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에즈 운하의 패권을 다투다 _ 수에즈 전쟁

[연재] 추석 연휴에 만나는 재미있는 경제역사 ①

*편집자 주 - 지난 설에 이어 추석 명절을 맞아 경제역사에서 벌어졌던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사건들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연휴 기간 동안 모두 다섯 건의 경제역사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바랍니다.

① 수에즈 운하의 패권을 다투다 _ 수에즈 전쟁
② 구아노가 남미를 초토화하다 _ 새똥 쟁탈전
③ 사실은 세금을 내기 싫었던 거였다 _ 미국의 독립
④ 노예 해방은 전쟁의 원인이 아니었다 _ 미국 남북전쟁
⑤ 주식회사의 출발로 촉발된 바다의 패권 다툼 _ 영란 전쟁

실크로드(Silk Road)라는 것이 있다. 알다시피 고대로부터 중세까지 서양과 동양을 잇던 교역로였다. 주요 무역 품목이 중국의 비단(silk)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동을 위해 인류가 이 광대한 길을 개척했다는 사실은 실로 놀랍다. 루트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실크로드의 대략적인 길이는 무려 3만 5,000km가 넘는다. 게다가 이 길은 당연히 평로(平路)가 아니었다. 어떤 곳은 해수면보다 150m나 낮은가 하면, 어떤 곳은 해발 7,400m에 이라는 고산지역이었다.

교역로 중간에 위치한 타클라마칸(Taklamakan) 사막의 모래바람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은 위력이었다. 오죽했으면 ‘타클라마칸’이라는 이름 자체가 현지어로 ‘버려진 땅’, 혹은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오는 땅’이라는 의미였겠는가?

이런 길을 개척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류가 얼마나 무모하며, 얼마나 도전적이고, 얼마나 낙관적인지 잘 알 수 있다. 사실 아무리 간이 큰 상인이라도 3만km가 넘는 이 험악한 지형을 쳐다보면 ‘저기는 내가 죽을 길이다. 저런 곳을 다녀서는 안 돼!’라고 생각하고 포기해야 정상이다.

하지만 인류는 이 도전에 나서 길을 개척했다. ‘이 길만 뚫어내면 우리는 반드시 무역에 성공해 큰돈을 벌게 될 거야!’라는 낙관적 환상에 젖어서 말이다.

대륙을 이동하고자 했던 인류의 의지

낙관과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인류는 육상 교역로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효율적인 무역로를 찾기 시작했다. 당시 기술로는 하늘을 나는 일이 언감생심이었으니, 인류가 눈을 돌린 곳은 당연히 바다였다.

사실 바닷길은 무역 측면에서 육로에 비해 훨씬 효율적이다. 동서양을 육로로 가로지를 때 주요 운송 수단은 낙타였다. 그런데 낙타 한 마리가 운송할 수 있는 짐의 양은 고작 500kg 정도였다. 게다가 앞에서 살펴봤듯 실크로드는 길이만 수 만km에, 산과 사막으로 이뤄진 험로였다. 낙타가 500kg밖에 못 나른다는 점을 투덜대기 전에, 그 길을 가는 동안 낙타가 살아만 있어주면 고마워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배 한 척에는 낙타가 나르는 짐의 수십 배를 실을 수 있었다. 속도도 배가 훨씬 빨랐다. 가끔 풍랑을 겪거나 해적을 만날 위험에 노출됐지만 사막의 모래바람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실크로드 곳곳에 진을 친 산적의 숫자는 해적보다 훨씬 많았다. 배로 무역을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육상무역에 비해 엄청나게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동서양을 한 번에 잇는 바닷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세계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유럽 대륙에서 동양으로 가는 바닷길은 아프리카 남단을 삥 돌아가는 길 뿐이다. 한때 중세 유럽인들은 ‘지구는 둥그니까 서쪽을 향해 나아가면 인도에 도착하는 바닷길을 개척할 수 있겠다’고 믿었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인도가 아니라 거대한 아메리카 대륙이었다.

하지만 인류는 포기하지 않았다. 낙관과 도전정신으로 가득 찼던 인류가 주목한 곳은 바로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가 이어지는 좁은 땅이었다. 지중해와 홍해를 사이에 둔 이 좁은 땅의 폭은 대략 200km 내외. 이곳에만 바닷길이 뚫린다면 인류는 동서양 왕래를 위해 그 먼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생각이 이에 미친 인류는 마침내 ‘땅을 파서 물길을 뚫자’는 어마어마한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생각은 기원전 고대 이집트 왕조부터 시작됐는데 마침내 물길을 뚫는 데 성공한 시기는 1869년이었다. 공사 기간 10년 동안 9,000명이 넘는 노동자가 목숨을 잃는 난항 끝이 일궈낸 성과였다.

운하의 패권을 탐했던 자들의 전쟁

수에즈 운하의 중요성은 지도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이 운하의 개통으로 동서양(유럽~인도양)으로 오가는 거리가 최대 9,000km 이상 단축됐기 때문이다. 19세기 여러 운하가 건설됐지만 수에즈 운하를 ‘운하의 제왕’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될 때 모습ⓒ기타

문제는 인류가 탐욕의 동물이라는 점에 있었다. 이토록 중요한 운하를 탐욕에 가득 찬 유럽 제국들이 가만 놓아둘 리가 없었다. 수에즈 운하는 건설 당시부터 프랑스와 영국의 치열한 주도권 싸움 끝에 겨우 완공됐다. 프랑스는 운하 건설 초기 막대한 건설비용을 투자했고, 영국은 19세기 후반부터 이집트를 식민지로 삼았다.

물론 영국이 1922년 이집트를 이집트왕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시켰지만 이는 명목상의 일이었을 뿐, 영국은 여전히 이집트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이집트가 실질적으로 독립한 이후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이 운하를 고스란히 이집트에 넘겨줄 생각이 아예 없었다.

때마침 쿠데타로 집권한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재임 1956~1970년)가 친소련적인 경향을 보이면서 이집트는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과 사이가 틀어졌다. 나세르는 자신을 적대시하는 영국과 프랑스를 견제하고, 당시 추진 중이었던 아스완 댐 건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956년 7월 26일 전격적으로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다. 이전까지 수에즈 운하의 통행세를 받던 영국과 프랑스는 졸지에 수에즈 운하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운하가 국유화된 이후 3개월만인 10월 29일,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와 앙숙 관계였던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고 전격적으로 이집트를 침공했다. 2차 중동전쟁, 혹은 수에즈 전쟁이라 불리는 그 전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랍 국가들과 사이가 나빴던 이스라엘은 이집트가 운하를 국유화하며 자국 선박의 해상 운송로를 막자 지체 없이 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침공하며 개전의 나팔을 울리자 일주일 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즉각 수에즈 운하로 진격했다.

1차 중동전쟁 때 혈혈단신(미국의 강력한 지원이 있기는 했다)으로 아랍과 북아프리카의 여러 적대국들을 격파했던 이스라엘의 화력에다가, 한 때 세계를 호령했던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가세한 이 전쟁의 결과는 너무나 뻔해 보였다. 이집트의 나세르는 운하를 통과하던 배를 침몰시키고 운하를 봉쇄하는 등 격렬히 저항했지만 전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집트의 참패는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지는 해’였다

그런데 이때 뜻밖의 변수가 등장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맹주 소련이 이 전쟁에 개입한 것이다. 소련은 핵전쟁까지 불사하겠다는 태도로 영국과 프랑스를 비난하며 이집트에서 철수할 것을 압박했다. 당시 이집트가 친소 경향을 보였던 것을 감안하면 이집트를 보호하기 위해 소련이 나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진짜 뜻밖의 일은 소련의 대척점에 있었던 자유진영의 맹주 미국의 태도였다. 미국은 불과 8년 전 벌어졌던 1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나라였다. 영국 및 프랑스와도 자유진영의 동맹이었다. 당연히 미국이 이 전쟁에서 영국-프랑스-이스라엘 삼각동맹을 지원할 것이라고 예상됐던 찰나, 미국은 되레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에게 철군을 압박하고 나섰다.

미국은 왜 이런 태도를 보였을까? 일단 당시 미국에게는 수에즈 운하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유럽의 여러 나라와 달리 미국은 동양으로 이르는 뱃길로 태평양을 가로질렀기 때문이다.

둘째, 미국 대통령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재임 1953~1961년)는 고작 수에즈 운하 따위(!)로 소련과 핵전쟁을 벌이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하고 싶었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핵전쟁이라는 게 인류의 존망을 걸고 벌이는 전쟁인데, 미국 입장에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수에즈 운하 때문에 핵전쟁을 한다? 아이젠하워가 바보가 아닌 한 미국은 이 전쟁을 감당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19세기까지 세계의 최강대국은 단연 영국이었다. 그리고 영국에 대항하는 강력한 대항마는 프랑스였다. 하지만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들의 시대는 저물었다. 미국이 두 나라에 “당장 이집트에서 철수하라”고 윽박지르자. 영국과 프랑스는 이 명령을 거역할 힘도, 용기도 없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이집트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전쟁은 고작 열흘(10월 29일~11월 7일) 동안 진행됐는데, 영국-프랑스-이스라엘 3국 동맹군은 철수하기 직전까지 198명의 사망자만을 남긴 반면 이집트군의 사망자는 무려 1,650~3,000명으로 추정됐다. 한 마디로 일방적인 전쟁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일방적 전황에도 영국-프랑스-이스라엘 3국 동맹군은 이 전쟁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수에즈 운하를 봉쇄하면서까지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졌던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의 위상은 오히려 높아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의 한 마디에 찍 소리도 못하는 쫄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지구에서 가장 중요한 해상 무역로를 두고 벌어진 이 전쟁은 과거의 강자 영국과 프랑스의 위상 몰락과, 새로운 강자 미국과 소련의 시대 강화라는 엉뚱한 결과로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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