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대한통운 택배 파업이 56일째, 본사 점거 농성이 12일째(21일 기준)를 맞고 있다. 택배 노조는 대화를 요구하고 있지만, CJ대한통운은 묵묵부답이다. 사태를 해결해야 할 정부는 “노사간 대화로 풀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내놓고 사실상 팔짱을 끼고 있다.
‘생활물류법’ 상 택배사와 택배 기사 갈등을 조정해야 할 정책 당국은 국토교통부다. 최근 국토부 행보를 보면, ‘최소한 기계적 중립’이라도 지켜야 할 국토부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파업이 한창이던 지난달 말, 국토부가 내놓은 ‘사회적 합의 이행 점검 결과’가 대표적이다.
900여개 택배 터미널 중 25개만 점검 불시 점검 이라더니…'철저히 대비하라' 문자 다수
지난달 24일 국토부는 올해 1월 첫째 주부터 21일까지‘택배 사회적합의 이행상황 1차 현장 점검’ 결과를 내놨다. 사회적 합의가 본격적으로 적용되는 시점에, 현장 상황을 점검하는 터라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국토부 점검을 자세히 살펴보면 ‘부실하게 진행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대상 숫자, 선정 과정, 점검 항목 등 핵심 사안에서 부족한 점이 여럿 발견된다.
점검 대상 표본이 전체 2.7%에 불과했다. 국토부에 따르면, 전국에 흩어져 있는 택배 터미널은 1천여곳에 육박한다. 주요도시와 중소도시, 도시별 터미널 위치에 따라 물동량은 크게 차이나고 처리 물량에 따라 현장 상황은 천차만별이다. 주요 3사의 택배 자동화율이 다르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변수는 더 늘어난다. 최소 100곳(10%) 이상의 점검이 필요해 보이지만, 국토부는 고작 25곳(2.7%)만 점검했다. ‘최초의 사회적 합의 이행 점검’이라는 상징성을 고려하면 미진한 숫자다. 표본이 지나치게 적다 보니 ‘정부 합동조사’라는 신뢰성에도 금이 갔다. 국토부는 “물리적 한계를 고려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숫자가 적더라도 표본 선정이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해 이뤄졌다면 신뢰성은 담보된다. 하지만, 국토부 표본 선정을 두고는 이런저런 논란이 제기된다. 국토부는 선정 대상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는 이른바 ‘블라인드, 불시점검’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택배 업계에선 조사를 전후해 ‘불시점검’에 대비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포착됐다.
택배노조가 공개한 문자메시지를 보면 관리자 단체 대회방엔 ‘명일 국토부에서 하차알바 관련 점검을 나온다고 한다’라거나 ‘정말 긴장하라’, ‘택배 기사가 일찍 출근하더라도 절대 분류라인에 붙어서 분류 일을 하지 않도록 하라’, ‘내일부터 국토부 불시 점검이니 위 사항 꼭 지켜주시기 바란다’라는 등의 대화가 오갔다. 이런 현상은 서울 강남, 충남 세종, 경남 김해 등 전국에서 발견됐다.
분류인력이 제대로 투입되지 않은 서울 중랑, 경기 광주, 전북 군산 등을 조사해 달라는 노조측 입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택배사들이 점검 날짜를 미리 알고 대비하거나, 점검 기간을 인지하고 그 기간 동안 일시적 대비책을 마련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택배 노조 관계자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 터미널을 국토부가 무기명으로 신고를 받고 이곳에 대해 점검을 했다면 논란은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점검에 참여한 민·관 합동조사단 관계자는 “점검 표본도 적고 점검 시간도 적었다. 정부 기관이 공신력 있는 평가를 하기엔 어려운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분류인력 투입 완료’한 택배터미널 25곳 중 7곳 그래도 “양호하다” 평가한 국토부
국토부 점검 결과는 ‘양호’였다. 현실은 전혀 양호하지 않은데, 판단은 ‘양호하다’라고 나왔다.
점검지 총 25곳 중 분류인력이 전부 투입돼 택배기사가 분류작업에서 배제된 택배터미널은 7개(28%)에 불과했다.
당초 CJ대한통운을 비롯한 택배사들은 사회적합의에 따라 지난해 말까지 분류인력 투입을 완료하고, 올해 1월 1일부터는 택배기사를 분류작업에서 완전히 배제하기로 했다.
하지만 분류인력 투입이 완료돼야 하는 올해 1월 1일 이후에도 25개 중 18개(72%) 택배터미널이 분류인력이 부족하거나, 아예 투입되지 않았다.
분류인력이 부족해 택배기사가 일부 분류작업에 참여한 택배터미널이 절반에 육박하는 12개(48%)나 됐고, 택배기사가 여전히 분류작업을 전담하고 있는 택배터미널도 6개(24%)에 달했다.
‘사회적합의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는 평가가 당연해 보이지만 국토부는 “택배기사가 완전히 분류작업에서 배제되기까지는 시일이 소요될 것”이라며 “양호하게 이행 중”이라는 모순적인 평가를 했다.
택배노조 관계자는 “작년 6월 사회적합의 이후 지금까지 택배사들에는 6개월 넘는 준비 기간이 있었다. 국토부는 ‘6개월이나 지났음에도 여전히 분류작업 배제가 제대로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택배사들을 질책하는 대신, 마치 택배사들이 새해부터 시범사업을 진행한 것인 마냥 ‘시일이 더 필요해 보인다’며 면죄부를 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현장 점검에선 ‘분류 전담인력이 투입된 경우에도 오전 9시 이전 출근하는 기사가 다수였다’고 확인했다. 택배 기사 노동 시간을 줄이자는 것이 사회적 합의였고, 노동 시간 중 분류 작업을 줄이기 위해 투입한 것이 분류 인력이었다. 하지만, 점검 결과 분류 전담 인력이 있더라도 아침 7시 출근과 같은 현상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 확인된 것이다.
국토부는 이런 현상의 원인으로 ‘분류 인력의 숙련도’와 ‘터미널 규모 협소에 따른 시설적 한계’를 들었다. 분류 인력의 숙련도가 올라가고, 터미널 규모를 확충하는 공사를 진행하면 택배 기사 작업 시간이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라는 게 국토부 시각이다.
택배 현장은 국토부 입장을 “지나치게 안일하다”고 지적한다. 쟁점은 숙련도가 아닌 분류인력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일부 터미널은 택배기사의 가족이나 대리점 소장 등을 분류인력으로 등록해 숫자만 채우는 ‘꼼수’가 빈번하다는 것이 택배 업계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익명을 요구한 택배 대리점 소장 A씨는 “평소 일을 도와주던 택배기사의 배우자를 분류인력으로 등록해 두고 택배기사가 직접 분류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분류 인력 비용을 줄이기 위한 꼼수도 있다. 광역 시도를 오가는 대형 간선 차량이 터미널에 도착하는 시간은 새벽 5~6시 경이다. 대형 차량에서 택배를 내려 분류하기 시작하는 시점은 7시 경이다. 분류 인력은 7시부터 투입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현장에선 “9시 즈음 분류 인력이 출근하는 경우가 많다”는 증언이 줄을 잇는다. 7시 출근은 비용이 더 들어가니 9시로 맞춰서 분류 인력을 투입한다는 것이다. 국토부 조사에서도 “(분류 작업을 위해) 오전 9시 이전 출근하는 기사가 다수였다”고 확인됐다.
‘심야배송 없다’는 국토부...택배사가 제출한 자료만 보나
택배사 제출 자료를 근거로만 ‘심야배송은 없었다’고 결론 내린 것에 대해서도 문제가 제기됐다.
국토부에 따르면 각 택배사는 21시 이후 시스템 차단을 통해 배송을 제한하고 있다는 자료를 국토부에 제출했다. 이를 근거로 국토부는 “현장점검 대상 터미널에서는 22시 이후 심야배송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현실과 동떨어진 조사라는 지적이 나온다. 택배사는 시스템을 차단한다고 하지만, 택배 기사는 전산상으로 모든 물량을 ‘배송 완료’라고 처리하고, 9시 이후에도 배송 작업을 계속한다는 것이다.
CJ대한통운 소속 대리점 소장은 B씨는 “택배사들이 배송 프로그램을 차단해서 일이 더 번거로워졌을 뿐 심야배송을 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
현장 조사에서도 이같은 증언은 있었다. 국토부 민·관 합동조사단 관계자는 “현장 인터뷰에서 ‘심야배송을 하고 있다’는 택배기사의 증언이 있었다. 국토부는 택배사가 제출한 자료만 믿고 심야배송이 없는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