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이야기하지만 나는 윤석열-안철수 단일화에 별 불만이 없다. 선거를 이기기 위해 합종연횡을 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전략이다. 뜻이 조금이라도 맞는 사람들끼리 단일화를 하는 것은 연대를 중시하는 내가 옳다고 믿는 바이기도 하다.
단일화를 앞두고 샅바 싸움을 하는 것도 그다지 탓할 일이 아니다. 게임이론의 다양한 연구를 보면, 협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과장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꽤 전략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 생각을 갖고 있는 나조차 이번 윤석열-안철수 단일화에 대해서는 ‘선을 넘었다’는 악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안철수 씨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이번 단일화를 결행했겠지만, 그가 얻을 ‘무언가’를 위해 한국 사회가 잃은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말이 만들어내는 정체성
다른 이야기를 하나 해보자. 담배를 끊기로 결심하고 흡연을 참는 사람에게 누군가가 무심코 담배를 권했다고 해보자. 이때 담배를 끊기로 결심한 사람의 대답이 다음의 두 가지다. 이 두 가지 대답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① “괜찮습니다. 담배를 끊는 중이거든요.”(No Thanks, I'm trying to quit.) ② “괜찮습니다. 저는 흡연자가 아니거든요.”(No Thanks, I'm not a smoker.)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 이 두 대답에는 사실 엄청난 차이가 있다. 바로 자신의 정체성을 무엇이라고 규정하느냐에 관한 차이다. 이는 습관 전문가이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름을 날리는 제임스 클레어(James Clear)가 종종 드는 사례다.
클레어에 따르면 ①번 대답보다 ②번 대답이 담배를 끊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인데 어떻게든 끊으려 한다”는 말은 달리 말해 그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여전히 흡연자로 규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 “나는 흡연자가 아니다”라는 말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비흡연자로 규정하고 있다. “그게 뭔 대수냐?”고 반문할 수 있는데, 이건 매우 큰 차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이 한 번 정한 정체성을 끝없이 사수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코미디 배우 짐 캐리는 지독히 가난하던 무명배우 시절 식당에서 냅킨을 꺼낸 뒤 그 위에 볼펜으로 1,000만 달러짜리 수표를 만들었다고 한다. 냅킨에 적은 수표는 그냥 휴지조각이다. 하지만 짐 캐리는 그 냅킨 수표를 지갑 속에 넣고 다니며 힘들 때마다 꺼내 보았다.
수표는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발행하는 것이다. 캐리가 1,000만 달러짜리 수표를 만들었다는 것은 스스로 ‘나는 1,000만 달러를 버는 배우다’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건 “나는 1,000만 달러를 벌기 위해 노력할 거야”라는 희망을 적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한 캐리는 각고의 노력 끝에 1994년 명작 <마스크>를 만났고, 이후에는 1,000만 달러를 우습게 알 정도의 슈퍼스타가 됐다. 이만큼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애리조나 대학교 심리학과 로버트 치알디니(Robert Cialdini) 교수는 이를 ‘일관성의 법칙’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사람에게는 자신이 규정한 정체성을 지켜 나가려는 본능이 있다. 그래서 ‘나는 비흡연자야’라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한 사람이 ‘나는 흡연자이지만 담배를 끊으려고 해’라고 규정하는 사람에 비해 훨씬 담배를 끊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동지의 죽음을 엿바꿔먹지는 말아야 했다
고백컨대 나는 이번 선거에서 안철수-윤석열의 단일화가 안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물론 정치에 관한 식견이 쥐뿔도 없는 내 예상은 맞을 확률보다 틀릴 확률이 훨씬 높은 편이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예상이 적중할 것이라고 슬쩍 믿었다.
그 이유는 안철수 씨가 자신의 정체성을 너무 강하게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당제에 관한 소신을 자신의 평생 신념처럼 떠들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는 동지의 죽음을 팔았다. 유세 과정에서 세상을 떠난 동지의 죽음을 두고 “고인의 유지” 운운하며 완주를 소신처럼 이야기했다. 이 순간 나는 ‘안철수 씨가 진짜로 완주를 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정치가 생물이고 정치인의 말바꾸기가 일상이라지만, 보통 이렇게까지 강력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한 사람은 절대 쉽게 그 정체성을 바꾸지 못한다. 치알디니 교수의 말처럼 사람에게는 자신이 말로 뱉은 정체성을 지키려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철수 씨는 스스로 규정한 정체성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었다. 이 말은, 결국 그는 애초부터 완주할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다. 국무총리건, 경기도지사 후보건 단일화를 통해 최대한 많은 것을 얻는 게 그의 유일한 관심사였다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다면 정체성이 절대로 이렇게 삽시간에 변하지 않는다.
나는 이조차 별로 비판할 생각이 없다. 정치는 원래 그런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안철수 씨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고 말았다. 동지의 죽음을 팔고 다닌 것이다. 정말로 그 일만은 해서는 안 됐다.
그가 동지의 죽음을 입에 담으면서 “고인의 유지” 운운한 순간, 단언컨대 그의 지지자들은 결연한 마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을 것이다. 다당제에 대한 안철수의 소신(그런 건 쥐뿔도 없음이 밝혀졌다)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투영했을 것이다.
이렇게 정체성을 규정한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그 정체성을 바꾸지 못한다. 그게 사람의 본능이다. 그래서 지지자들은 비록 당선은 되지 못할지언정 최선을 다해 안철수 씨를 돕는 것을 사명이라 여겼을 것이다. 안철수 씨가 얻은 한 자릿수대의 지지율은 바로 그 지지자들의 결연한 마음이다. 그런데 그는 그 결연함을 그렇게 쉽사리 엿바꿔먹었다.
그의 이 ‘엿바꿔먹음’으로 한국 사회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악화는 양화를 몰아내는 법이다. 정치인들이 말을 바꾸는 것은 잦은 일이라 국민들도 대부분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동지의 죽음까지 운운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한 사람이 이렇게 쉽게 엿을 바꿔먹는 것은 초유의 일이었다.
만약 안철수의 이번 도박이 성공한다면, 사람들은 정치인의 그 비열함을 당연히 받아들일 것이다. 정치 불신은 더 없이 커질 것이고, 정치는 민중들의 삶에서 더더욱 멀어져 그들만의 자리 나눠 먹기로 변질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안철수의 그 비열함이 실로 슬프다. 안철수 이 비열한 자여. 당신은 당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