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돌 손잡이를 ‘어이’라고 해요. 맷돌에 뭘 갈려고 집어 넣고 맷돌을 돌리려고 하는데! 손잡이가 빠졌네? 이런 상황을 ‘어이가 없다’고 그래요. 황당하잖아~ 아무것도 아닌 손잡이 때문에 해야 할 일을 못 하니까. 지금 내 기분이 그래~ 어이가 없네.”
영화 ‘베테랑’에서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가 밀린 임금을 받으러 온 화물노동자 배기사(정웅인)에게 한 말이다.
열악한 처우를 개선하겠다고 화물노동자들이 단체로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에 가입하자, 하청업체는 밀린 임금도 주지 않고 전부 해고해버린다. 배기사가 하청업체 대표인 전소장(정만식)을 찾아가 “해고를 하더라도 줄 건 줘야 하지 않냐”고 항의하자, 전소장은 적반하장으로 “그러게 왜 단체가입해서 그 지랄이야! 종북빨갱이야!?”라고 소리친다. 이어, 그는 줄 돈 없으니 밀린 임금을 받고 싶으면 본사에 가서 얘기하라고 한다.
배기사는 하청업체에 아무리 ‘일방적 계약해지 및 임금체불 문제’를 항의해도 소용없자, 원청인 신진물산 조태오를 찾아간다. 조태오를 연기한 유아인의 명대사 “어이가 없네”는 여기서 나왔다.
배기사는 조태오를 만나 항의한다. “(노동)조합에 가입했다고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하시면…” 그랬더니, 옆에 있던 신진물산 최상무(유해진)가 하는 말이 가관이다. “우리가 계약해지 한 건 아니잖아~ 그쪽이 우리랑 계약했어?”
영화가 아닌 현실
베테랑의 다음 장면은 정말 영화 같은 이야기로 전개된다.
조태오는 하청업체 대표 전소장을 불러 배기사와 격투 시합을 붙인다. 그리고 배기사는 아들이 보는 앞에서 폭행을 당한다. 그 자리에서 조태오는 배기사에게 밀린 임금과 약값, 아들 과자값이라며 100만 원짜리 수표 4장과 1천만 원짜리 수표 2장을 준다.
이 영화 속 이야기는 놀랍게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이는 2010년 SK그룹 회장의 사촌 최철원 당시 M&M 대표가 유홍준 화물노동자를 불러 야구방망이로 폭행한 뒤 ‘맷값’으로 2천만 원을 준 실화를 각색한 것이다. 유 씨는 다니던 주식회사 동서상운(SK에너지 자회사)이 M&M에 흡수·합병된 뒤 화물연대본부(노조) 간부라는 이유로 고용승계에서 제외되자 부당한 노동탄압이라며 원청인 SK에너지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 그러자 M&M 측은 유 씨를 용산의 한 사무실로 불렀다. 유 씨는 이 자리에서 야구방망이로 40여분 동안 구타당했다. (※ 관련 민중의소리 기사 : SK 최태원 회장 사촌동생 최철원 사장 폭행사건의 전말)
이 사건의 내용은 대부분 사실로 밝혀졌다. 유 씨를 폭행하고 맷값으로 2천만 원을 건넨 혐의로 기소된 최 씨는 법원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최 씨에게 아직 묻지 못한 게 있다. 사용자로서의 책임이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최 씨와 같은 갑질 사용자가 화물노동자를 계약해지(해고)하거나, 협력업체를 바꾸면서 고용승계하지 않아도 사용자로서의 책임을 묻지 못한다. 화물노동자가 노동관계법에서 규정하는 노동자로 분류되지 않고 특수고용직으로 분류되다 보니 관련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이에 따라 사용자의 책임도 못 묻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서글픈 파업, 뒷짐 지는 사용자
21일 박귀란 화물연대본부 정책국장은 2010년이나 지금이나 화물노동자가 겪는 문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운임(임금)의 최저선이 보장되지 않고, 노조도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법외노조로 있다. 노조가 맺은 단체교섭도 강제력이 없다. 최근 일부 화물노동자에게 산재보험이 적용되고 있긴 하지만, 상당수는 여전히 산재보험 대상에서 빠져 있다.”
화물노동자는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근로기준법(근기법)과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등 노동관계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화물노동자처럼 노동자로 일하면서 계약 형식은 사업주와 개인 간 도급계약을 맺다 보니 노동관계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들을 특수고용직이라고 일컫는다.
화물노동자는 이런 이유로 노조를 결성해도 합법적인 노조로 인정받지 못하고, 헌법상 모든 노동자의 권리인 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조차 정당한 권리로 행사하지 못한다. 과적·과속·과로를 야기하는 운송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조에 가입해 단체행동에 나섰다가는 계약해지(해고) 당하기 일쑤고, 어렵게 노조를 만들어 회사와 단체교섭을 맺더라도 강제성이 보장되지 않으며, 해고를 무릅쓰고 단체행동이라도 벌이면 회사는 대체근로 투입으로 단체행동(파업)을 무력화한다. 노조법상 쟁의행위 기간 중 대체근로 투입은 불법이지만, 노조법의 보호를 받는 노동자가 아닌 특수고용직이라는 이유로 화물노동자들의 쟁의행위는 노조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용자들은 이런 상황을 활용해서 화물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손쉽게 외면한다.
그나마 화물노동자들은 노조를 통해 운송업체들을 교섭 장소로 나오게 했다. 하지만 여전히 실질적 권한을 갖고 있는 원청은 화물노동자와 직접계약 관계에 있지 않으니 운송업체와 알아서 하라며 교섭을 외면하기 일쑤였다. 박 정책국장은 설명했다. “화물노동자의 운임이나 노동조건은 모두 화주기업이 결정한다. 화주기업이 원청 역할을 하면서 전부 결정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화주기업과 직접교섭이 필요하지만 (화주기업에 교섭을 요구하면) ‘우리랑 계약했냐? 직접계약 관계인 운송업체랑 얘기해 봐라’라는 식으로 나온다. 그럼 투쟁이 불가피하다.”
최근 화물연대가 SPC그룹 유통업체인 SPC GFS를 상대로 파업을 벌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업계 매출이 증가하고 SPC그룹 매장이 우후죽순 늘면서 화물노동자들의 운송 거리도 10년 전보다 2배 이상 늘었다. 반면, 화물차량에 대한 증차는 없었다. 화물노동자들의 노동 강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정해진 시간에 배송을 끝내기 위해서는 3과(과적·과속·과로)를 해야 했다. 화물연대가 화물차 3대를 증차해 달라 요구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양보해서 2대만 증차하기로 운송업체와 합의했다. 파업에 나서면 가맹점주들이 피해를 보기 때문에 노조가 양보하고 또 양보한 안이었다. 하지만 원청인 SPC GFS는 이를 뒤집었다. 직접계약 당사자가 아니니 화물연대와 교섭할 의무가 없다며 뒷짐을 지다가, 운송업체와 합의를 해오면 이를 뒤집어 버렸다. 화물연대 파업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화물노동자는 근기법의 보호대상이 아니다 보니 근기법에서 막고 있는 대체인력 투입이 자유롭게 이뤄지면서 해고를 무릅쓴 파업이 무력화됐다. 이에, 화물노동자들은 사업장 입구를 막아서는 극단적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SPC GFS는 화물노동자들과의 계약을 해지하고 수십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베테랑에서 그려졌던 2010년 일은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반복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서글픈 일이라고 해야 할까. 화물노동자의 파업은 노조설립필증 자체를 못 받은 단체의 파업이기에 ‘불법파업’이라고 부를 수 없다. 노동자의 생존을 건 파업이 자영업자의 단체행동으로 여겨져 절차를 지키지 못한 노조법 위반 혐의가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최상무가 너무 많은 세상 “우리랑 계약한 건 아니잖아?”
또 다른 대표적 특수고용직인 택배노동자들도 화물노동자들과 비슷한 처지다. 다만, 택배노동자의 권리문제는 최근 소박한 진전이 있었다.
택배노동자들도 화물노동자들처럼 원청이라고 할 수 있는 택배사와의 직접교섭이 절실한 상황인데, 최근 중앙노동위원회가 “CJ대한통운이 전국택배노동조합의 단체교섭 요구를 거부하는 것은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는 판정을 내놨다. 근기법의 보호를 받는 노동자로 인정받진 못했어도, 노조법의 보호를 받는 노동자로는 인정받아 고용노동부로부터 노조설립 필증을 받고, 원청인 택배사에 끊임없이 직접교섭을 요구하면서 이루어진 진전이었다.
택배노조가 CJ대한통운과 직접교섭을 원하는 이유는 직접계약 관계에 있는 대리점들과 백날 교섭 해 봐야 해결되는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화물운송에서의 ‘화주기업-운송업체-화물노동자’ 관계처럼 택배산업도 ‘택배사-대리점-택배노동자’의 관계를 이룬다. 화물노동자들에게 직접계약 관계가 없더라도 실질적 권한을 가진 화주기업과 교섭이 필요한 것처럼, 택배노동자들도 심각한 과로사 문제를 해결하려면 권한 없는 대리점과의 교섭이 아닌 권한을 가진 택배사와의 교섭이 필요하다. 그래서 택배노동자들은 2017년 노조 설립 후 업계 1위 CJ대한통운에 직접교섭을 요구했다.
노조의 교섭요구를 받은 CJ대한통운의 첫 번째 답은 “택배기사들은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노동조합으로 인정할 수 없다”였고, 고용노동부로부터 노조설립 필증을 받은 뒤에는 “우리랑 계약관계에 있는 건 아니잖아”였다.
기시감이 드는 답변이다. 실제로 ‘왜 택배노조의 교섭에 응하지 않느냐’고 CJ대한통운 측에 물으면, 관계자들은 이 같은 답변을 내놓았다. 이는, “너희들이 아무리 노조설립 필증을 받아 왔다고 하더라도 직접계약 관계가 없다. 택배사는 교섭에 응할 의무가 없으니, 직접계약 관계에 있는 대리점에 가서 무의미한 교섭이나 반복하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영화 베테랑의 최상무가 너무 많은 세상이다.
문제는 교섭에 응해야 한다는 중앙노동위원회의 판정이 나왔음에도, CJ대한통운은 이를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이 사건은 법정 싸움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되면, 택배노조가 법정에서 승소한다고 하더라도 1심-2심-대법원 판결까지 지난한 시간을 견뎌야만 한다.
사실상 그 기간 동안 이들 노동자에게 처우개선의 기회는 박탈된 상태나 다름없는 셈이다.
이같이 원청과의 교섭을 통한 개선은 꿈 꿀 수 없으니, 노동자들은 극단적인 투쟁을 통해서라도 공론화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비정규직이 직고용 요구하는 이유
처우개선의 기회가 박탈된 노동자는 특수고용직뿐만 아니다. 문재인 정부 내내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회사는 안 된다”며 직고용 투쟁을 벌인 이유도 비슷한 배경에서 비롯됐다.
이달 10일, 대구 한국장학재단 앞에서 콜센터 상담사 직고용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16일째 24시간 천막농성 중이던 염희정 서비스일반노동조합 한국장학재단지회 지회장은 자회사를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저희가 회사와 교섭을 할 때 주로 요구했던 것은 휴식시간 보장과 임금 인상이었다. 그럼 항상 하는 말이 ‘원청이 허가하면 해 줄게’, ‘원청에서 도급비를 올려주면 임금을 올려줄게’였다. 그런데 자회사로 전환된 공공기관 교섭을 보면, ‘원청’이란 단어가 ‘모회사’로 바뀐다. 그럼 우리는 모회사가 교섭에 의무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이상 자회사를 거부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직접고용이 되지 않는 이상, 권한을 가진 모회사는 제도적 결함을 이용해 자회사 노동자들과 교섭을 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처우개선의 기회는 계속 없을 것이라는 불안에서 직접고용을 요구하고 있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회사 설립을 통한 정규직 전환 방식 또한 간접고용이라고 보는 이유다.
‘한번 비정규직은 평생 비정규직’이란 말이 있다. 비정규직은 아무리 노력해도 비정규직의 처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의미다. 안 그래도 처우가 열악한데 중간에 하청·용역·협력·위탁 업체를 두어 처우개선의 기회까지 빼앗고, 소수의 직군에 대해서만 안정적인 노동환경을 제공하여, 과도한 경쟁주의를 부추기는 사회가 낳은 말이다.
올해 7월 23일 직접고용을 요구하던 국민건강보험공단 콜센터 상담사들이 집회 개최를 막아서는 경찰을 피해 언덕을 기어올랐던 이유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일부 언론은 이 모습을 ‘좀비’에 비유하며 조롱했지만, 같은 비정규직들은 가슴이 아려 밤잠을 설치게 한 광경이었다.
보통 ‘직고용’이 최선의 답이 된다. 당장의 처우 개선뿐만 아니라, 원청이었던 회사와 직접교섭이 가능해지면서 처우개선 기회도 마련되기 때문이다. 지난 2018년 4월 직고용된 7천여 명의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수리기사들이 대표적이다. 이달 11일 곽형수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통합지회장은 말했다. “협력사 시절에는 결정도 잘 못할뿐더러, (노조와 협력사 간) 결정한 것도 이행 못하고 번복하는 일이 있었다. 직고용 이후, 결정된 것은 이행된다. 센터들이 많다보니, 간혹 센터장 중 이해 못하는 이가 있지만, 그런 경우도 곧 시인하고 시정된다.”
물론, 수리기사들이 직고용이 될 때까지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노동조합도 열악한 처우와 박탈된 처우개선 기회 등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직고용 투쟁을 전개했다. 이 투쟁을 저지하기 위한 삼성의 노조파괴 공작과 노조원 괴롭히기로, 염호석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산분회장 등 노동자 여럿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바 있기에, 직고용은 귀중한 성과였다.
회사에도 이득이었다. 직고용하면 경영사정이 악화될 것이라는 세간의 우려와는 반대로, 오히려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협력업체 직원 직고용으로 인건비가 증가했지만, 서비스대행료와 각종 지급수수료가 더 크게 줄면서 오히려 이익을 본 것이다. 모순적이게도 삼성은 직고용 후 ‘서비스 질 향상’과 ‘고객 만족도 제고’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는 찬사를 받았다.
직고용만으로는 해결 안 되는 잃어버린 처우개선의 기회
모든 노동자가 직고용으로 실질적인 처우개선의 기회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지만, 문제해결 방법은 그리 간단치 않다.
우선 직고용이 쉽지가 않다. 문재인 정부에서 추진된 공공부문 비정규직 직접고용 정규직 전환 사례를 보더라도, 기존 정규직의 반대 등으로 상당한 사회적 갈등이 발생한 바 있다. 정규직 전환으로 ‘고용불안 문제’와 ‘박탈된 처우개선 기회 문제’만 해소하고 임금 등 처우는 기존 정규직과의 차별을 유지하는 방안으로 논의되어도 “공정성을 해친다”는 반발이 나왔다. 일부 정규직과 사회는 차별과 양극화, 계급화를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사회개혁을 거부했다.
원청의 사용자성을 사법부 판단에 맡기는 것도, 재판 결과가 나오기까지 피 말리는 기다림과 투쟁을 야기했다. 하청업체 직원이었던 한국도로공사 요금수납원들은 자회사로의 정규직 전환을 거부했다가 일자리를 잃고 317일 동안 거리농성을 해야만 했다. 대법원 판결을 비롯한 다수의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 승소한 뒤에야 직접고용을 이룰 수 있었다. 승소 후에는 이미 요금수납원들의 업무가 자회사로 넘어간 상태여서 직고용 된 뒤에도 본연의 업무를 할 수 없었다.
직고용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아파트 경비·환경미화 노동자 등이 그렇다. 용역업체를 끼지 않고 아파트 관리사무소가 경비·환경미화 노동자를 직접고용 한다고 하더라도, 처우개선의 실질적 권한은 아파트입주민대표회의에 있다. 사용자가 다면화돼 있는 구조여서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단순히 관리사무소(원청) 또는 용역업체(하청)와의 전통적인 단체협상으로는 한계가 큰 셈이다.
대리운전, 배달, 웹툰 등 플랫폼산업의 경우도 전통적인 노사관계가 아니다. 최근 대리운전노동자와 배달노동자의 경우 노조법의 대상으로 인정돼 플랫폼사용자와 단체교섭도 하고 있긴 하지만, 이는 노동자들이 수년 동안 플랫폼사용자의 일방적인 갑질을 견디며 투쟁한 결과다. 웹툰과 그 외 신생 플랫폼산업에서의 노동자들은 노조가 있어도 사용자와 교섭 시도조차 못해보고 불공정거래에 휘둘리고 있다.
꼭꼭 숨는 ‘진짜 사장님’
노동자가 권한이 있는 사용자와 교섭하지 못해 처우개선의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사용자를 협소하게 정의하고 있는 노동관계법과 이를 더욱 협소하게 해석하려는 재계의 입장 때문이다.
노조법 제2조는 사용자에 대해 “사업주, 사업의 경영담당자 또는 그 사업의 근로자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 사업주를 위하여 행동하는 자를 말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재계는 사용자의 정의를 “노동자와 직접계약 관계에 있는 자”로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화 ‘베테랑’의 최상무와 같은 입장인 것이다. 올해 6월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가 “택배노조의 교섭 요구를 원청 CJ대한통운이 거부하는 것은 부당노동해위에 해당한다”고 판결한 것을 두고, CJ대한통운이 불복하고 행정소송을 제기한 것도 같은 취지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도 “단체교섭 당사자로 사용자가 되기 위해서는 해당 조합원과 개별적 근로계약관계가 당연히 전제되어야 한다”라며 “중노위의 판결은 현행법상 근거가 없다”라고 반발한 바 있다.
산업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근로기준법은 1953년에 머물러 있는데, 협소한 법 해석을 고수하며 노동자들이 무리한 투쟁을 전개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셈이다.
진짜 사장님 찾기
노동계와 재계 양 측의 입장을 모두 고려한 판례는 계속 나오고 있다. 노동자의 기본적인 노동조건에 관하여 어느 정도의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느냐에 따라 직접계약 관계가 없더라도 사용자라고 볼 수 있다는 2010년 현대중공업 판례가 대표적이다. 이른바 ‘지배력설’이다. 택배노조 관련 중노위의 판정 또한 이 대법원판례를 근거로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지배력설로는 빠르게 변화하는 산업을 따라갈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일부 학계(윤애림 박사 등)에서는 “자신의 사업을 위해 해당 노동자의 노동력을 이용하고 있다면 사용자로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지배력을 따질 게 아니라 누가 그 노동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보고 사용자성을 부여하자는 것이다. 이 같은 법리를 따라가면, CJ대한통운은 대리점 택배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사용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지배력을 따지지 않아도 분명한 사용자가 된다. 또 아파트경비노동자 사례에서도 입주자대표회의에 일정 정도의 사용자 책임을 부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대안으로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결정하는 모든 사용자에게 책임을 부여하는 ‘공동사용책임제’를 제시하는 법률단체도 있다. 국민입법센터(대표, 이정희)는 노조법상 ‘사용자’의 정의를 개정해 이를 실현하자고 제안한다. 사용자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로부터 노동을 제공받는 자’로 규정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업주가 둘 이상일 경우 계약의 존재 여부와 그 형식에 관계없이 이들을 모두 사용자로 정하는 식이다.
공동사용자 개념은 이미 미국에서 사용하고 있다. 국민입법센터에 따르면, 미국의 창고업체 브라우닝페리스 하청노동자들이 원청 브라우닝페리스에 직접교섭을 요구한 사건에서 미 연방노동위원회는 하청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준 바 있다. 또 맥도날드 가맹점 노동자들이 제기한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 사건에서 연방노동위원회는 맥도날드 가맹본부에 공동사용자 지위를 인정하는 구제청구장을 발부한 바 있다.
편집자 주 ㅣ 대통령선거가 4개월 남짓 앞으로 다가왔다. ‘누가 돼야 한다’는 이유보다 ‘누가 돼서는 안 된다’는 이유가 유독 넘쳐나는 요즘이다. ‘역대급 비호감 대선’ 등으로 평가절하 된다.
하지만, 이번 대선은 국가의 운명과 국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민중의소리는 이번 대선이 한국 사회가 더 진보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믿는다.
‘2022 더 왼쪽으로’는 대선에서 주목할 만한 진보적 대안을 조명해보는 기획이다. 연말까지 몇 차례에 걸쳐 독자들에게 전할 의제와 주장에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