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예비후보가 공식석상에서 마이너 언론을 언론 취급도 하지 않는 듯한 발언을 한 모양이다. 8일 고발사주 의혹을 해명하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그가 “정치 공작을 하려면 인터넷 매체가 아닌 국민이 다 아는 메이저 언론을 통해 하라”고 발언했다는 거다.
이 말을 듣고 나는 한 동안 이 주제로 칼럼을 써야하나 말아야하나 꽤 망설였다. 윤 후보의 분류에 따르면 마이너 언론(인터넷 매체)에서 일하는 내가 이 문제에 광분(!)할 경우 “마이너 언론 기자가 열등감 폭발한다” 뭐 이런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였다.
게다가 이런 문제에는 아주 고약한 구석이 있다. 내가 아무리 “마이너 언론에서 일하는 나는 아주 만족하며 행복하다”고 주장한들 사람들이 이를 잘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런 말을 하는 건 열등감의 발로이고, 결국 쟤들도 메이저 언론에서 일하고 싶을 것이다”라는 오해를 불식할 방법이 별로 없다.
하지만 이런 불편한 오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이 칼럼을 쓰는 이유가 있다. 그의 메이저 타령에는 위험한 언론관을 넘어서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의 머릿속 깊은 곳에 박혀있는 경로의존성이 바로 그것이다.
경로의존성
행동경제학과 제도경제학, 심리학 등에서는 인간이 합리적이지 못한 선택을 하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e)을 꼽는다. 경로의존성이란 쉽게 말해 더 나은 것, 더 혁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대신 그냥 지금까지 쭉 하던 것을 선택하는 행동을 뜻한다.
원래 주류 경제학에 따르면 인간은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존재여서 항상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선택이 자기에게 이익이 될지 손해가 될지 정확히 계산하는 게 아니라 대충 지금까지 해오던 관성에 따라 선택을 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1985년 이 개념을 정립한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경제학과 폴 데이비드(Paul David) 교수는 이 문제를 쿼티(QWERTY) 자판과 드보락(Dvorak) 자판의 상관관계로 설명했다. 그의 논문 제목은 ‘쿼티 자판의 계량경제사(Clio and the Economics of QWERTY)’였다.
논문의 요지는 간단하다. 우리가 지금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영문 자판을 ‘쿼티 자판’이라고 부른다. 자판 왼쪽 첫째 줄 상단의 알파벳이 ‘Q, W, E, R, T, Y’로 시작돼 붙은 이름이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미국의 교육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오거스트 드보락(August Dvorak)이 ‘드보락 자판’이란 것을 만들었다. 모음을 주로 왼쪽에, 자음을 주로 오른쪽에 몰아놓아 여러 면에서 쿼티 자판보다 편하다는 평가를 받았다(물론 그렇지 않다는 반론도 꽤 존재한다). 하지만 드보락 자판은 쿼티 자판과의 경쟁에서 별 힘을 써보지 못하고 몰락했다.
드보락 자판을 이용하면 타자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지는데, 당시 타자기의 성능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드보락 자판으로 글자를 빠르게 치면 글자가 뒤엉켜 나오기 일쑤였다. 사실 구형 쿼티 자판 자체가 타자 속도를 일부로 느리게 하기 위해(타자기가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자판이라는 이야기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문제는 이게 당시로는 꽤 합리적인 이유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전혀 합리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요즘 아무리 후진 컴퓨터라도 타자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 즉 지금은 드보락 자판을 사용해도 글자가 뒤엉킬 일이 아예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쿼티 자판을 쓴다. 이유가 뭘까? 쿼티 자판을 쭉 써왔기 때문이다. 인간이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쓰던 게 더 편하니 쿼티를 선택한 셈이다. ‘구관이 명관’ 심리라고나 할까?
인간의 뇌는 경로에 의존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심리학과 정신분석학, 뇌 과학 등에서는 이유를 뇌가 일을 처리하는 특성에서 찾는다. 뇌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기관이다. 그런데 매번 무슨 일이 벌어질 때마다 능력을 풀가동한다면 뇌는 지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이유로 뇌는 가급적 문제를 최대한 간단히 처리하려는 습성이 있다. 판단을 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이거? 어제 이렇게 했던 거잖아? 그러면 복잡하게 다시 생각하지 말고 어제 했던 그대로 해!’라고 판단을 해 버리는 식이다.
문제는 이런 심리가 인간 사회의 효율적인 변화를 막는다는 데 있다. ‘인간이 왜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는가?’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행동경제학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는 이유는 경로의존성이야말로 대표적인 인간의 비합리적인 결정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심리가 확산되면 사회의 혁신이 불가능해진다. 경로의존성이라는 것이 원래 ‘혁신? 귀찮게 그런 걸 왜 해? 그냥 하던 대로 해!’라는 심리이기 때문이다.
혁명이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무리 혁명이 민중들에게 이익이 되더라도 민중들은 혁명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 귀찮으니까!
이 귀찮음을 절대 얕잡아봐서는 안 된다. 사람은 귀찮기 때문에 과거의 일을 그대로 답습하고, 이 답습 때문에 옛 체제가 공고해진다. 그래서 신제도경제학에서는 “고착화된 제도가 기득권 보호와 현실 유지를 위한 거대한 장치로 작용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윤석열의 메이저 타령과 경로의존성
자, 그러면 윤석열 후보의 메이저 언론 타령을 다시 생각해보자. 윤 후보의 언론관은 전형적인 옛 언론관이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메이저 언론, 마이너 언론을 나눈단 말인가? 윤 후보가 그토록 칭송하는 메이저 언론의 영향력이 1인 미디어와 SNS에 눌려 날이 갈수록 급감하고 있지 않나?
그런데 윤 후보의 뇌는 이런 현실을 고민하는 게 귀찮다. 그래서 “언론? 그냥 메이저-마이너 순서대로 해! 마이너는 무시하고 정보는 메이저한테만 흘려! 왜냐고? 내가 검사 때 그렇게 했거든!” 이런 심산인 거다. 전형적인 경로의존성 심리다.
언론도 문제인데, 지도자의 이런 심리가 사회 곳곳에 반영되기 시작하면 정말로 위험하다. 만약 윤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이 나라는 혁신이라는 것을 거의 기대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대학을 나오지 않은 청년이 사업을 시작하고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정부가 “우리 정부는 고졸이 아니라 국민이 다 아는 메이저 대학 졸업자들부터 먼저 돕는다”라고 말하면 어떤가?
정부가 인재를 채용할 때에도 “우리 정부는 국민이 다 아는 메이저 대학 졸업자들부터 채용한다”고 하면 또 어떤가? 벤처기업이 새로운 도전을 할 때에도 “우리 정부는 국민이 다 아는 재벌 기업들부터 먼저 특허를 준다”고 하면 또 어떤가? 한 마디로 나라가 개판이 되지 않겠나?
혁신을 위해서는 옛 경로를 벗어나야 한다. 옛 경로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과거의 메이저가 더 이상 메이저가 아닌 세상을 꿈꾼다는 뜻이다. 이것이 21세기 글로벌 경쟁에서 이기는 유력한 방법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겠다는 자의 뇌는 쌍팔년도 경로의존성에 지배를 당한다. 아직까지도 그는 도대체 왜 마이너 언론은 안 되는지에 대한 아무 설명이 없다. 그로부터 들은 유일한 이유는 “마이너는 마이너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이런 자들의 전형적인 특징은 문제가 생기면 제일 먼저 “옛날에는 이런 일을 어떻게 처리했더라?” 이러면서 과거의 사례를 찾는 것이다. 법전을 암기해 출세한 자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미래를 바라볼 능력이 없으니 과거에 집착한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이 의존했던 과거의 메이저가 미래에도 영원히 메이저이기를 바란다. 이런 자가 어찌 창의성을 경합하는 글로벌 경쟁에서 국가를 승리로 이끌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윤석열 후보에게 마이너 언론 기자라고 무시를 당한 것에 별 불만이 없다. 그런 무시를 한, 두 번 당하는 것도 아니고, 나도 윤 후보를 평소 매우 무시하는 쪽이므로 피차 쌤쌤이라고 치는 편이다.
하지만 그런 경로의존성을 지닌 자가 국가를 이끄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이건 나만 참으면 되는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말 여러 모로 윤석열 대통령 시대를 상상하면 우울해진다. 특히 그가 대통령이 됐을 때 이 땅의 메이저들이 축배를 들며 흥청망청할 생각을 하니 더 암울하다. 그래서 나는 이 암울한 미래가 결코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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