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서 골프를 쳤다.”
2일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곽상도 씨의 아들, 그러니까 화천대유로부터 퇴직금으로 50억 원을 받아(쳐)먹은 곽병채 씨가 JTBC와의 인터뷰에서 했다는 말이다. 50년 넘게 살면서 진짜 내 기분을 이렇게 엿같이 만드는 인터뷰는 처음이었다.
뭐, 살기 위해서 골프를 쳐? 이 땅의 수많은 민중들은 살기 위해서 오늘도 필사적으로 일터에 나가는데? 네 아버지 곽상도가 검사 시절 유서 대필 사건을 조작하는 바람에 피해자 강기훈 선생은 지금도 간암으로 목숨을 건 투병 중인데? 그런데 너는 살기 위해 골프를 쳤다고?
진짜 만의 하나 네가 건강을 위해 골프를 쳤다고 해도, 말을 꼭 그렇게 싸가지 없이 해야 직성이 풀리냐? 그냥 “운동 삼아 한 겁니다” 하면 될 일을, 생존을 위해 바둥거리는 수많은 민중들 엿 먹으라고 굳이 “살기 위해서 골프를 쳤다” 운운하는 거냐고?
퇴직금으로 50억 원을 받아(쳐)먹은 자가 생존을 운운하는 것이 하도 가증스러워서 인터뷰를 본 그날 종일 욕만 하다가 하루를 그냥 보냈다. 아, 나야말로 살기 위해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 사람인데 이런 자의 인터뷰로 하루를 허비하다니,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나보다.
염장질의 사회적 해악
아마 그 인터뷰를 본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그 분노의 본질은 위화감이다. 퇴직금으로 50억 원을 받아도 저런 말을 할 수 있구나, 저 인간은 나와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사는구나, 이런 위화감 말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이런 위화감은 사회 전체적인 효율성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관련한 연구를 몇 가지 살펴보자. 먼저 서강대학교 심리학과 나진경 교수의 연구다.
나 교수는 실험 참가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 뒤 A그룹에게는 강남 지역의 부동산 가격 급등과 관련한 기사를 읽게 했다. 반면 B그룹에게는 빈부 격차와 아무 상관이 없는 무미건조한 기사를 읽도록 했다.
이후 이들에게 사례로 5,000원을 지급한 뒤 그 돈으로 도박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했다. 즉 참가자들은 5,000원을 들고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그 5,000원을 걸고 주사위 던지기 도박을 할 수도 있었다. 만약 참가자들이 5,000원을 걸고 주사위를 던져 자기가 걸었던 숫자가 나오면 건 돈의 6배(3만 원)를 가져갈 수 있었다.
자, A와 B 중 어떤 그룹이 더 적극적으로 도박에 참여했을까? 예상대로 강남 부동산 급등과 관련한 기사를 읽은 A그룹이 일확천금을 노리는 도박에 훨씬 많이 참여했다.
이게 바로 위화감 때문이다. 나 말고 누군가가 불로소득을 얻으면 나는 위화감을 느끼고, 그 위화감은 나를 일확천금의 유혹에 빠뜨린다. 이에 관해 나 교수가 브런치에 올린 글을 읽어보자.
“불평등이 야기할 수 있는 다양한 부정적인 반응 중에서 특히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을 위험한 의사 결정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갖고 있는 것이 다른 사람에 비해 초라하다고 느낀다면, 그리고 그런 차이가 너무 명확하게 드러난다면 당신은 어떻게 느끼고 행동하겠는가?
혹시 그런 차이에 조급함을 느끼고 한 방에 그런 차이를 줄일 수 있다면, 돈을 잃을 위험이 있는 투자 상품이나 로또에 관심을 갖게 되지 않을까? 최근 연구에서 이런 경향이 확인되었다.
대학생 참여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수익이 눈에 띄게 불평등하게 분배되도록 유도된 집단의 참여자들이 당첨금은 낮지만 당첨 확률이 높은 안정적인 도박보다는 로또처럼 당첨금은 높지만 당첨 확률이 낮은 위험한 도박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불평등한 지역에 사는 미국인들이 구글에서 ‘복권’이나 ‘담보 대출’ 같은 위험한 옵션에 대한 검색을 ‘저축’이나 ‘대출 상환’과 같은 안정적인 옵션에 대한 검색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많이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사회를 비효율적이고 폭력적으로 만든다
화천대유에서 50억을 받아(쳐)먹은 다음 “살기 위해 골프를 쳤다” 운운하는 곽상도 아들의 발언은 바로 이런 사회적 위화감을 만든다. 모르긴 몰라도 그 인터뷰를 보고 열 받아서 로또를 산 사람들이 연병장 앉아번호로 두 바퀴는 될 것이다. 엄청난 사회적 비효율 아닌가?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심리학과 키스 페인(Keith Payne) 교수의 비행기 좌석과 기내 난동에 관한 연구를 살펴보자.
비행기는 종류에 따라 승객들의 이동 경로가 다르다. 이코노미 클래스 승객들이 탑승을 하면 비즈니스 클래스를 거쳐서 이코노미로 이동을 하는 경우가 있고, 바로 이코노미로 향하는 경우도 있다. 재수가 없으면(!) 퍼스트 클래스와 비즈니스 클래스 두 곳을 거쳐야만 이코노미로 갈 수 있기도 하다.
그런데 페인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비즈니스나 퍼스트 클래스를 거친 고객들이 이코노미에서 난동을 부릴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난동 가능성은 이코노미로 직행한 승객들에 비해 갑절이나 높았다.
하나 더 살펴보자. 비행기에 따라 퍼스트 클래스나 이코노미 클래스가 있는 비행기도 있고, 오로지 이코노미 클래스만 있는 비행기도 있다. 이 둘을 비교했을 때 승객들의 난동 가능성은 얼마나 차이가 날까?
놀랍게도 네 배나 차이가 난다. 지연 시간으로 따지면 이코노미 클래스만 있는 비행기에 비해 좌석 차별이 있는 비행기의 운항 시간은 평균 9시간이나 길었다.
이것도 위화감 때문이다. 이 위화감은 찢어지게 가난한 자들의 질투 같은 단순한 감정이 절대 아니다. 이코노미라도 비행기를 타는 승객들은 삶에 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조차 편안한 비즈니스(혹은 퍼스트 클래스)와 자신의 초라한 이코노미를 비교하면 위화감이 생긴다. 그리고 이 위화감은 사람을 난폭하게 만든다.
사회를 불행으로 내몬다
이번에는 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과 시게히로 오이시(Shigehiro Oishi) 교수의 연구다. 그는 2011년 발표한 논문에서 이전 40년 동안 지속적으로 확대된 미국의 빈부격차가 국민들의 정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를 연구했다.
연구가 다소 복잡한데 다 생략하고 세 가지 결론만 살펴보자. 첫째, 지난 40년 동안 미국 각 주의 빈부격차가 심해졌는데 그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이 더 가난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가난한 사람은 40년 전이나 2011년이나 비슷비슷하게 살았다. 문제는 부자들이 과거보다 훨씬 부자가 됐기 때문이다. 이게 문제의 출발점이다.
둘째, 빈부격차가 커졌을 때 소득수준이 평균보다도 높은 중상층 이상의 사람들은 별로 행복해지지 않았다. 소득이 분명히 늘었는데도 행복은 증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최상층이 너무 더 큰 부자가 되는 바람에 위화감이 생긴 탓이다.
셋째, 이게 제일 큰 문제인데, 소득수준이 평균 이하인 사람들이 크게 불행해졌다. 그런데 이들이 불행해진 이유는 수입이 줄어서가 아니었다. 불행의 원인은 위화감이었다. 내가 가난한 게 슬픈 게 아니라, 부자만 자꾸 더 큰 부자가 되는 현실이 엿 같았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곽상도 아들이 50억 원을 받아(쳐)먹고 “살기 위해 골프를 쳤다”고 떠드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었겠나? 이 불행이 얼마나 사회적 효율을 떨어뜨렸겠나?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실히 일하는 보람 대신 일확천금의 환상에 빠졌겠나?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폭력의 유혹을 느꼈겠나? 곽상도 부자가 50억 원을 꿀꺽 하면서 실로 많은 사회적 해악을 끼쳤다는 이야기다.
제기랄, 안 그래도 강기훈 선생 일로 곽상도 이 자와 같은 하늘 아래 지낼 수 없다고 이를 간 시간이 셀 수도 없었는데, 이제 부자가 쌍으로 내 염장을 지르고 자빠졌다. 내 염장이야 내 개인의 문제니 그렇다 쳐도, 이들이 끼친 사회적 해악은 정말 용서가 안 된다. 이놈들을 어찌 응징해야 죗값에 맞는 단죄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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