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소픽 노동자 열전

[노동자 열전⑬] 60대 레즈비언 윤김명우 “왜 당신의 직장엔 성소수자가 없을까요?”

40대 중반에 커밍아웃… 지금은 레즈비언 카페 ‘레스보스’ 운영하며 후배들 고민 상담

레즈비언 카페 ‘레스보스’ 운영자 윤김명우 씨


“성소수자는 당신의 일상 속에 있습니다.”

지난 2020년 7월 31일 서울지하철 신촌역에 게시됐던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공동행동 캠페인 광고 문구다.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인 5월 17일을 알리기 위해 성소수자와 지지자 517명의 얼굴 사진을 넣어 광고를 만들었다. 이 광고는 5월 17일에 맞춰 홍대입구 전철역에 게시될 예정이었만, 지하철 광고를 관리하는 서울교통공사가 ‘성소수자 광고’는 ‘의견 광고’라는 이유로 심의를 지연시켜 게시가 미뤄졌다. 결국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는 등 우여곡절을 거쳐서야 한 달 보름이 지나 신촌역에 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광고는 게시 이틀 만에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채 발견됐다.

광고판은 훼손 하루 만에 다시 설치됐지만, 이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고민을 던져줬다. 무엇을 요구하는 정치적인 메시지도 아니고, 사회를 뒤집자는 선동도 아니었다. 그저 성소수자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뿐인데, 그것만으로도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게 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엄연히 존재하지만 현실에서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성소수자들. 그래서 이들의 투쟁은 항상 무슨 거창한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나의 존재를 인정하라’는 원초적인 요구를 담고 있다. 지난해 열린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슬로건도 “우리가 여기 있다”였다.

지난 2020년 8월 서울 지하철2호선 신촌역 내 게시된 성소수자 관련 광고물. 광고 훼손으로 인해 다시 설치된 광고물에도 누군가 칠한 파란 훼손 자국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성소수자들은 과연 어디에 있고, 또 얼마나 되는 것일까? 한국은 아직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 성 정체성과 관련한 질문이 포함된 국가적 대표성이 있는 통계 조사를 한 적이 없다. 그래서 성소수자 인구와 관련한 정확한 통계를 알 수 없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통계를 참고하면 인구 가운데 대략 3~7% 정도가 성소수자라고 한다. 많게는 10%에 육박한다는 주장도 있다. 성소수자가 대략 인구의 3% 정도라고 가정해도 우리나라 인구 5천100만 명 가운데 약 153만 명으로 대전광역시 인구와 맞먹는다.

“다들 밖으로 잘 안 나와요.
자신의 성정체성을 들킬까
조마조마하며 사는 이들이 많아요.”


하지만, 150만 명이 훌쩍 넘는 성소수자들을 일상에서 만나는 건 쉽지 않다. ‘노동자 열전’ 인터뷰를 위해 성소수자 노동자를 찾으면서 이런 현실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얼굴과 이름을 드러내고 인터뷰를 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 것조차 어려웠기 때문이다.

서울 이태원에 있는 레즈비언 카페 ‘레스보스(Lesves) 운영자인 윤김명우 씨는 성소수자 노동자를 찾기 힘들었다는 말에 “성소수자는 어디에나 있고, 여러분과 함께 일하고 있어요. 다만, 자신을 드러내기 힘들 뿐이에요”라고 말했다. 지난 6일 오후 카페 ‘레스보스’(Levbos)에서 그를 만나 한국 사회에서 레즈비언으로 살아가고, 레즈비언으로 일하며 느꼈던 아픔과 성소수자들의 노동 현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그는 ‘고용된 조직 또는 기업체에서 일하고 금전의 대가를 받는 사람’을 뜻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노동자’는 아니다. 하지만 1956년 생인 윤김명우 씨는 20대 시절부터 40여 년 이상 이 땅에서 성소수자로 일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몸소 경험했고, 언론 등을 통해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드러내며 활동해온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하나다. 또한 그는 20년 넘게 카페를 운영하며 성소수자들의 애환과 한숨을 들어온, 그 누구보다 성소수자들의 진솔한 노동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레즈비언 카페 ‘레스보스’ 운영자 윤김명우 씨


“다들 밖으로 잘 안 나와요. 자신의 성정체성을 들킬까 조마조마하며 사는 이들이 많아요. 저는 40대 초반이던 2000년경에 커밍아웃을 했어요. 당시 성소수자 모임에서 제가 제일 연장자였거든요. 함께 고민하고, 활동하던 친구들에게 모범이 되고, 또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커밍아웃을 했어요. 나는 40대 레즈비언이고, 바를 운영하고 있다고 밝힌 거죠. 당시만 해도 그렇게 얼굴을 내놓고, 이름을 밝히며 커밍아웃하는 이들이 많지 않아서, 언론과 방송은 물론 성소수자를 연구하는 이들도 저를 많이 찾아왔어요.”

성소수자 가운데 86.2%
직장 내에서 자신의 정체성 숨긴다


우리가 성소수자들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들었던 건 성정체성을 들킬까 조마조마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사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지난 2015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성적지향‧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에 따르면 성소수자 가운데 69.5%는 직장 동료 ‘누구에게도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동료 대부분이 모르고 있다’는 응답까지 더하면 86.2%가 직장 내에서 정체성을 감춘 채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2%만이 ‘모두 혹은 상당수의 직장 동료가 알고 있다’고 응답했으며,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응답도 8.6%에 불과했다.

이런 현실을 생각할 때 윤김명우 씨의 커밍아웃은 뜻하지 않게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됐다. 비슷한 시기 연예인 홍석천의 커밍아웃으로 동성애에 이목이 쏠리던 상황이었고, 40대 중반인 중년 여성의 커밍아웃은 2000년 당시로선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가족을 비롯해 그의 정체성을 이미 알고 있던 이들도 있었지만, 운영하던 업소 주변 동네 주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긴 힘들었다. 심지어 동네 반장님은 3일 넘게 그의 인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카페로 음란 전화나 협박 전화가 걸려오는 건 예사였고, 동네를 지키는 경찰도 그의 가게를 유념하며 순찰했을 정도다.

2019년 열린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 윤김명우 씨.


60년이 훌쩍 넘는 그의 인생은, 자신의 모습과 정체성을 사회적으로 거부당하는 시간이었다. ‘동성애’라는 개념조차 없던 젊은 시절, 남들에게 터놓지 못한 채 ‘혹시 내가 정신병일까’ 속앓이를 했고, 수 없이 자살을 고민하며 살아야 했다. 인생의 계획을 세우고, 삶에 대한 꿈을 꾸어야하는 젊은 시절, 특히 20대를 그는 그야말로 ‘암흑의 시기’로 보냈다고 고백했다.

남장 여성으로서의 삶
“집에선 치마 입고, 다른 여자들처럼 하면
좋은 결혼 자리를 봐주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반항심만 커졌고,
술에 많이 의지했어요.
제가 ‘알콜중독자’가 되는 줄 알았을 정도예요.”


“20대는 내게 암흑 같은 시간이었어요. 제 정체성은 동성애자인 게 분명한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이 컸어요. 당시만 해도 여자는 결혼해서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림하면서 사는 게 상식이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살 순 없었고, 어떤 일을 해서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아르바이트할 만한데도 찾기 어려웠어요. 유니섹스 스타일, 당시 사람들이 보기엔 ‘남자 옷’ 같은 것만 입고 다녔는데 집에선 치마 입고, 다른 여자들처럼 하면 좋은 결혼 자리를 봐주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반항심만 커졌고, 술에 많이 의지했어요. 제가 ‘알콜중독자’가 되는 줄 알았을 정도예요.”

당시 그는 ‘남장’을 하고 다녔다. 여성 동성애자들은 ‘바지 씨’와 ‘치마 씨’로 구분되던 시절이었는데 ‘바지 씨’는 사실상 ‘트렌스젠더’에 가까웠다. 이성애 커플이 익숙하던 시절이어서 이성애자들의 ‘남자’와 ‘여자’의 역할 모델을 따라 행동하는 동성애자들도 많았다. 그런데, ‘바지 씨’의 삶은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직장을 구하는 게 쉽진 않았다.

“외모는 남자 같은데,
취업하려고 신분증이나 서류를 내면,
2로 시작하는 주민등록번호는
취업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죠.”


“그 당시 여자들이 일할 수 있는 업무는 ‘경리직’ 같은 일자리가 대부분이었어요. 더구나 여성은 직장의 꽃처럼 여겨지던 시절이라 여성에게서 ‘조신한’ 혹은 ‘가녀린’ 현모양처의 모습을 원했어요. 이런 시절이다 보니 ‘바지 씨’였던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직장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살아남기 위해서는 차라리 남자처럼 하고 다니는 게 더 편했어요. 하지만 당시만 해도 남녀 구분이 너무 확실하던 시절이어서, 지금은 상상하기도 힘든데, 술집에서 제가 앉아 있으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내기를 한 뒤에 ‘남자냐, 여자냐’ 대놓고 묻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에요.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외모는 남자 같은데, 취업하려고 신분증이나 서류를 내면, 2로 시작하는 주민등록번호는 취업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죠. 그러다 20대 초반이던 1970년대 후반에 전자회사 자재과에 들어갔어요. 창고에서 일했는데, 장갑, 부품 등을 가지러 오면 전해주고, 물건을 정리하는 업무였어요. 여성들은 직장에서 ‘미스 김’ 아니면 ‘김 양’이라고 불리던 시절인데 저는 그냥 ‘김 형’이라고 불렸어요.”

직장을 구하는 것조차 성소수자들에겐 힘겨운 도전이다. 2015년 인권위 조사 결과 성소수자라는 점이 직업, 직장(일), 사업 등의 선택에 ‘매우 영향을 미쳤다’는 응답이 16.6%였고,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는 응답이 36.1%로 나타났다.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응답은 20.3%에 그쳤다. 그가 운영하는 카페를 찾는 성소수자 후배들도 비슷한 어려움을 늘 하소연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는 것은 힘들다. 그도 20대 초반에 다녔던 전자회사가 신분증을 내고, 일했던 거의 유일한 직장이었다.

성전환을 이유로 강제전역 당했다 소송 도중 스스로 세상을 떠난 고 변희수 하사를 추모하는 윤김명우 씨


하지만, 힘겨운 고민 끝에 직장에 들어가도 곳곳에서 난관을 만난다. 성전환 수술 후 육군에서 강제로 전역당한 뒤 전역 취소 소송을 하다 스스로 세상을 등진 고 변희수 하사의 사연은 성소수자들의 현실을 잘보여준다. 육군 기갑부대의 전차 조종수였던 변 하사는 2018년 성전환 수술을 받은 ‘트랜스젠더’였다. 그런 그를 육군은 ‘심신장애 판정’을 통해 강제전역시켰다. 직업군인인 그를 성전환을 이유로 부당해고 한 것이다. 변 하사는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며 자신을 인정해달라고 호소했다. 시민사회 단체의 연대와 국가인권위의 권고도 있었지만 육군은 외면했다. 결국, 강제 전역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앞두고 변 전 하사는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이렇게 성소수자의 일할 권리는 너무 쉽게 무시된다.

“어떤 친구들은 게이 친구를
일부러 퇴근 시간에 맞춰서 직장 앞으로
부른다고 하더라구요.
게이 친구는 레즈비언 친구를
애인처럼 부르구요.
그렇게라도 해서 질문을 피해 보려는 거죠.”


우리의 직장은 너무 당연한 듯 이성애를 기본으로 작동하며 성소수자들을 곤경으로 몰아넣는다. “결혼은 언제 해?”, “남자친구(여자친구)는 있냐?” 등의 질문이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나이가 들어가고, 경력이 쌓이면서 이런 질문을 더욱 자주 받게 된다.

“다들 이런 질문을 계속 들으면 미쳐버릴 것 같다고 해요. 솔직히 말하기도 힘들고, 스트레스만 쌓이다가 결국 그만두는 경우도 있구요. 어떤 친구들은 게이 친구를 일부러 퇴근 시간에 맞춰서 직장 앞으로 부른다고 하더라구요. 게이 친구는 레즈비언 친구를 애인처럼 부르구요. 그렇게라도 해서 질문을 피해 보려는 거죠.”

성소수자들이 직장 생활에서 ‘여자친구’와 ‘남자친구’의 존재를 확인받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상황은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성정체성이 ‘아웃팅’되는 것이다. 내 의사와 관계없이 나의 내면이 모두에게 알려지는 건 그야말로 ‘범죄’이고 ‘공포’지만, 성소수자들은 직장은 물론 일상 곳곳에서 이런 상황을 만난다.

2020년 5월 이태원 클럽을 중심으로 코로나19 집단 감염이 일어났을 당시에 성소수자들은 ‘아웃팅’과 ‘혐오’와 ‘차별’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라디오 프로그램과 인터뷰한 성소수자 A씨는 “성소수자를 향한 비난이 그 수위를 넘어 혐오로까지 가고 있는 상황에서 신상 공개를 각오하고 검사를 받으러 가는 일이 쉽지 않다. 현 시점에선 아웃팅이 가장 큰 문제”라며 “본인의 성정체성을 깨달은 이후로 10년, 20년, 30년씩 주위 사람들이나 혹은 내 부모님에게까지 성적 정체성을 숨겨온 사람들이 그것이 갑자기 만천 하에 공개된다고 생각하면 엄청난 압박과 심적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고 토로한 바 있다. 성소수자들에게 아웃팅은 본인 건강 문제조차 뒤로 돌릴 수밖에 없는, 목숨을 위협받는 수준의 공포다.

22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유플렉스 신촌점 광장에서 열린 2021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아이다호 공동행동 선포 기자회견에서 다양한 성소수자 정체성을 상징하는 깃발이 걸려있다. 2021.5.22


“모두들 아웃팅을 가장 무서워해요. 직장을 잘 다니다가도 아웃팅을 당하고 나면 그만두는 경우가 많아요. 회사나, 주변에서 노골적으로 퇴사를 압박하기도 하지만, ‘난 이해한다’고 말해줘도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고, 알게 모르게 회사에서 무언의 압력을 주면서 퇴사를 유도하기도 해요.”

“여중에 다니던 14살 때
처음으로 아웃팅을 당했어요.
머릿속이 하얗게 됐어요.
집을 나가야 하나. 도망가야 하나.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40대 중반에 커밍아웃한 윤김명우 씨의 삶도 다르지 않았다. 스스로 커밍아웃을 하기 전 그 역시 10대 시절부터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는 아웃팅을 수차례 경험했다. ‘레즈비언’ 혹은 ‘동성애’라는 말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그 시절에 당한 ‘아웃팅’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사건이었다.

“여중에 다니던 14살 때 처음으로 아웃팅을 당했어요. 당시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제대로 표현도 못 한 채 마음만 졸였어요. 그러다 그 친구가 제가 자기를 좋아하는 걸 알게 됐고, 상담 선생님에게 그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근데, 친구 아버지가 같은 학교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그 사실이 어머님께 전해졌어요. 아직도 그때 기억이 나요. 제가 우리 집 복도에 서 있는데, 현관 유리문 뒤에서 선생님하고, 엄마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어요. 제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하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됐어요. 집을 나가야 하나. 도망가야 하나.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겁이 많아서 집을 나가지는 못했어요. 저를 포함해 가족이 모두 독실한 크리스천이어서 충격도 컸어요. 그래도, 당시에 엄마는 내게 한 마디도 안 하셨어요. 지금은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큰 언니가 나중에 그러더라구요. ‘엄마가 너 때문에 걱정이 많았고, 나를 찾아와서 통곡하셨었다’고요.”

아웃팅의 공포와 수많은 난관을 딛고, 제약회사 자재과에 입사한 그였지만, 오래 일하진 못했다. 오래 일한다고 승진이 되는 안정적인 직장은 아니었고, 미래는 안 보였다. 더구나 언제까지 일할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결국, 그는 2년 정도 직장을 다니다 그만두고 분가를 결심했다. 집을 나와 자신의 삶을 찾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윤김명우 씨가 운영하는 카페 '레스보스'에 진열된 그의 활동 사진들


“분가하면서 부모님껜 남자들도 누구나 군대 가면 집에서 2년은 떨어져 있으니깐, 저도 군대 갔다고 생각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막상 분가하려니 갈 곳이 마땅친 않더라구요, 그러다 선배가 자기랑 장사할 생각 없냐며 제안을 했고, 그 선배를 따라서 대전 유성으로 갔어요. 그때가 20대 후반이던 1980년대 초였어요. 당시 유성은 유흥가도 많았고, 번화한 동네였어요. 그곳에서 선배랑 포장마차로 야식집을 했어요. 서울 종로5가 곱창골목을 보고, 비슷하게 운영해보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장사 경험도 없는데다 지역사회다 보니 외지에서 와서 장사하는 게 어려웠어요. 1년 정도 만에 망했어요. 같이 장사하자고 제안했던 선배도 떠나고 나니 연고도 없는 유성에 혼자 남겨진 거예요.”

유성에 남겨진 그는 막막했다. 유성에서 알게 된 ‘형님’ 소개로 낮에 모텔과 온천탕 등에서 청소일을 했다. 그러다 동네 아는 사람이 스텐드바 주방에서 사람을 구하는데, 일해보겠냐고 제안을 했고, 요리 경험은 없었지만, 아는 ‘형님’의 도움으로 저녁에 짬을 내서 요리를 배웠다.

“요리를 배운 뒤에 스텐드바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낮에는 모텔 등에서 청소를 했고, 오후 늦은 시간부터는 스텐드바 주방에서 일하며 투잡을 뛰었어요. 힘들었지만, 나름대로 버텼어요. 그렇게 일하다가 유성으로 찾아온 엄마한테 붙잡혀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당시에 고생하며 투잡을 뛰다 보니, 피곤에 찌들었고, 손도 엉망이었거든요.”

방황의 시기를 지나 차린
레즈비언 카페 ‘레스보스’


그 후 한동안 방황의 시간이 이어졌다. 택시 운전을 할까 고민을 했지만, 집안 반대가 심했다. 요리사가 되려고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땄고, 요리사로 일할 기회를 잡나 기대를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미끄러졌다. 당시 좋아하던 여성과 동거를 하던 상황이었는데, 집에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두 사람을 떼어 놓으려 했다. 결국 1989년 그는 반강제로 일본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2년 가까이 요코하마에서 지냈다. 당시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한국에 돌아가면 스시집을 해야겠다고 계획을 세웠고, 귀국한 뒤인 1990년대 초반, 사촌 언니 사돈댁에서 하던 일식집을 인수받아 장사를 시작했다.

“배짱이 좋아서 시작한 거예요. 서울 서소문에 있던 가게였어요. 1~3층을 다 쓰는 큰 가게였는데, 첨엔 경험이 없다보니 버거웠어요. 그래도 당시엔 그 주변에 삼성그룹, 동아건설, 대한통운, 명지빌딩, 삼성프라자 등 큰 회사가 많아서 여건은 좋았어요, 가격대도 어느 정도 되는 고급 일식집이었거든요. 몇년 동안 잘 운영을 했어요. 1997년 경에 건물주가 건물을 사라고, 제안했는데 조금 버티다가 조금 더 넓은 곳으로 옮길 생각에 거부했어요, 그런데, 얼마 안 지나 건물주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유산으로 건물을 인수한 건물주 자식들은 갑자기 나가라고 하면서 가게를 자신들이 운영한다고 나섰어요. 인테리어 비용은 물론 권리금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났고, 억울한 마음에 재판도 했지만, 소용없었어요.”

뜻하지 않게 가게 문을 닫은 충격으로 그는 2년 가까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그는 1990년대 후반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있던 여성 전용 카페 레스보스의 3대 사장을 맡으면서 삶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그리스에 있는 섬 ‘레스보스’는 여성 동성애자들에겐 상징적인 곳이다. 레스보스 섬 주민을 뜻하는 ‘레즈비언’(Lesbian)이라는 말은 여성 동성애자를 뜻하는 단어가 됐다. 이 섬 출신의 여성 시인 사포가 동성애자였기 때문에 유래된 말이다.

“당시 가게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 4층에 있었어요. 후배가 그 가게를 운영 중이었는데, 빚을 지는 바람에 어려워했어요. 여러 사람의 제안도 있어서 후배를 돕자는 차원에서 제게 남아있던 전 재산 7천500만 원을 들여서 가게를 인수했어요. 그런데 가게를 인수하고 나서 그야말로 대박이 났어요. 365일 사람들이 꽉꽉 들어찼어요.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자주 가게를 찾아오다보니 구청 위생과에 문의도 했어요. 술 담배를 팔지 않고, 음료수와 음식만 팔면 청소년 출입도 가능하다고 해서 청소년들은 조금 이른 시간에 출입할 수 있도록 했어요. 많은 이들이 찾아서 결국 2000년대 초반 홍대로 옮겼어요. 가게도 50평에서 140평으로 늘렸고, 성소수자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화장실도 다섯개나 만들었고, 파우더 룸도 크게 했어요.”

“삶의 곳곳에서 차별을 만나요.
직장 생활하는 친구들은 ‘결혼 휴가’ 등
각종 사내 복지에서 제외되기 일쑤에요.”


그렇게 ‘레스보스’는 레즈비언들의 성지가 됐다. 2000년 그가 커밍아웃한 뒤엔 레즈비언들의 사랑방이자, 고민상담소이기도 했다. 때론 청소년 성소수자를 자식으로 둔 부모들이 찾아와 고충 상담을 하는 곳이기도 했다. 2009년 여러 사정 때문에 문을 닫은 뒤 강남에서 레즈비언 바 ‘명우형’을 운영하기도 했던 그는, 레즈비언들을 위한 공간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지난 2019년 12월 서울 이태원에 ‘레스보스’를 다시 열었다.

레즈비언들을 위한 공간은 그에겐 아주 오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일이기도 하다. ‘동성애’, ‘레즈비언’이라는 단어가 익숙해지기 전에도 이미 성소수자들은 있었고, 그들이 어울리는 공간도 있었다. 윤김명우 씨도 젊은 시절 그런 공간을 만나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 그들과 어울리며 위로를 받았다.

윤김명우 씨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소망한다고 밝혔다.


“스무살 즈음에 처음으로 서울 명동에서 ‘여성 전용 다방’인 ‘샤넬’을 알게 됐어요. 당시 그곳엔 저보다 나이가 많았던 레즈비언 선배들이 있었어요. 그들과 만나면서 힘도 얻었고, 무엇보다 대화가 잘 통했어요. 그리운 마음에 하루라도 안 나가면 미칠 것 같았거든요. 나와 비슷한 성향,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진 이들이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스무살의 그가 그러했듯이 윤김명우 씨는 ‘레스보스’를 찾는 후배들이 이곳에서 힘과 위로를 얻을 수 있길 기대한다. 그가 레스보스를 운영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커밍아웃한 지 20년이 훌쩍 지났다. 예전과 비교하면 그래도 좋아졌다고, 위로하다가도 이성애자들과 차이나는 성소수자들의 현실을 만날 때마다 한숨만 나온다.

“삶의 곳곳에서 차별을 만나요. 직장 생활하는 친구들은 ‘결혼 휴가’ 등 각종 사내 복지에서 제외되기 일쑤에요. 수술을 받고, 하다못해 수면내시경을 하려고 해도 ‘보호자’를 찾기 어려워 고민하기도 합니다. 동성 간 결혼에 대해서도 휴가와 축하금을 달라고, 회사에 당당하게 요구하고 싸우는 이들도 있지만, 아주 극소수에요.”

“차별금지법이 빨리 제정되어야 해요.
우리도 같은 사람인데, 당연한 듯
차별하는 현실이 안타까워요.
아주 조금씩이라도 바꿔나갔으면 합니다.”


현실에선 여전히 각종 배우자 수당에서 제외되고, 배우자 장례식에서조차 배우자 가족들에 의해 외면당하는 게 일상이다. 윤김명우 씨와 인터뷰한 다음 날인 7일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이주영 부장판사)는 성소수자 부부가 배우자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달라며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낸 행정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사실혼에서의) ‘혼인’이란 여전히 남녀의 결합을 그 근본 요소로 한다고 판단되고, 이를 동성 간의 결합까지 확장하여 해석할 만한 근거가 없다”면서 “사회보장 영역에서도 기존 혼인 법 질서에 반하는 내용의 사실혼은 원칙적으로 보호 받을 수 없다”고 밝혔다. 법원은 올해로 6년째를 맞은 소성욱 씨와 김용민 씨의 결혼생활을 철저하게 부정한 것이다.

2019년 10월 1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주최로 열린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2019 평등행진 ‘우리가 간다’에서 참석자들이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여성, 청소년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를 근절하기 위한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며 손피켓을 들고 있다.


그의 삶은 이제 중년을 넘어 노년으로 접어들었다. 그가 스무살 때 만난 선배들은 일흔이 넘고, 팔순이 됐다. 파트너와 40년 넘게 살고 있는 선배들도 있다. 하지만, 노년이 되었어도 이들의 평범한 일상은 여전히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성소수자들도 떳떳하게 가족을 구성하고, 우리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소원이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드는 아주 자그마한 첫 걸음이 ‘차별금지법’이라고 믿는다. 지난 2007년 차별금지법이 발의된 이후 끊임없이 시민단체와 성소수자들이 싸워왔지만, 보수개신교의 압력으로 번번이 좌절됐다. 이후 차별금지법은 정치권의 외면으로 15년째 국회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이미 늦었지만, 이번엔 꼭 통과될 수 있기를 그는 오늘도 기원한다.

“차별금지법이 빨리 제정되어야 해요. 우리도 같은 사람인데, 당연한 듯 차별하는 현실이 안타까워요. 아주 조금씩이라도 바꿔나갔으면 합니다.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고, 건강보험 혜택에서 외면하지 말고, 법적인 혜택에서 제외되는 일도 없어야겠죠. 그런 일을 위해 계속 싸워 나가가려고 합니다. 나이들면서 몸이 힘들어지면서 얼마나 더 일하고, 활동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런 세상을 위해 끝까지 싸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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