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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존경과 동지애를 담아, ‘586 진보’의 정치권력 퇴장을 부탁한다

나 따위가 “옛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둥의 거창한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를 먼저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나에게 그런 자격은 없다. 하지만 부족한 자격을 전제로 감히 이야기하자면, 이제는 때가 된 것 같다. 대한민국 정치사에 굵은 족적을 남겼던 586 정치권력이 퇴장할 바로 그 때 말이다.

이런 주장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나는 재수를 하지 않았다면 89학번이 됐을 것이고, 14개월만 빨리 태어났으면 60년대 출생으로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실로 깻잎 한 장 차이로 586에서 벗어난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나를 586이라 불리는 세대의 막내라고 생각하지, 그 다음 세대의 맏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서적으로도 나는 전두환, 노태우 군사독재와 거리에서 맞섰던 586세대와 훨씬 가깝다. 즉 이 칼럼에서 다루는 반성의 대상에는 당연히 나도 포함된다는 이야기다.

달에서 살아남기

경영학에는 매튜 메이(Matthew e. May)라는 경영학자가 개발한 ‘달에서 살아남기’라는 게임 모델이 있다. 미국 자동차 회사 제너럴 모터스(GM)의 임직원 워크숍에서 메이가 실제로 실시했던 게임이기도 하다.

게임 규칙은 이렇다. 총 15개 팀을 구성을 한다. 이 15개 팀이 우주선을 타고 우주여행을 갔다고 가정을 한다. 그런데 우주선이 고장이 나는 바람에 이들은 모두 달에서 조난을 당했다. 비상착륙을 하는 동안 우주선이 고장이 났고, 팀원들에게 남은 물건을 오직 열다섯 개뿐이다. 그 열다섯 개 물품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성냥
2. 농축 식량 
3. 15미터 밧줄
4. 낙하산 천
5. 휴대용 보온 장치
6. 45구경 권총 2자루
7. 분말 우유 한 박스
8. 약 45리터의 산소탱크
9. 달 표면 지도
10. 구명정
11. 나침반
12. 약 19리터의 물
13. 신호용 섬광탄
14. 주사바늘이 포함된 구급키트
15. 태양열 FM송수신기


게임 규칙은 각 팀 별로 이들 열다섯 개 물품 중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각 개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물품에 1, 2, 3순위를 매긴 뒤 집단 토론을 하는 방식이다. 위기 상황에서 집단지성이 얼마나 발휘되느냐가 관건인 게임이었다. 실제 이 게임은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우주인들을 교육할 때 사용하는 게임이기도 했다.

건대항쟁 4일째인 1986년 10월31일 건국대 건물에서 부상당한 학생이 경찰에 엎혀나오는 모습. 당시 사회과학관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화재가 발생했으며 경찰은 학생들이 숨어있던 건물들에 백골단을 투입했다. ⓒ건국대학교 제공

NASA가 발표한 정답 몇 가지를 공개하자면(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경영학에서는 이 게임의 정답이 무엇인지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일단 성냥은 절대 골라서는 안 된다. 산소가 없는 달에서 성냥에 불이 붙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침반도 쓸 데가 없다. 나침반이 기능을 하는 이유는 지구 전체가 큰 자석이기 때문인데 달 표면에는 이런 자장이 매우 약하다. 휴대용 보온장치, 이런 거 골라도 반드시 후회한다. 달의 밝은 쪽은 매우 뜨겁다. 굳이 보온장치가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실제 NASA가 꼽은 1, 2, 3순위 물품은 산소탱크, 물, 달 표면 지도라고 한다.

그런데 메이가 실시한 이 게임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또 이 게임에는 함정도 있었다. 메이는 팀을 구성할 때 최고위급 리더와 중간 관리자, 그리고 말단 직원들을 골고루 섞었다.

그리고 메이는 게임 직전 각 팀의 막내들을 불러 몰래 답을 알려줬다. “달에서 가장 쓸모가 없는 게 성냥이고 제일 필요한 것은 산소입니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답을 들은 막내들은 게임 도중 “제가 정답을 찾았어요!”라고 외치면서 이 사실을 설명한다. 마치 그게 자신의 지식인 것처럼 말이다.

메이가 보고 싶었던 것은 이 지점이었다. 과연 팀의 막내가 정답을 이야기했을 때 그 팀은 진실을 받아들이고 달 불시착이라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결과는 슬프게도 15개 팀 모두가 정답을 찾는데 실패를 했다.

막내가 뻔히 정답을 아는데도 그 어떤 팀도 막내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이유는 바로 리더가 그들의 의견을 찍어 눌렀기 때문이다. “새파랗게 젊은 너희들이 뭘 알아?”라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50대 후원자가 될 수 있다

“나는 리더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86 정치권력은 2000년 총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청년이었던 그들을 대거 등용하면서 시작됐다. 그리고 이후 무려 22년이 지났다.

사람이 22년 동안 정치권력의 중심에 서면 자연스럽게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구조가 고착화하는 순간, 조직은 진실을 외면하게 된다. 위기를 극복할 동력을 잃는다. 이것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지난 대선을 돌이켜보면 50대는 40대와 함께 가장 진보적인 의식을 보여줬던 세대였다. 50대의 일원인 나는 이 사실이 무척 자랑스럽다. 그렇다. 전두환, 노태우와 싸우며 함께 거리를 누볐던 우리는 그 어떤 세대보다도 진보적으로 멋지게 늙어가는 중이다.

하지만 이 말이, 586 세대가 여전히 정치권력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말과 동의어가 절대 아니다. “젊은 층은 늘 진보적이다”라거나, 그래서 “투표율이 높으면 진보가 유리하다”는 오랜 전제는 이번 대선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20대, 30대의 보수화라는 이 심각한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혹시 이 중차대한 사태의 원인이 정치권력을 향한 20대, 30대의 힘겨운 발걸음을 586 정치권력이 막고 있었기 때문은 아닌가? 나는 아니라고 감히 이야기를 하지 못하겠다.

김대중 대통령이 새파랗게 젊은 386 정치인을 대거 등용할 때, 당시에 반발이 왜 없었겠는가? 오랫동안 DJ와 생사고락을 같이 하던 사람들은 피눈물을 흘릴 정도로 억울했을 것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마침내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뤄냈는데 그 자리를 청년들에게 내놓으라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DJ는 그 일을 해냈다. 그 수혜자가 바로 지금의 586 정치권력이다.

그래서 나는 586 정치권력에게 DJ의 그 혜안을 다시 보여줄 것을 감히 청한다. 우리의 시대는 빠르게 지나가는 중이고, 다음 세대를 이끌 진보는 아직 제대로 등판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야지 그걸 왜 우리가 양보해야 해?”라고 말하지 말자. 86 정치권력의 화려한 등장 자체가 DJ의 의지를 바탕으로 한 당시 기성 정치권력의 양보에서 시작된 것 아니었나?

험난했던 전두환 노태우 군사독재 시절, 누구보다도 용맹스럽게 싸웠던 586 선배, 동지들에 대한 뜨거운 존경을 보낸다. 그리고 그 존경의 마음을 담아 이 부탁을 남긴다.

이제 물러날 때가 됐다. 나를 포함한 우리보다 더 젊은 진보, 우리보다 더 발랄한 진보, 그리고 우리보다 훨~씬 다양한 진보가 정치권력의 중심에서 이 세상을 이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 달라. 그들을 믿고 열정을 다해 응원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1980년대 거리를 누비며 치열하게 싸웠던 586 세대다운 가장 멋진 퇴장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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