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는다. 생생히 떠올리고, 곱씹고, 쓰다듬고, 위로해야 아문다. 되새김질 없이 겉 부위만 닦은 상처는 언젠가 다시 터지고 만다.
며칠 사이에 낫지 않을 상처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소용없다. 세월이 약이라고 믿는 낙관은 금물이다. 노력 없이, 성찰 없이 낙관하는 건 어리석은 인간이나 하는 짓이다. 그건 오히려 영혼에 대한 방관에 가깝다.
길 작가는 오랜 시간 관조하고 자성하면서 곪고 덧난 상처를 치유했다. 출혈이 심할지라도 돌아앉아 외면하지 않고 대화를 시도했다. 대화의 상대는 대부분 자신이었지만 자신을 이입한 고양이도 있었고, 가족처럼 지낸 고양이도 있었다.
상처가 아문 자리에 반짝반짝 생살이 돋은 것 같은데 통증은 여전한 듯했다. 진물이 터져 나올 때까지 상처를 꾹꾹 누른 흔적, 상처가 아물면서 남긴 흉 자국이 여기저기 가득해 보였다. 놀랄 만큼 자신을 억제하며 새 살을 채워서일 게다. 그는 자신을 놓아버리는 객기조차 부리지 못하고 침묵하며 인내했다. 그래서 위로마저 조심스러웠다. 냉장고에 소주를 가득 채우고 현관문을 잠근 장면에서는 잠시 숨이 멎을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그래, 자신이 아파서 아픈 사람들이 보였고, 사람들이 아프니 자신은 더 아팠을 것이다.
그는 오늘도 ‘야옹’ 소리를 내며 고양이 집사를 자처한다. 버려지고, 아프고, 외로운 고양이들에게 아낌없이 온정을 베푼다. 그의 애정은 일방적인 게 아니다. 고양이는 상처 입은 자신을 위해 울어주고 곁을 내준 영혼의 친구이자 안식이었다.
시적 표현력 돋보이는 에세이
길상호 작가가 에세이집 ‘겨울 가고 나면 따뜻한 고양이’를 냈다. 길 작가는 네 마리 고양이의 집사가 되기까지의 인생 여정을 시적인 언어로 차분하게 그려냈다.
길상호 에세이집은 읽는 재미가 가득했다. 소년 길상호, 어른 길상호, 여러 고양이들이 마치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우기듯 장면마다 툭툭 등장해 흥미를 북돋았다. 고양이의 외모와 습성, 아주 섬세한 버릇까지 자세하게 묘사한 부분이나 작가가 직접 그렸을 것으로 추측되는 고양이 삽화도 즐거움을 더했다.
이 책은 빨리 읽히지 않았다. 삶에 대한 작가의 애착이 깊이 있는 사색과 어우러져 글을 곱씹게 했다. 글이 빨리 읽히진 않았지만 말미에는 바람같이 내달았다. 서서히 문장의 의미를 음미하며 읽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었다.
글이 계속 읽혔던 이유는 다음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과 묘한 안도감이 뒤섞였기 때문이었다. 자칫 무겁게 느껴지는 상처 가득한 과거 이야기들이 ‘야옹’ 소리와 엉키고, 숭굴숭굴하고 굳은 시인의 심지가 외롭고 쓸쓸한 분위기를 상쇄하면서 끝까지 마음 편하게 읽게 했다.
길상호 작가의 문장이 지닌 힘이었다. 쉴 공간을 넉넉하게 내어주면서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능숙하게 끌어들이는 시적 표현력은 독자의 마음을 매료시키기 충분했다. 겨울이라는 계절적 특징도 있었던 같다. 책 제목 ‘겨울 가고 나면 따뜻한 고양이’가 주는 정취도 있었지만 추운 겨울에 읽으면 더욱 가슴 아린 감성을 선사할 내용이기도 했다.
야옹 하고 들어간 방에서 찾는 평화로운 일상
길상호 작가는 독자들을 ‘치유의 방’으로 인도해 상처를 어루만진다. 어미 고양이가 다친 새끼의 상처를 핥아 주듯이 멍들고 찢긴 자국을 수시로 보살핀다. 이 상처는 어떡하다 생긴 것일까? 이 상처는 왜 빨리 낫지 않을까? 이 상처가 아물고 나면 흉이 지지 않을까? 그렇게 마음을 쓴다.
때때론 어떻게 무너졌고, 어떻게 이겨냈는지 말을 건넨다.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눈물이 남긴 상처, ‘물풀처럼 흔들리지 않고서는 버티기 힘든 기억’ 같은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털어놓으면서 ‘이렇게 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치유의 묘(?)책을 넌지시 제시한다.
참. 이 치유의 방에 들어가는 비밀번호는 ‘야옹’이다.
이 책에는 수많은 고양이가 등장한다. ‘절에 사는 껌딱지 턱시도 고양이, 눈이 쌓인 날 마당에 나타난 새하얀 고양이, 여관 천일장에서 동숙한 고양이’처럼 실제 고양이도 있고, ‘할머니 지팡이가 된 고양이, 할머니 목소리를 내는 꿈속 고양이, 거울 속에서 나타난 고양이’처럼 시인의 머릿속에서 노니는 고양이도 있다. 각양각색 달라 보이는 고양이지만 결국은 하나다. 모두 시인의 치유를 도왔던 고양이고, 독자들의 치유를 돕는 매개다.
마지막은 시인과 시인이 집사로 모시는 고양이의 하루하루가 그려진다. 운문에게 일격을 당한 ‘꽁트’, 어깨 위로 올라와 귀를 공격하고 바닥으로 내려가 밥을 달라는 ‘산문’, 새벽에 배를 밟고 뛰어 다나는 ‘운문’, 입도 짧아지고 먹는 양도 준 열여섯 살 ‘물어’, 야옹 소리를 듣고 야옹 소리를 만들며 안정을 찾는 시인의 일상이 펼쳐진다. 꽁트, 산문, 운문, 물어는 고양이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