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기사 과로사 대책을 위한 사회적 합의기구 ‘과로방지 대책 2차 합의문’ 발표 ⓒ민중의소리
CJ대한통운이 택배기사 과로사 방지를 위한 사회적 대타협 정신을 위배하는 ‘조건’을 사실상 강제하고 있어 논란이다. 전국택배노동조합(택배노조)이 파업에 돌입한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구체적으로 따져봤다.
‘선택’ 아닌 ‘의무’된 표준계약서
19일 택배업계에 따르면 택배 과로사 방지 사회적 대타협 핵심은 ‘최대 노동시간을 일일 12시간·주 60시간을 넘지 않도록 한다’는 데 있다.
택배사와 택배 대리점, 택배 기사 등은 합의 정신을 법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당사자들이 작성하는 표준계약서를 도입했다.
표준계약서는 ‘선택’이 아닌 ‘의무’가 됐다. 생활물류서비스발전법은 택배사가 택배업을 영위하기 위해 사회적합의를 통해 만들어진 표준계약서 체결을 강제하고 있다.
표준계약서 제9조 1항은 ‘택배기사의 최대 작업시간이 일 12시간, 주 60시간을 초과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뒤이은 제12조 2항은 “생활물류서비스발전법 등 관련 법령을 준수하고, 택배기사 과로방지 대책 사회적합의기구 합의문을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작업시간이 1주 평균 64시간을 4주 이상 초과할 경우엔 택배 기사의 물량·배송구역 조정 협의를 통해 최대 작업시간 내로 감축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강제 조항도 있다. 택배 기사 과로사 방지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판이다.
하지만 CJ는 표준계약서에 ‘부속합의서’를 추가로 끼워 넣으면서 최소한의 안전판마저 무력화했다.
표준계약서는 별도 조항을 통해 계약내용을 보충하거나, 계약에서 정하지 못한 사항을 규정하기 위해 ‘부속합의서’를 작성할 수 있다.
CJ대한통운과 대리점 사이의 부속합의서 제12조 ⓒ택배노조 제공
CJ대한통운과 대리점 사이의 부속합의서 제4조 ⓒ택배노조 제공
표준계약서 체결에도 택배기사 ‘심야배송’ 여전
<민중의소리>가 택배 대리점과 택배 기사 사이에 맺은 표준계약서 부속합의서를 살펴본 결과 문제점이 여러 곳 발견됐다. 표준계약서는 주 60시간을 명문화하고 있지만, 이런저런 조건을 달아 사실상 60시간 이상 노동을 강제하고 있는 정황이다.
부속합의서 제4조 1항은 “대리점은 택배사업자 또는 고객으로부터 집화 요청을 받은 날 이내에 상품을 집화하여 택배사업자에게 인도하고, 택배사업자로부터 상품을 인수한 날 이내에 고객에게 배송함을 원칙으로 한다”고 규정한다. 이른바 당일배송 원칙이다.
또 ‘주6일제’에 대해서는 부속합의서 제4조(집화 및 배송) 1항을 통해 “영업점(대리점)은 택배사업자 또는 고객으로부터 집화 요청을 받은 날 이내에 상품을 집화하여 택배사업자에게 인도하고, 택배사업자로부터 상품을 인수한 날 이내에 고객에게 배송함을 원칙으로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택배 현장에선 표준계약서로 계약을 갱신한 이후에도 여전히 밤늦게까지 배달 일을 하는 택배노동자가 적지 않았다.
택배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사회적합의 이후에도 택배현장에선 과도한 업무량을 소화하기 위해 심야배송을 하는 일이 공공연하게 이어지고 있다. 전산상으로만 업무를 종료한 뒤 계속 배송을 진행하는 식이라는 게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택배노조 관계자는 “아직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고 있진 못하지만, 비조합원의 경우 이미 계약서에 사인을 한 택배기사들도 있다”면서 “하지만 이들 택배기사 중에는 여전히 밤늦게까지 일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고 설명했다.
택배를 짊어진 택배기사 ⓒ민중의소리
CJ대한통운 소속인 한 택배대리점 소장도 “일부 택배기사들의 경우 표준계약서로 계약을 갱신했지만, 현실에선 큰 변화가 없다”며 “늦게까지 일하던 택배기사들은 여전히 계속 일을 하고 있다. 표준계약서 도입이 택배기사들의 과로를 막는 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김성희 교수는 “‘당일배송’은 회사가 자체 물량을 소화하는데 유리한 조항인 만큼 빼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노동시장에 물의를 일으킬 수 있는 사안을 회사가 일방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노조 입장에선 독소조항으로 우려할만한 내용이다”라고 지적했다.
부속합의서는 표준계약서 내용에 배치 또는 위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인정된다.
CJ대한통운 택배노동자들이 생계를 포기한 총파업에 나서게 된데도 부속합의서 문제가 큰 영향을 미쳤다. 전국택배노동조합 관계자는 “부속합의서엔 그동안 본사가 택배기사들을 압박하던 수단들이 포함돼 있다”면서 “독소조항이 들어 있는 부속합의서에는 절대 사인할 수 없다. 부속합의서를 철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택배업계 관계자는“과거에 비해 물량이 많이 늘어나면서 당일배송이 가능한 물량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CJ대한통운이 당일배송을 원칙으로 삼는 건 사실상 말이 안 된다”며 “이러한 부속합의서 내용은 향후 택배기사들의 과중한 업무를 부여하는 데 악용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노조도 당일배송 원칙이 택배노동자의 과도한 노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택배노조 한선범 정책국장은 “최근 들어 간선차량 도착시간이 점차 늦어지면서 업무가 끝나는 시간도 늦어지고 있다”며 “일부 택배기사들의 경우 늦게 들어오는 물량을 포기하고 일찍 배송에 나서기도 하는데, 앞으론 본사가 표준계약서를 가지고 이러한 부분을 문제 삼을 수도 있게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CJ대한통운 계란 맞아 ⓒ김철수 기자
법적 강제력 없는 ‘표준계약서’... 효율성도 의문
이번 기회에 표준계약서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표준계약서상의 모호한 표현이 택배노동자들의 과도한 노동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표준계약서는 택배기사가 4주 동안 1주 평균 64시간을 초과할 경우 물량 및 배송구역 조정하도록 하고 있다. 문제는 구역이나 물량 조정이 강제사항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리점과 택배기사간의 협의를 통해 진행하도록 하고 있다.
물량 및 배송구역을 조정하도록 기준에도 의문이 제기된다. 표준계약서상 택배기사의 노동시간은 일일 12시간, 주 60시간을 넘기지 않도록 한 반면, 물량 및 배송구역 조정은 4주 동안 1주 평균 64시간을 초과할 경우로 하고 있다. 사실상 표준계약서가 주 63시간의 노동을 허용하는 셈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표준계약서 이행과 관련해 이렇다 할 처벌도 조항도 마련돼 있지 않다는 점도 지적됐다. 생활물류법에는 표준계약서와 관련한 양벌규정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생활물류법시행령 제35조 1항에 따라 개선명령 및 권고조치를 할 수 있는 게 전부다.
택배노조 관계자는 “표준계약서나 생물법(생활물류법)에는 표준계약서와 관련해 이렇다 할 처벌규정도 없다. 어떻게 표준계약서를 지키도록 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다”며 “그저 ‘60시간 내’라는 전제조건을 붙이고,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CJ대한통운을 믿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법조계도 CJ대한통운의 부속합의서에 대해 ‘부적절하다’는 평가를 내놨다. 당일배송과 주6일제 근무를 못 박은 부속합의서가 향후 택배노동자들의 노동환경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민주노총 서비스법률원 조세화 변호사는 CJ대한통운의 부속합의서가 사회적합의와 배치되는 내용을 다수 포함됐다는 점을 지적했다.
조 변호사는 “사회적합의에서 참여주체들이 택배노동자의 과로사를 막자는데 뜻을 의견을 모았지만 ‘당일배송’을 원칙으로 명시했다”며 “주5일제 시범사업을 실시하기로 한 상황에서도 단계적인 적용보다 ‘주6일제’를 못 박았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