달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예상이 안 되면 삶이 불안해지거든요. 최근 조사에 따르면, 라이더들 가운데 11시간 이상 일하는 이들이 70%에요. 하루 11시간 넘게 그렇게 주 6일 이상 일해요. 직업적으로 장시간 일하는 배달노동자들에게 자유는 곧 불안이에요.”
개인용 보험료의 11배에 이르는
배달오토바이 보험료
불안한 ‘자유’는 배달노동자 개인들에게 많은 책임과 비용을 요구했다. 4대 보험에 가입하기 힘들기 때문에 의료보험과 국민연금 등은 개인이 모두 부담해야 한다. 산업재해의 적용을 받기 힘들기 때문에 일하다 다치기라도 하면 치료 비용은 개인에게 전가된다. 오토바이 보험료도 높게 책정된다. 특히 20~30대의 경우 종합보험에 가입할 경우 최대 1천8백만 원에 이르는 보험료를 부담해야 한다. 월 100만 원 넘는 금액이 보험료로 나가는 셈이다. 이렇다 보니 수입 가운데 상당부분이 비용으로 나간다.
“얼마 전에 지출 내용을 뽑아보니깐 한 달에 200만 원 정도가 나가더라구요. 기름값이 한달에 20만 원 정도 나가고, 거기에 식비 등 고정비로 나가는 돈이 많아요. 보험료도 20만 원 가까이 나가요, 저는 그나마 나이가 50대여서 보험료가 적게 나가는 거예요. 보험료가 젊을수록 많이 나가고, 사람마다, 보험사마다 달라요. 얼마 전에 만난 라이더는 마흔여덟 살이었는데, 연보험료가 900만 원 정도 된다고 하더라구요. 이렇게 보험료가 비싼데도 보장한도는 낮아요, 대인대물 두 가지만 보장되고, 자차나 자손은 아예 받지 않는 경우도 많아요. 심지어는 보험 가입을 거부하는 경우도 많아요,”
지난해 더불어민주당 김회재 의원이 국토교통부에서 받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7월 기준 행정당국에 신고된 오토바이 226만4천여 대 가운데 55.4%인 125만5천여 대가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4월 기준 오토바이 평균보험료는 개인용이 15만9천 원, 비유상(사업장 직접구매)은 43만4천 원인 반면에 배달용(유상운송용) 오토바이는 184만7천 원에 이른다. 개인용과 비교해 배달용 보험료가 11배 비싼 것이다. 더구나 평균보험료가 2018년 118만 원, 2019년 154만 원 등 매년 상승했다. 때문에, 일반용으로 등록한 뒤 배달노동을 하기도 하고, 무보험 오토바이 비율도 높을 수밖에 없다.
잦은 사고에도 불구하고
산재보험 적용은 하늘의 별따기
높은 보험료도 문제지만, 사고 위험에 일상적으로 노출된 현실도 문제다. 지난해 오토바이 사고 사망자 3명 가운데 1명은 배달노동자였다. 서울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65명이 사망했는데, 이 가운데 24명(36.9%)이 배달노동자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성희도 24년 배달인생 동안 수많은 사고를 겪었다.
“그동안 크고 작은 사고가 많았어요. 2~3년 단위로 한번은 사고가 난것 같아요. 그 가운데서도 지난해 8월에 겪었던 사고가 가장 위험했어요. 그동안 사고를 당했어도, 골절 사고는 없었는데 그땐 빗길에 혼자 미끄러지면서 쇄골뼈가 골절됐어요. 한달 동안 병원에 입원하고, 4개월 동안 통원치료를 받았어요. 그나마 산업재해로 처리돼서 다행이었어요.”
그는 운이 좋아 산업재해 보험에 가입했고, 보험 혜택도 받을 수 있었다. 그도 배민에서 일하기 전 일반 배달대행업체에서 일할 땐 산재보험에 가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거리에서 사고 나면 자신이 부담해 치료를 받아야 했고, 일을 못해서 나는 손해도 온전히 자신이 감수해야 했다.
배달노동자가 산재보험 혜택을 받는 건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다. 산재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배달노동자들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엔 지방자치단체에서 배달노동자의 산재보험 가입을 지원하는 등 점차 산재보험 가입률이 조금씩 상승하고 있다. 그래도 실제로 산재 판정을 받는 건 쉽지 않다. 오토바이 사고는 산재 판정을 받는 게 까다롭기 때문이다.
“운전자 과실 정도에 따라 산재 판정을 못 받는 경우가 많아요, 도로교통법대로 주행하려면 오토바이가 자동차 사이로 빠져가면서 달릴 수 없고, 배달 오토바이를 갓길이나 인도에 세우고 배달할 수 없어요. 그렇게 교통 법규를 지키면서 배달하면 배달 속도가 느려서 수입이 많이 줄어들 수밖에 없어요. 더구나 배달서비스를 이용하는 소비자들도 느리게 배달되는 걸 용납하지 않거든요.”
“직고용 때보다도
관리 감독이 더 까다로워요.
일하려고 앱을 키는 순간,
GPS로 위치가 다 잡혀요.
쉬는지 일하는 지 다 압니다.
전에는 일 나갔다가 너무 피곤하면
잠깐 쉬었다가 일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러지 못해요.”
플랫폼 배달서비스는 ‘자유’를 미끼로 많은 노동자를 유인하지만, 기술을 기반으로 배달노동자들을 옴짝달싹 못 하게 통제한다. GPS를 통해 배달노동자들의 위치와 일거수일투족이 실시간으로 파악된다. AI 배차 시스템을 통해 배달시간까지 통제한다. 더구나 사람의 지시를 받지 않고 기계를 통해 이뤄지는 배차는 배달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을 근거가 되기도 한다.
“직고용 때보다도 관리 감독이 더 까다로워요. 일하려고 앱을 키는 순간, GPS로 위치가 다 잡혀요. 쉬는지 일하는 지 다 압니다. 전에는 일 나갔다가 너무 피곤하면 잠깐 쉬었다가 일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러지 못해요. 소변이 급해서 화장실을 찾고 있는데 회사에서 어디 가느냐고 연락이 와요. 전에 부릉에서 일할 땐 길에서 아는 분을 만나 15분 정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회사 매니저가 ‘콜이 밀렸는데, 받지 않고 뭐하냐’고 그러더라고요. 다시 일을 시작했더니 콜 다섯 개가 한꺼번에 들어왔어요. 그래도 배민라이더스에선 이런 현실이 아주 조금씩 바뀌고 있어요.”
배민라이더스 소속 배달노동자들의 현실이 바뀐 비결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노동조합의 힘이었다. 이성희는 “세상에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건 없다”면서 “노동조합 결성 이후 많은 부분을 바꿀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서비스연맹 서비스일반노조 배민라이더스지회가 설립된 건 지난 2019년 12월이었다. 이성희는 당시 배민에서 운영하는 생필품 배달업체 ‘B마트’ 앞에서 배달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노동조합 가입 선전을 하는 모습을 보고 가입했다.
배민라이더들의 현실을
바꾼 비결은 노동조합···
사측과 단체협약 통해
노동환경을 개선하다
“같이 일하는 형님의 소개도 있고 해서 그해 12월에 가입했어요. 입사할 때 배달 건당 기본 수수료가 6500원, 장거리의 경우 1만3천 원에 이르렀었는데 불과 한 달 반 만에 없어졌거든요. 그렇게 노동환경이 나빠지면서 노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어요.”
노동조합 결성 이후 가장 큰 변화는 사측과 단체협약을 통해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고, 그 권리를 찾을 수 있었다는 데 있다. 배민라이더스지회의 상급단체인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서비스일반노조는 2019년 12월 배민라이더스 운영사인 ‘우아한청년들’에 단체교섭을 요구했다. 배달플랫폼인 배달의민족을 운영하는 회사는 ‘우아한형제들’이고 배민라이더스를 운영하는 회사는 별도의 자회사인 ‘우아한청년들’이다. 서비스일반노조는 2020년 4월 ‘우아한청년들’과 단체교섭을 위한 기본협약서를 체결하면서 본격적인 협상에 돌입했고, 6개월간의 마라톤협상 끝에 2020년 10월 22일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이성희는 “지난해 단체협약 이후 많은 부분이 달라졌어요”라고 말했다.
우선 배달노동자에게 배달 물량이 중개될 때 배달노동자들이 부담하던 200원에서 300원 정도 되는 배차중개수수료가 사라졌다. 배달노동자들에게 건강검진 비용 제공과 피복비 지원 등을 약속했다. 이날 인터뷰를 진행한 지회 휴게실도 사측과의 협상을 통해 얻어낸 성과 가운데 하나였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그전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했지만, 지회가 만들어지고, 단체협약을 체결한 이후부턴 어느 정도 협의가 가능한 상대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건 바로 배달노동자들의 배차를 관리하던 배민관제(管制, 관리·통제)센터에 붙은 구호다.
지회 출범 이후
배민 관제센터에서 사라진 구호
‘이끌거나 따르거나 떠나라!’
“관제센터에 예전엔 이런 구호가 붙어있었어요, ‘이끌거나 따르거나 떠나라!’ 당시에 관제업무를 담당하는 매니저에게 불만을 지적하거나 하면 ‘그만 두세요’라고 하면 끝이에요. 계속 불만을 이야기하려면 그만 두던가, 아니면 그냥 일하라는 식이었어요. 그런데 지회가 생긴 뒤 관제센터에 있던 ‘이끌거나 따르거나 떠나라!’는 구호가 없어졌어요, 본사에서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라이더로서 떳떳하게 일하고 있어요.”
배달 서비스에서 소비자와 직접 마주하는 건 배달노동자들의 몫이다. 때문에 이른바 ‘진상고객’을 상대하는 스트레스도 상당하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도 힘들지만, 이들을 상대하느라 불필요한 시간이 소비되면서 이들의 수입까지 줄어든다.
“배달노동자는 시간이 돈이에요. 점심 저녁 피크 시간엔 1분이 아깝거든요. 전에 서울 서초 서래마을에 있는 단독주택에 배달을 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나오더라고요, 기다리다가 간신히 연락이 됐는데, 앞에 두고 가도 되냐니깐 기다리래요. 그런데 10분이 더 지나서 나왔어요. 큰 개를 끌고 나와선 멀찍이 떨어져서 거기다 놓고 가라더라구요. 황당했죠. 심지어는 야간에 배달을 갔는데, 술을 먹다가 주문한 사람이 취해서 잠이 들어서 연락이 안되는 바람에 음식을 전달하지 못하고 돌아온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한참 지나 새벽에 전화해선 왜 안가져오냐고 항의를 하더라구요. 배달대행이 되면서 이런 상황을 다 배달노동자가 마주하게 됐어요.”
“심지어 귀책사유도 따지지 않고
가맹점 포장 불량으로 일어난 일도
라이더가 물어내는 경우도 많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귀책 사유를
정확히 조사해서 판단하거든요.
그래서 라이더들이 일방적으로
책임을 지는 경우는 거의 없어졌어요.”
이렇게 배달노동자들은 뜻하지 않게 억울한 상황에 놓이기도 하고, 심지어 음식에 대한 책임까지 일방적으로 지는 경우도 많았다. 분쟁 상황이 발생해도 관제센터에선 배달노동자들에게만 책임지라고 강요하곤 했다.
“그 전엔 기준에 없었어요. 제가 두 번이나 당했었는데, 제 잘못으로 배달사고가 나서 음식점에 음식값을 배상해줬어요. 그런데 관제센터에선 그 배달 사고난 음식을 가게에 갖다 주라고 하더라구요. 배상했으면 그 음식 돌려줄 의무는 없는데, 그렇게 하라고 요구했어요. 배달 콜비는 센터에서 빼가고, 음식을 다시 돌려주는 등 한시간 가까이 일도 못했어요. 부당하지만,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에요. 심지어 귀책사유도 따지지 않고 가맹점 포장 불량으로 일어난 일도 라이더가 물어내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귀책 사유를 정확히 조사해서 판단하거든요. 그래서 라이더들이 일방적으로 책임을 지는 경우는 거의 없어졌어요.”
이러다보니 관제센터에서 일하는 매니저들과 라이더로 일하는 배달노동자들 사이엔 늘 갈등이 많았다. 그런데, 배달의민족에서 라이더들을 상대로 관제 업무를 하는 이들도 노동자들이다. 이들 관제 업무를 담당하는 노동자들은 지난 2월 24일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서비스일반노동조합 ‘우아한청년들지회’를 설립했다. 라이더들이 모인 ‘배민라이더스지회’와 같은 조직에 몸 담게 된 것이다. 회사의 요구에 따라 원치 않은 갈등 관계에 놓여있던 배달노동자들과 관제노동자들은 앞으로 자신들의 현장을 바꾸기 위해 힘을 모으기로 했다.
“관제 매니저들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센터에선 상명하복을 강요하며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하는
분위기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분위기가 라이더들에게까지
이어진 거겠죠. 이젠 힘을 모아서
함께 싸우며 바꿔나가야죠.”
“올들어 관제센터를 서울 한 곳만 남기고 다 없앴어요. 부산에서 일하던 매니저를 서울로 발령시키기도 했어요. 알아서 그만두라는 거죠. 그렇게 해고의 위기로 내몰리는 걸 보면서 남의 일 같지 않더라고요. 솔직히 그동안 미워한 적도 많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관제 업무를 한 이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렇게 상황을 만든 회사가 문제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에 관제 매니저들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센터에선 상명하복을 강요하며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하는 분위기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분위기가 라이더들에게까지 이어진 거겠죠. 이젠 힘을 모아서 함께 싸우며 바꿔나가야죠.”
노동조합은 이성희의 삶도 변화시켰다. 그는 지난해부터 부지회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그는 “사람이 없다보니깐, 부지회장을 맡을 수밖에 없었어요”라며 “아직 초보 간부다보니 어떻게 할지 고민이 많아요”고 말했다. 그와 함께 활동하고 있는 김종민 배민라이더스지회 기획정책국장은 “실천의 강자에요.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엄청난 추진력으로 행동합니다. 늘 노동운동을 자신의 삶으로 고민해요. 요령보다는 원칙있는 삶을 살려고 하고, 검소하고 소박하나 조합원들에게 돈쓰는 것을 아끼지 않는다고 주변에서 칭찬이 자자해요”라고 전했다. 24년 배달노동자로 살아온 그는 지금 어떻게 하면 지회원을 늘릴지 고민하는 노동조합의 핵심 일꾼이 됐다.
“사람이 없다보니깐,
부지회장을 맡을 수밖에 없었어요.
아직 초보 간부다보니
어떻게 할지 고민이 많아요”
“제가 지회에 가입할 당시엔 지회원이 70~80명었는데, 지금은 450명 정도에요. 아직 많은 라이더들이 지회원으로 가입하지 못하고 있어요. 지난해까지는 라이더 숫자 정도는 파악됐는데, 지금은 파악 자체도 힘들어요. 라이더들을 계속 모집하고, 들고 나는 경우가 많아서요. 그러다보니 지회에 가입하는 분들도 많지만, 탈퇴하는 이들도 있어요. 그래도 계속 지회원이 늘어나곤 있답니다. 지금 라이더들이 1만 명은 넘는다고 하는데, 지회원은 450여명으로 아직 5%도 안 되니깐 갈길이 멀죠.”
지회원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만은 않다. 배달노동자들이 거의 각자도생으로 움직이다보니 만나는 것조차 힘들다. 더구나 20~30대 청년 배달노동자들은 배달노동을 스쳐가는 일 정도로 여기기 때문에 배달노동 현장에 잘못된 것이 있어도 관심을 잘 가지지 않아 조직이 더욱 어렵다. 그는 “젊은 배달노동자들은 대부분 조금하다가 그만둔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도 1년 하고, 그만둔다고 생각했는데, 20년 넘게 일하고 있거든요. 나중에 그만둔다는 생각으로 지금의 현실을 내버려두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생각으로 그는 지회 동료 간부들과 함께 배달의민족 배달노동자들을 만나 지회 가입을 호소하고 있다. 길가다가 동료들을 만나면 라이더 대화방에 초대하기도 하고, 배달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해 장사가 잘 되는 가맹점 앞에 진을 치고 기다리기도 한다. 최근엔 배달노동자들의 비싼 오토바이 보험료를 인하하기 위해 공제조합 설립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있는데, 서명운동을 배달노동자들을 만나는 기회로 활용하기도 한다.
“교육은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에요.
노동조합이 앞으로 더욱 강해지고,
조직이 커지기위해선
교육이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지회원들과 함께 공부하기 위해서
저부터 열심히 배우려고 합니다”
“공제조합 설립 서명운동을 하면 ‘노조가 있었어요?’라고 물으며 가입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리고, 배달노동자들을 만나면 오래 이야기 나눌 시간이 없는데, 서명운동을 통해 연락처를 받으면 이야기를 나누고, 지회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거든요. 그렇게 일일이 찾아다니며 발품을 팔아 조직합니다.”
부지회장으로 일하며 지회 교육 파트도 함께 맡고 있는 그는 지회원을 늘리는 고민과 함께 교육에 대한 고민도 하고 있다. 지회가 더욱 강해지기 위해선 교육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교육은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에요. 노동조합이 앞으로 더욱 강해지고, 조직이 커지기위해선 교육이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지회원들과 함께 공부하기 위해서 저부터 열심히 배우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앞으로의 꿈이요?전셋집 마련이에요.”
앞으로의 꿈을 묻자 그는 ‘전셋집 마련’이라고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절실한 바람을 이야기했다. 그가 ‘전셋집 마련’을 꿈꾸는 것은 그의 노동시간과도 관련이 돼 있다. 처음 배달노동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는 일주일에 2번만 쉬고, 하루 13시간 씩 일했다.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80시간을 훌쩍 넘었다. 지금은 대선후보가 된 전직 검찰총장이 주장했던 주 120시간엔 많이 모자란 시간이지만, 이런 장시간 노동이 지속되면서 그의 몸은 많이 상했다. 그런데 그가 길게 노동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주거비 부담때문이다.
“배달을 오래하면 아픈데가 많아져요. 배달노동을 5년 넘게 하면 대부분 허리, 무릎 등이 아파와요. 저도 지금 허리 때문에 3시간 이상 연속으로 일할 수가 없어요. 중간에 쉬었다가 일해야 합니다. 병원에선 오래 앉아있지 말라고 하는데, 쉴 수는 없잖아요. 노동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였으면 좋겠는데, 뜻대로 잘 안되네요, 서울에 올라온지 20년 가까이 됐는데 아직 월세집을 못벗어났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전세라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월세라도 줄어들면 일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어요. 그러면 몸에 무리없이 조금 더 오래 일 할 수 있을테니깐요.”
관련기사
민중의소리를
응원해주세요
기사 잘 보셨나요? 독자님의 응원이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후원회원이 되어주세요. 독자님의 후원금은 모두 기자에게 전달됩니다. 정기후원은 모든 기자들에게, 일시후원은 해당 기자에게 전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