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7일 오후 세종시 도담동 행정복지센터 3층 강당에선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이 주최한 ‘2021 민중행정대회’가 ‘국민의 공무원, 공무원이 제안합니다’라는 주제로 펼쳐졌다. 이날 대회에는 예심을 통과한 공무원노조 7개 본부 소속 참가자 10명이 주제발표에 나서 공직사회 개혁과 주민자치, 행정시스템 개선 등 다양하고 참신한 의제를 선보였다.
부산 영도구지부 소속 장태준 조합원은 여러 발표자 가운데서도 많은 주목을 받은 참가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3등에 해당하는 우수상 수상도 주목받았지만, 무엇보다 정년퇴직을 불과 몇 개월 앞둔 조합원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이날 그는 ‘공무원 업무 중재 네트워크 구성 및 관리’를 제안했다. 이는 지자체의 특수시책 및 새로운 사업 실적을 업무 중재 네트워크를 통해 쉽고 빠르게 다른 지자체로 전파,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안한 것이다. 그동안 공직생활 동안 ‘어린이 세금교실’ 등 여러 아이디어를 제안해 실행하면서 느꼈던 아쉬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방안에 많은 이들이 호응했다.
4개월이 지난 지금, 그는 정년퇴직을 앞두고, 공무원 노동자로서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부산 영도구청 세무과 장태준 체납정리팀장을 지난 10월 8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영도구지부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우선 지난 6월 열린 민중대회에서 제안했던 ‘공무원 업무 중재 네트워크’에 대해 “늘 아이디어를 많이 냈어요, 그런데 아이디어를 낼 때마다 맨땅에 헤딩하듯 하나부터 열까지 혼자서 해야 한다. 과거 경험들이 네트워크 시스템을 통해 공유되면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제안했어요. 공무원노조 차원에서 자료를 모아 분야별로 정리하면 아이디어를 내는 데 도움이 되고, 사업을 진행하는 것도 수월해질 것 같아서요. 다른 지자체 등에서 진행한 사업이 있어도, 담당자 연락처 구하는 것도 힘들거든요. 그런 도움을 공무원노조 조직을 통해 공적으로 처리하면 훨씬 효율적일 것 같아요.”
마흔에 시작한 늦깎이 공무원
“공사장, 목공, 선반밀링, 택시기사,
시장 좌판 등 안 해본 일이 없어요”
마흔 살이 넘은 늦은 나이에 공무원에 임용된 그는 정년퇴직을 앞둔 동료들과 비교하면 짧은 경력이다. 하지만, 21년 넘게 이어진 공무원 생활은 그야말로 아이디어가 넘치고, 활기차고, 보람있었던 시간이었다고 그는 자부한다. “대학에서 회계를 전공했어요. 졸업하고, 선박회사에서 경리로 일했어요, 근데 술자리가 많아 힘들었고, 그런 이유로 집사람도 싫어했어요. 술 안 먹는 직업을 고른다고 장애인 특수학교 서무과에서 일했습니다. 사립학교였는데 일종의 준공무원이었어요. 그러다 공무원을 하면 보람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사표를 던지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시험은 쉽지 않았다. 아이들은 커가고, 가정도 꾸려야 해서 시험에 집중하는 것도 어려웠다. 일용직으로 일하며 짬짬이 시험을 준비하다가 원서를 접수한 뒤에 두 달 정도 바짝 공부하는 생활이 7~8년 이어졌다. “당시만 해도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100대1 정도 되다 보니 합격하는 게 어려웠어요. 천신만고 끝에 1997년 9월 부산시 9급 세무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하지만, 합격과 동시에 또 시련이 닥쳤다. IMF 금융 위기가 우리 사회를 흔들면서 공무원 발령이 차일피일 미뤄진 것이다. 그렇게 기약 없는 시간은 2년이 넘게 흘렀다. 시험을 준비하고 또 발령을 기다리면서 그는 공사판, 사출기, 목공, 선반밀링, 택시기사, 관광버스 기사, 시장 좌판 장사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겠다고 고민하던 차에 드디어 2000년 1월 17일 영도구청 세무과에 발령을 받았다. 1961년생(호적상으론 1962년)인 그는 그렇게 마흔 살에 공무원이 됐다. 그리고, 온갖 일을 하며 힘들게 보낸 지난 시간은 공무원 생활을 하는 데 큰 자양분이 됐다. 민원인들의 절박한 호소에 항상 친절하게 귀를 기울인다. 전주희 공무원노조 영도구지부장은 그를 “본인 업무에 최선을 다하고, 민원인에게 항상 친절한 ‘친절왕’”이라고 칭찬했다.
“21년을 근무했는데,
받은 표창이 50여 개예요.
그 가운데 26개가 친절 관련 상입니다.”
“동료들이 친절의 대명사라고 칭찬을 많이 해줍니다. 21년을 근무했는데, 받은 표창이 50여 개예요. 그 가운데 26개가 친절 관련 상입니다. 지나고 보니깐, 공무원이 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친절은 단순히 환한 미소와 인사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는 친절하기 위해선 항상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민원행정 서비스에서 친절은 환한 미소가 아니라, 제대로 된 서비스를 하는 거예요. 많이 아는 것이 진짜 친절이지요. 진정으로 친절하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식과 실력을 갖춰야 합니다.”
공무원이 천직인듯한 그지만, 처음엔 공무원 생활이 낯설었다. 머리로는 자신이 공무원이라고 생각해도,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공무원이 아니던 시절과는 삶의 모습이 달라져야 함을 그는 햇병아리 시절 아주 우연한 사건으로 깨달았다.
햇병아리 공무원 시절
눈 오는 토요일 아들과 썰매 타다
비상근무 나선 사연
“구청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던 때였어요. 토요일이었는데 비번이어서 쉬는 날이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많이 왔더라구요. 부산에선 눈 보기 힘드니깐, 신나는 마음에 못 쓰는 장판을 들고 어린 아들과 함께 아침부터 골목에서 신나게 썰매를 탔어요. 그런데 구청 직원들이 빗자루와 삽을 들고 줄지어 지나가더라구요. 마침 아는 직원이 ‘여기서 뭐 하세요? 비상 걸렸는데’라고 하더라구요. 그 말을 듣고 부리나케 구청으로 달려갔어요. 갔더니 나 빼고 모든 직원이 이미 제설작업을 위해 비상출동을 했더라구요. 그날부터 태풍이 온다는 일기예보만 들어도 부산 밖으로 나갈 생각은 아예 꿈도 못 꿉니다. 여름이면 태풍에 장마, 홍수를 걱정하고, 건조하면 산불 걱정하는 나를 보면서 ‘진짜 공무원이 됐구나’ 느껴요.”
눈이 많이 오거나, 비가 많이 오거나, 산불이 나면 공무원들은 늘 비상근무를 한다. 현장에서 하는 특별한 역할이 없어도 다 쫓아간다. 주민들은 그런 현장에 공무원이 없으면 불안해하기 마련이고, 또 만약을 대비해 그런 준비를 하고 책임을 지는 이들이 바로 공무원이다.
"공무원 업무를 일반 기업의
경영가치로 바라보면 안 돼요.
누군가의 눈에는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여도,
언젠가 꼭 필요한 사람이 공무원이거든요.”
“예전에 친구들에게 ‘동사무소에서 인감 떼는 일은 초등학생도 할 수 있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때 친구들에게 ‘부동산 매매에 필요한 인감증명 등 동사무소에서 발급하는 서류는 매우 중요한 거래에 쓰인다. 아무나 발급한다면 믿을 수 있겠나. 동사무소에서 일하는 건 그런 공증의 의미도 있다’고 설명했어요. 공무원의 노동 가치는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생산적 가치와는 다를 수 있어요. 천 원 또는 몇백 원 받는 업무라고, 그 일이 그 정도 가치만 있는 건 아니거든요. 공무원 업무를 일반 기업의 경영가치로 바라보면 안 돼요. 누군가의 눈에는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여도, 언젠가 누군가에겐 꼭 필요한 사람이 공무원이거든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공무원으로서 가장 큰 보람이다. 공직생활 20년 동안 그렇게 자신이 가진 재능과 역할을 통해 민원인들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준 일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몇몇 일은 아직도 그의 뇌리에 깊이 남아있다.
아기 데리고 세무과에서 울던
여성에겐 과연 무슨 사연이?
“어떤 여성이 젖먹이 아기를 업고, 막 걸음마를 뗀 아이 손을 잡고 세무과 안에서 울고 있었어요. ‘왜 그러시느냐’고 물었더니 전셋집이 경매로 넘어가 쫓겨날 위기라고 하소연을 하셨습니다. 막막한 마음에 영도구청을 찾았고, 하필이면 세무과에서 울고 계셨던 거에요. 다행히 임대차보호법이 우선변제를 보장하는 한도를 넘지 않는 금액이더라구요. 집주인도 그런 사실을 알아서인지 전세금에 못 미치는 돈을 주면서 내보내려고 했어요. 제가 그분에게 돈 받을 수 있으니깐, 절대 집주인이 주는 돈 받고 나오면 안 된다고 했어요. 집주인 연락처도 물어본 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렇게 부당하게 내보내려고 하면 안 된다’고 연락을 했어요. 공무원이 보고 있으니깐 딴생각하지 말라는 경고였던 거죠. 몇 달 뒤에 그 여성분이 고맙다면서 주스를 사 오셨어요. 김영란법이 없던 시절이니 고맙게 받았죠.”
한번은 어떤 할머니께서 세무과에 오셔서 자신 소유의 차가 이미 폐차가 됐는데, 자동차세는 계속 나간다며 문의를 했다. 아들이 그 차를 몰고 포항 인근에서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인근에 있던 견인차가 끌고 가 폐차한 것 같다는 것이다. 사고 당시엔 경황이 없어서 차를 찾을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 차의 행방은 모르고 폐차 확인도 안 돼 자동차세만 부과되고 있다는 하소연이었다.
“몇 년 동안 자동차세 과태료만 쌓였던 거에요, 제가 알아보니 경찰에 사고 접수는 되어 있는데, 경찰도 차의 행방은 모르더라구요. 경북 포항 인근부터 시작해서 일일이 폐차장에 전화를 걸어 찾았죠. 전산으로 처리된 게 아니어서 기록을 뒤져야 했던 일인데, 아무래도 제가 공무원이니까 협조해준 거예요, 그렇게 차를 찾고 폐차 사실을 확인해 문제를 해결했어요, 이런 일을 할 때마다 보람을 느껴요.”
"불평불만 들어줄 수 있는 귀도 필요하거든요.
화내는 민원인을 상대로
자존심을 생각하면 공무원 생활 못 해요.
억울하니깐 그러겠지 하고 참아넘겨요.”
공무원은 이렇게 민원인을 상대하는 일이 많다. 사람을 상대로 일하다 보니 도움을 주는 보람도 느끼지만, 때론 국가를 대표해 민원인들의 욕을 듣기도 한다. 세무과는 특히 지방세를 부과하고, 징수하다 보니 민원인들과 감정적으로 부딪히는 경우가 많다. “체납 세금 징수도 중요한 업무에요. 번호판도 영치하고, 예금압류도 해요. 그러다 보니 멱살 잡히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동전이나, 계산기가 날라오는 일도 예사에요.”
한번은 민원인이 그에게 하도 ‘쌍욕’을 하길래 “저를 길 가다가 만나시면 그렇게 욕하실 수 있겠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민원인은 “못한다”고 답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욕하는 거냐”고 물으니 “공무원이라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공무원은 자신에게 절대 대들지 않을 걸 아니깐, 욕을 하는 거거든요. 쌓인 걸 그렇게 풀어내는 거죠. ‘그렇다면 원 없이 하세요. 인간 장태준에게 욕한 거면 기분이 나쁘지만, 공무원에게 한 거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다’고 했어요. 그렇게 말하니깐 민원인이 조금은 부드러워졌어요. 제가 후배들에게 자주 하는 이야긴데. 공무원 월급엔 ‘욕값’도 조금은 포함돼있는 거라고 말해요. 불평불만 들어줄 수 있는 귀도 필요하거든요. 화내는 민원인을 상대로 자존심을 생각하면 공무원 생활 못 해요. 억울하니깐 그러겠지 하고 참아넘겨요.”
욕을 들어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에 공무원들은 묵묵히 자신이 맡은 일을 한다고 그는 말한다. 사고 치는 공무원들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신경 쓰며 살아가는 조직 가운데 하나라고 그는 자부한다. “공무원으로 살다 보니 알게 모르게 조심하게 돼요. 내 주변에선다 내가 공무원인지 아니깐 늘 조심하거든요. 길가에 쓰레기가 떨어져 있으면 자동반사적으로 주우려 해요. 언젠가 동네에서 어떤 할머니가 내가 길바닥에 떨어진 쓰레기 봉지 주어서 가는 것 보고 공무원인지 알았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렇게 살다 보면 공무원에 대한 인식도 조금은 좋아지지 않을까요.”
“봉급 등 경제적 기준으로만 보면
솔직히 공무원 생활하기 힘듭니다.”
고용이 불안해지다보니 공무원이 인기 직종으로 떠오르고 있다. 2021년 국가직 9급 공무원 경쟁률은 평균 35대1이었고, 8·9급 지방공무원 경쟁률은 평균 19.2대 1이었다. 그는 중고등학교를 방문해 직업선택 교육을 할 때마다 “편안하게 살고 싶어서 공무원이 되고 싶다면 1년도 채 안 돼 고민에 빠질 것”이라고 말한다. 희생, 봉사, 헌신 이런 자세나 마음가짐이 없다면 견디기 힘들다고 그는 지적한다.
실제로 많은 공무원이 힘겨운 경쟁을 뚫고 시험에 합격했지만, 몇 년 일하지 못한 채 그만둔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공개된 공무원연금공단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9년 재직 5년 미만 공무원 퇴직자가 6664명으로 2018년(5670명), 2017년(5181명)에 비해 크게 늘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임용 1년도 안 돼 공무원을 그만둔 경우가 전체의 26.5%(1769명)에 달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그는 “공무원 인기가 높아지니 최근 들어오는 친구들은 대기업에서 일하는 친구들보다 능력이나 스펙이 더 뛰어나요. 하지만, 공무원들의 대우는 대기업엔 훨씬 미치지 못하니까 이직하는 이들이 많아요. 봉급 등 경제적 기준으로만 보면 솔직히 공무원 생활하기 힘듭니다”라고 지적했다.
‘공무원 월급에 욕값이 포함돼 있다’고 할 정도로 민원인들에게 욕을 들어야 하는 현실도 공무원 생활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다. 제도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는 건 사실이겠지만, 어느 정도는 각오해야 공무원으로 일할 수 있다고 그는 강조한다. “민원인에게 말도 안 되는 욕을 듣다 보면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항상 직원들에게 ‘공무원은 아홉 명에게 욕 듣고, 한 명에게만이라도 감사하다고 인사하면 된다’고, 그 한 명 때문에 견디며 일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해요.”
“공무원노조에 가입했지만,
솔직히 처음엔 잘 이해가 안 됐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전 보수적이거든요.”
민원인에게 욕을 들을 각오까지 하면서 제대로 민원을 처리하기 위해선 공무원 자신의 삶이 안정적이어야 한다. “내가 안정적이지 못한데, 남을 향해 도움의 밧줄을 당길 수 있겠냐?”고 그는 물었다. 공무원의 삶의 자리가 불안하면 소신껏 행정을 펼치지 못하고, 부당한 지시가 내려와도 맞설 힘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은 공무원이 공무원답게 일할 수 있게 하는 든든한 뒷배가 되고 있다고 그는 믿는다. 하지만, 사실 그는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이 만들어질 당시만 해도 ‘공무원에게 노조가 왜 필요하냐’고 생각할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제가 일을 시작한 2000년 당시엔 직장협의회가 있었어요. 그러다 2002년 노조가 만들어졌습니다. 노조원이 되긴 했지만, 솔직히 처음엔 잘 이해가 안 됐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전 보수적이거든요.”
그랬던 그가 노동조합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은 건 2002년 말 공무원 노동기본권쟁취 연가파업 때문이다. 당시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은 전국적으로 연가투쟁을 계획했고, 영도구지부도 전 조합원이 참여하는 연가투쟁을 지부장 등 노조 지도부가 제안했다.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연가파업 독려집회가 열렸고, 집회에서 지부장이 조합원들에게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을 하라고 했다. 그때 그가 손을 들고 “총무과에선 연가투쟁하면 자르겠다고 하고, 노동조합은 지켜주겠다고 하는데, 솔직히 총무과 공문이 더 무섭다. 투쟁하다 잘리면 마누라는 이혼하자고 할지도 모르는데, 노조 어떻게 지켜줄 거냐”고 물었다.
“다 함께 싸우면 안 잘린다”는 말에
시작한 연가투쟁… 공무원노조와 함께하다
지부장은 “그러니까 다 같이 움직여야 한다. 다 함께 싸우면 잘라도 책임자만 자른다”고 했다. 그는 그 말 믿고 연가투쟁에 함께했다. “나중에 지부 간부가 노조활동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어요. 저는 난 보수적이고 투쟁하는 노동조합하곤 솔직히 안 맞는다, 구청장도 인간적으론 좋아해 집회에서 ‘구청장은 자폭하라’ 이런 식의 구호도 절대 못 한다고 했어요. 근데 ‘자동차도 양쪽 바퀴로 가는 거다. 노조도 한쪽 바퀴로만 가면 제자리를 뱅뱅 돈다. 다른 소리 내는 이도 같이 있어야 균형과 발전이 있다’면서 ‘장 주사께서 보수적 성향이고, 나이도 40대 중반이니 간부를 맡아달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노조 간부는 내 자리가 아니라고 여겨 회계감사위원장을 맡았습니다. 노조 활동을 전반적으로 관찰하고 도움을 주면서, 지부 활동에 쓴소리도 할 수 있는 자리여서 맡은 거예요. 그 뒤 12년 정도 회계감사 위원장을 했고, 이후엔 회계감사위원으로 일하고 있어요.”
그는 웃으면서 자신이 지부에서 야당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솔직히 지부서 투쟁하자고 할 때 반대 의견도 많이 냈어요, 그래서 동료들이 농담 삼아 ‘사쿠라’라고 놀리기도 해요.” 그는 그렇게 이런 의견 저런 의견이 나오면서 노조가 건강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에겐 원칙이 있다. 치열하게 논의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만 그런 논의 끝에 결정되면 당연히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다른 의견을 냈었다고, 투쟁이나 행동에 함께하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그건 노조 활동을 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니에요”라고 강조했다.
“철저한 회계와 돈 관리가
노동조합을 노동조합답게 만든다”
12년 넘게 맡아온 회계감사 위원장
그런 단결의 자세와 함께 그는 철저한 회계와 돈 관리가 노동조합을 노동조합답게 만드는 첫걸음이라고 믿는다. 회계와 돈 관리에 문제가 일어나면 노동조합은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회계감사 업무를 대충하지 않았어요. 꼼꼼하게 사명감 가지고 지켜봤습니다. 조합원들도 노조 회계에 의문을 가졌다가도 제가 괜찮다고 말하면 믿어주는 분위기에요”라고 말했다. 전주희 지부장은 “매번 조합비를 꼼꼼하게 점검하고, 미비한 부분을 지적하면서 노조가 예산을 잘 쓸 수 있도록 챙겨주신다”고 그를 추어올렸다.
그는 노동조합비 집행에도 원칙이 있고 우선순위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가 생각하는 조합비 집행의 원칙과 우선순위는 ‘희생자구제기금’이었다. “노조에서 노조 활동을 하다 해고된 이들을 위한 ‘희생자구제기금’은 늘 우선 집행하라고 강조했어요. 이 돈은 해고된 조합원들의 생활비거든요, 이런 돈을 철저하게 집행하지 않으면 신뢰가 생길 수 있겠어요. 누가 나서서 싸우겠어요. 노조 활동은 믿음과 신뢰가 바탕이에요. 땅속에 있는 금을 찾겠다고 동지가 밧줄을 매고 들어갔는데 금이 안 보인다고 동지에게 묶인 밧줄을 자르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누가 다음에 몸에 줄 묶고 땅속에 들어가겠어요.”
“지금은 노조가 있어 공무원들이
소신껏 일하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이런 동지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공무원 노동자들이 소신껏 일하는 힘이 된다. 그는 씨랜드 참사를 예로 들었다. 1999년 6월 30일 경기도 화성군(현 화성시) 서신면 백미리에 있는 청소년수련원인 씨랜드에서 화재가 일어나 유치원생 19명과 인솔교사 및 강사 4명 등 23명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수사 결과 해당 시설 시공 운영 등 과정에서 시장의 압력을 받은 공무원들이 부당하게 허가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담당자가 윗사람 압력에 견딜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하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면서 “지금은 노조가 있어 공무원들이 소신껏 일하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노조 활동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조금은 넓어지게 했다. 다른 노동자들의 투쟁을 바라보는 눈길에도 애정이 담길 수 있게 됐다. 그는 “예전엔 피상적으로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보면 ‘자기들만 잘살려고 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제가 노조 활동을 해보니 왜 싸우는지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됐어요”라고 고백했다. 오는 10월 20일 민주노총이 결의한 총파업 투쟁에 그를 비롯한 공무원 노동자들도 이날 12시부터 1시까지 업무를 중지하며 함께한다. 또한, 이날 투쟁은 그동안 민원인의 편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법에 보장된 휴식권을 인정하지 않고 동의 없는 강제노동으로 공무원 노동자의 ‘밥 먹을 자유’마저 빼앗아온 관행을 바꾸기 위한 도전이기도 하다. 그는 “아직 전면적으로 점심시간을 보장받긴 어려울 것”이라고 여기는 온건파지만, 늘 그랬듯이 20일 투쟁에 함께할 것이다. “당장은 힘들어도 공무원들이 점심시간에 노동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줄 필요는 있다”고 그는 말했다.
전주희 영도구지부장
“재치와 유머가 많아요.
구청이나 노조 행사에서
늘 앞장서는 분이에요”
‘영보이스’ 중창단 만들어
전국노래자랑 TV 출연까지
스스로 보수적이라고 말하고, 아직도 투쟁에 익숙하지 않은 그지만 노조 활동엔 누구보다 열심이다. 노동조합 행사에서 사회도 보고, 신입조합원 교육에서 무대에 서는 등 팔방미인으로 활약을 하고 있다. 전주희 지부장은 “재치와 유머가 많아요. 구청이나 노조 행사에서 늘 앞장서는 분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는 “대학 다닐 때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오래 해서 레크리레이션에 익숙해요. 대학 시절 사회를 보는 등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한동안 못했는데, 공무원이 되고 나서 영도구청에서 민원인들 상대로 하는 행사나, 직원 행사, 노조 행사에서 무대에 자주 나갑니다. 저는 남들이 하라고 하면 다해요. 절대 사양 안 합니다.”
행사를 도맡아 하는 그는 영도구청과 영도구민이 알아주는 가수이기도 하다. 지난 2008년부터 뜻맞는 동료들과 ‘영 보이스’라는 중창단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공무원 생활을 하니 경로당에 선물을 들고 가는 일이 많아요. 근데 그냥 선물만 전달하고 오기 뻘쭘해서 어르신들을 모시고 재롱잔치라도 하자는 생각에 중창단을 만들었습니다. ‘영도의 소리’라는 의미로 ‘영 보이스’라고 지었는데, 사람들은 젊다는 의미의 ‘young’인줄 알아요. 주변에선 나이 오십이 훨씬 넘은 사람들이 무슨 영이냐고 핀잔도 줘요.” 영 보이스는 매년 어버이날 지역 어르신들을 찾아 공연을 펼치고, 경로잔치 무대에도 오른다. 영도구청이 주최하는 영도다리 축제에서 공연하는 등 한 70회 정도 무대에 섰다. 지난 2013년엔 KBS 전국노래자랑 본선에 나가 TV에 출연한 적도 있다.
동네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늘 공무원으로서 부끄럼 없게 살아온 그를 닮아 아들도 경찰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아들이 직업을 선택할 즈음에 이야기를 나누다 ‘아빠가 공무원 생활을 해보니 공무원은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직업이다. 내가 볼 땐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민원인은 큰 도움을 받았을 때 성취감이 크다. 그런데 경찰 공무원은 절박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더 의미 있는 일일 것 같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정말 아들이 경찰이 되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정년퇴직 뒤 꿈이요?
행정사 사무실 만들어
동네사랑방으로 꾸미고,
엿장사 공연하며
자선모금 하는 거에요.”
그가 공무원 노동자로서 일할 시간은 이제 두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아직 은퇴하기엔 젊다고 믿는 그는 새로운 인생을 준비 중이다. 우선 오는 10월 30일 공인중개사 시험에 도전한다. 공인중개사 시험에 붙으면 이미 딴 행정사 자격증을 가지고 조그만 행정사 사무실을 차릴 계획이다. 부동산 관련 업무를 비롯해 동네 주민들이 꼭 관공서에 가지 않더라도 행정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동네 사랑방을 꾸미는 게 그의 꿈이다. 아울러 그의 또 다른 꿈은 엿장사 버스킹을 해 1억 기부하는 것이다. 무슨 뚱딴지같은 꿈이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구체적인 준비도 시작했다.
“엿장사 가위도 샀어요. 엿장사 공연을 할 수 있게 틈틈이 연습하고 있습니다. ‘1억 기부금 모읍니다’라고 걸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죽을 때까지 공연할 거에요. 엿장사 공연하면 파는 엿 다 사준다는 친구도 있고, 도움 주겠다는 친구도 많아요. 제게 60년 정도 살아보니깐 남탓보다는 나를 먼저 돌아보게 되더라구요. 내가 조금 더 베풀면 다른 이들이 편해지고, 세상도 살기 좋아지겠죠. 그게 남은 인생 저의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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