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년 설 연휴 직전, 현대자동차그룹 정의선 회장 경영권 세습 작전에 또 한 번 제동이 걸렸다. 정 부회장이 3천억원대 현금을 손에 쥘 기회가 무산됐다.
현대엔지니어링은 지난달 28일 공시를 통해 유가증권시장 상장 계획을 철회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9월, 예비심사를 접수한 이후 4개월간 준비한 상장 플랜이 연기된 것이다.
철회 배경엔 외부 요인과 내부 요인이 맞물려 있다. 최근 주식시장이 연일 하락세를 면치 못한 것이 영향을 줬다. 광주 화정아이파크 대형 붕괴사고가 발생하면서 건설주에 대한 시장의 평가가 좋지 못한 것도 배경이 됐다. 현대엔지니어링은 상장 철회 결정에 외부 요인이 작용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현대엔지니어링은 공시를 통해 “회사 가치를 적절히 평가받기 어려운 측면 등 제반 여건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회사가 설명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투자자로선 시장 상황, 대형 참사 여부와 무관하게, 현대엔지니어링 상장 자체가 가진 내부 요인이 더 큰 문제로 보인다.
상장 조달 자금 총수일가 주머니로 쏙
투자자는 자금 흐름이 중요하다. 기업이 상장으로 조달한 자금을 효과적으로 쓰는지 주목한다. 자금이 주력 사업 경쟁력 강화, 신사업 진출에 투입되면 향후 주가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만큼 투자 유인이 커진다. 반대로, 조달한 자금이 엉뚱한 곳에 쓰이면 주가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투자 의사는 그만큼 줄어든다.
현대엔지니어링은 상장 계획 단계에서부터 후자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상장으로 1조원에 육박하는 자금을 조달하지만, 이중 대부분이 회사 외부로 빠져나가는 구조였다.
가장 큰 수혜를 보는 사람은 정의선 회장이다. 정 회장은 현대엔지니어링 주식 11.7%를 보유한 개인 최대주주다. 정 회장은 보유 주식 890만주 중 60%(530만주)를 시장에 내다 팔고 최소 3,092억원의 천문학적 자금을 확보할 계획이었다. 개인 2대 주주인 정몽구 명예회장 역시 822억원 대 자금을 손에 쥔다. 상장으로 조달하는 자금 1조원의 40%, 4천억원 가량이 회사 발전에 쓰이지 않고 총수 일가 주머니로 들어가는 꼴이다.
현대엔지니어링 주주에는 총수 일가 외에도 현대글로비스, 기아, 현대모비스 등 그룹 계열사가 있다. 소유 지분은 30.3%에 달한다. 이들 역시 상장 과정에서 일부 지분을 팔고 3천억원대 자금을 확보한다. 기존 주주가 가져가는 자금을 제외하면, 현대엔지니어링 사업에 투자되는 돈은 2,310억원에 불과한 셈이다.
최근 상장한 LG에너지솔루션과 확연히 대비된다. LG에너지솔루션은 상장을 통해 총 12조원 규모의 자금을 확보했다. 확보 자금 대부분은 미국과 유럽 시장 생산 시설 확대에 투자한다. 대주주인 LG화학이 상장을 통해 가져가는 돈은 전체의 16%, 2조원 남짓이다. 84%의 자금이 회사 발전에 쓰이는 셈이다. 현대엔지니어링은 정 반대다. 80%가 회사 외부로 빠져나가고 20%만 회사 발전에 쓰인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시장은 현대엔지니어링 상장에 별 관심이 없었다. 수요 예측 단계에서부터 흥행에 참패했다. 현대엔지니어링은 적정 공모 주가를 5만7,900원에서 7만5,700원으로 희망했다. 증권사가 희망 공모가를 바탕으로 수요를 예측한 결과, 경쟁률은 100대1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LG에너지솔루션 경쟁률은 2023대 1에 달했다.
투자자 관심이 몰리는 신성장주와 전통적 저성장주라는 두 기업간 성격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시장의 시선은 현대엔지니어링에 싸늘했던 셈이다.
주가 추가 하방 우려도
현대엔지니어링 상장은 현대차그룹 경영권 세습의 중요한 고리다. 정 회장은 현대엔지니어링 지분을 팔아 세습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예정이다. 총수 일가가 소규모 자금을 투입한 회사를 그룹 차원에서 성장 시켜 더 큰 부를 만드는 전형적 수법이 상장으로 완성되는 그림이다.
정의선 회장은 2004년 현대차 그룹 건설사였던 현대엠코 지분을 확보한다. 지분 확보에 들어간 자금은 260억원 정도였다. 현대엠코는 이후 여러회사와 인수·합병하며 덩치를 불렸다. 정 회장 보유 지분은 회사 규모가 커질 때마다 가치가 급등했다. 현대엠코는 창립 10년 뒤인 2014년에 현대엔지니어링과 합병했다. 앞서 살펴본 지분구조는 그때 완성됐다. 정 회장 지분 가치는 18년 만에 3천억원으로 불어났다. 초기 자금이 260억원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수익률이 무려 1,053%에 달한다.
시장에선 정 회장이 추가 지분 매각에 나설 공산이 있다고 본다. 상장 과정에서 지분을 상당수 매각하지만 정 회장은 여전히 350만주 이상을 보유한 개인 최대주주다. 이후 세습에 자금이 더 필요할 경우, 추가 매물이 시장에 풀릴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정 회장은 장외 블록딜 등을 통해 매각을 시도하겠지만, 실패할 경우 대규모 물량이 풀리며 주가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다.
현대엔지니어링은 상장을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초소형원자로 개발, 폐자원을 활용한 수소생산 기술 개발, 이산화탄소 자원화 등 신사업에 투자하겠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하지만 투자자들의 여러 우려를 해소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현대엔지니어링 상장 철회는 한국 주식시장이 재벌 세습 자금 마련을 거부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국 주식시장의 두 번째 거부
현대차그룹은 순환출자라는 구시대적 지배구조를 여전히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현대차그룹 정점에는 현대모비스가 있다. 정몽구 명예회장과 정의선 회장은 현대모비스 주식 7.45%를 보유하고 50여개가 훌쩍 넘는 그룹 계열사 전체를 좌우한다.
정씨 일가가 소유한 현대모비스는 주력 계열사인 현대차 주식 16.5%를 보유하고, 현대차는 또다른 주력사 기아차 주식 33.9%를, 기아차는 다시 현대모비스 주식 17.3%를 갖는 순환출자 구조다. 정씨 일가는 비슷한 방식으로 현대제철, 현대글로비스 등 유력 계열사를 지배한다.
정몽구 명예회장이 보유한 현대모비스 주식은 7.13% 규모다. 정의선 회장은 0.32%에 불과하다. 경영권 세습을 위해서는 정 명예회장 주식 7.13%를 정의선 회장이 가져와야 한다. 28일 종가 기준 정 명예회장 보유 주식은 1조5천억원에 달한다. 정 회장이 1조5천억원 규모의 자금을 마련해야, 전근대적 ‘순환출자 세습’이라도 완성할 수 있는 처지다.
정 명예회장이 보유한 현대모비스, 현대차 등 계열사 주식을 정 회장에게 증여·상속하는 방안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정 회장이 물어야 할 증여·상속세 규모는 3조원 이상 될 것이라고 업계는 전망하고 있다.
정 회장은 세습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지난 2018년, 현대모비스 사업을 분할하고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하는 방식의 지배구조개편에 나선 바 있다. 하지만 당시 주주들이 반대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결국, 현대엔지니어링 상장 철회는 한국 주식시장이 현대차그룹 총수 일가의 꼼수 세습을 거부한 두 번째 사례로 남게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