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명숙 칼럼]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와 이준석 대표의 말

유예된 장애인의 권리와 불복종 직접 행동

그는 회의가 끝나기 두 시간 전부터 콜택시를 불렀다. 그만이 아니라 내가 아는 대부분의 장애인권 활동가가 그랬다. 장애인 콜택시의 수가 많지 않기에 기다리는 시간은 길었기 때문이다. 가끔은 일찍 오는 바람에 시켜 놓은 음식도 먹지 못한 채 가곤 했다.

지방에 사는 한 장애인 지인은 비싸고 좁지만 회사 근처로 집을 옮겨야 했다. 출근 시간에 맞춰 제때 맞출 장애인 콜택시를 잡을 수 없어서였다. 지방에는 장애인콜택시도 적고 저상버스도 별로 없다. 또 다른 장애인 지인은 출근을 위해 1시간 일찍 집을 나설 뿐 아니라 차가 아닌 오롯이 전동 휠체어로만 갔다.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다. 출근시간에 휠체어를 타기에는 지하철에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우연히 만난 장애인활동가는 나이 서른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버스를 탔을 때의 묘한 기분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나도 다른 사람(비장애인)과 같이 일상을 누리는 게 믿어지지 않아. 비장애인과 섞여서 지낼 수 있을 줄은 몰랐어”라고 털어놨다. 

그렇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철저히 비장애인 중심의 공간과 교통 수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완벽한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를 이루기 위해 장애인들은 집이나 장애인 거주시설에 갇혀 있어야 했다. 비장애인 중심 사회는 엄청난 속도로 성과와 이윤을 내라고 비장애인들을 재촉한다. 그 과정에서 장애인은 성과를 내는데 방해가 되는 존재로 치부될 뿐이다.

그런데도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장애인들이 시민들을 볼모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아침 출근길에 휠체어를 타고 시위를 벌여 시민들이 불편을 겪는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시민‘에 장애인은 없다. 아니, 그에게 장애인은 시민권이 없는 자다. 그는 장애인들의 시위를 두고 “수백만 서울시민의 아침을 볼모로 잡는 부조리”라고 비난했다.

전국장애인차별연대 소속 회원들이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에서 혜화역까지 이동하는 지하철에 탑승해 장애인 이동권 보장·장애인 권리예산 반영을 요구하며 출근 시간대 지하철 시위을 하고 있다. 2022.03.28. ⓒ뉴시스

묻고 싶다. 250만 명 장애인의 30~40년의 인생을 볼모로 성장의 이득을 챙겨온 게 아닌가. 장애인이 배제된 속도와 공간, 일터와 삶터를 보라. 뒤집어보면 ‘장애인을 볼모로 삼아’ 비장애인들의 빠른 속도를 유지시켜온 것이 아닌가. 휠체어 탄 장애인들이 전철을 타거나 버스를 탈 수 없도록 철저히 배제했기 때문에 짐짝 전철과 콩나물 시루버스가 가능했다. 장애인 고용률이 그에 대한 반증 아닐까.

‘빨리빨리’와 엄청난 노동강도를 압박해 비장애인을 착취하고 장애인을 배제하며 부를 쌓아온 게 아닌가. 평생을 집안이나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보내야 하는 장애인들을 볼모로 삼고 성장한 것이 아닌가. 대한민국이 경제 규모에서 세계 10위나 될 정도로 성장했으면 더 이상 장애인을 볼모로 삼는 각종 정책은 중단해야 될 때가 되지 않았나. 얼마나 더 오래 장애인을 배제하는 비장애인 중심 사회와 제도가 굴러가야 한단 말인가.

유예된 장애인 권리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 이동권 이슈가 처음 부각된 것은 지난 2001년이다. 그해 1월 수도권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에서 노인 장애인 부부가 리프트에서 추락사한 후, 4호선 혜화역에 있던 노들장애인야학 학생들이 주축이 돼 지하철 선로를 점거하고 버스를 점거하며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후 지하철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고 저상버스가 도입됐다.

그러나 아직 저상버스는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조금 있는 정도다. 2020년 전국 저상버스 보급률과 장애인 객차 비율은 각각 27.8%다.(국토교통부, 교통약자 이동편의 실태조사 연구 보고서) 시외버스나 고속버스에는 아직 단 한 대도 저상버스가 도입되지 않았다. 20년 넘게 지났으나 아직 장애인이동권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시민을 볼모로 잡았다는 평가는 ‘비장애인 시민의 관점’일 뿐이다. 지하철 시위를 하는 장애인 중에는 10년, 20년, 아니 더 긴 시간을 집이나 시설에 갇혀 있다 나온 사람도 있다. “볼모”, “아집”, “불편”을 말하기 전에 장애인의 권리를 빼앗아 이룬 성장과 제도, 공간임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이제라도 부끄러운 과거의 정치를 바꾸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장애인 시민의 관점’이 정치에 반영돼야 할 것이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자료사진. ⓒ뉴시스

이준석의 혐오정치

이준석 대표의 장애인 혐오 선동은 국민의힘에서 조차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같은 당의 장애인 당사자 김예지 의원은 장애인 이동권 시위 현장에 찾아가 정치권이 장애인 정책을 제대로 만들지 못해 생긴 시위라며 사과를 했다. 그럼에도 이 대표는 “당 차원이 아닌 제 개인 자격으로 하는 이슈 파이팅”이라며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그의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앞서 여성 혐오로 지지를 모았던 경험이다. 그는 ‘여성들은 과거와 달리 차별받고 있지 않으며 여성할당제 등 소수자 차별 시정 조치는 공정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로 인해 젊은 남성들이 역차별받고 있다는 거짓 선동으로 여성 혐오를 부추겼다. 젊은 남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친기업 정책과 고용 불안 문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구조적 차별의 은폐와 바꿔치기 수법을 쓰고 있다.

그렇게 남성과 여성이 갈등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소위 ‘이십대 남성’의 표를 얻었다. 혐오정치를 하며 당대표에 올랐으니, 장애인 혐오를 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여긴 걸로 보인다. 사회적 소수자를 공격해도 자신에 대한 지지만 굳힐 수 있다면 손해 볼 게 없다고 말이다.

장애인운동에 쏟아진 응원과 혐오 선동의 위험


현재 상황은 이 대표의 생각과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 전장연에 대한 사람들의 응원이 늘었다. SNS에 ‘전장연 후원 인증’ 게시글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혐오는 연대보다 강했다. 나경원 전 의원도 이 대표의 조롱하는 태도를 비난했다. 윤석열 당선자 인수위원회 관계자와 전장연 대표단 면담도 성사됐다. 전장연은 장애인 권리 예산 확보를 요청했고,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인 4월 20일까지 답을 달라고 했다. 기다리는 동안 출근 시간 지하철 시위는 잠시 중단하기로 했다. 이들은 이 대표의 사과를 받고 싶다는 뜻도 전했다.

그러나 이 대표는 여전히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그는 사과 대신 “전장연이 지하철 통행을 막아 시민들의 불편을 초래해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포기했다”며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인지해서 다행이고 환영한다”고 페이스북에 썼다.

더 이상 그의 혐오 선동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거대 정당 대표이자, 곧 여당 대표가 될 그의 사회적 영향력이 크다는 점에서 혐오 선동은 위험하다. 혐오 선동이 소수자에 대한 증오 범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장연 지하철 시위에 대한 일부 시민의 증오와 욕설, 혐오 표현은 도를 넘었다. 이 대표의 발언 이후, 자신감을 얻었는지 그 수위가 더 높아졌다. 전장연에 몰려가 욕하는 이들이, 지하철을 타려는 장애인에게 언어 폭력, 물리적 폭력을 가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 지점에서 전장연이 요구한 이 대표의 사과는 증오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소속 회원들이 29일 오전 대통령직인수위와 면담이 진행되는 시각 서울 경복궁역 승강장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2.03.29. ⓒ뉴시스

불복종 직접행동이 문명을 일궈 왔다

출근길 지하철 시위 중단으로 잠시 상황이 유예된 듯 보이지만, 꼭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전장연의 시위 방식이다. 이 대표와 나 전 의원이 말하듯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는 불법인가? 이 대표의 말대로 “최대 다수의 불행과 불편을 야기”하는 “비문명적 관점의 불법 시위”인가?

당연히 아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의 지하철 승하차는 누구나 가능한 대중교통 수단 이용일 뿐이며, 그 과정에서 어떠한 폭력도 없었기에 불법일 수 없다. 정말 불법이었다면 서울교통공사가 가만히 있었겠는가. 모든 시위를 불법으로 모는 두 사람의 시각이 문제일 뿐이다. 다만 휠체어를 탄 다수의 장애인이 승하차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불편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오랜 역사 동안 여러 국가에서 해온 시민불복종 직접행동의 일종이다.

1970년대 미국 흑인민권운동가들의 투쟁 중에도 불복종 시민행동이 있다. 버스 내 좌석을 흑인 좌석과 백인 좌석으로 구분하고 흑인은 백인 좌석에 앉지 못하게 하는 방침을 거부하며 끝까지 백인 좌석에 앉아있는 싸움이었다. 때로는 백인 버스 운전사에게 쫓겨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이들은 부당한 법과 방침에 저항하는 싸움을 계속 이어갔다.

불복종 직접행동은 합법 여부가 아니라 인권적이고 평화적인 지향이 핵심이다. 미국에서도 교통이나 건축물 등에 장애인 편의시설이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1990년 미국장애인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이 제정된 것도 장애인 운동가들의 불복종 직접행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장애인운동가들이 도로에서 잠을 자고 버스 앞을 가로막으며 싸워 만들어진 것이다. 장애인을 억압하는 권력과 제도에 온몸으로 맞서 싸웠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서울 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탑승해 광화문역까지 이동하며 장애인 대중교통 이동권 보장 촉구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 자료사진. ⓒ뉴스1

지금 비장애인들이 몸이 힘들거나 노인, 아이들이 있을 때 함께 타는 지하철 엘리베이터,  장애인들의 싸움 덕에 만들어진 것이다. 전장연의 투쟁은 이준석이 말한 “최대 다수의 불행과 불편”이 아니라 ‘최대 다수의 최대 편의’를 가져왔다. 어느 나라든 불복종 직접행동이 문명을 일궈 온 것이다.

지금 우리가 다져야 할 것은 저항의 힘에 대한 확신과 권리 주체로서 당당히 싸우는 이들에 대한 연대다. 나아가 장애인을 배제하는 시선, 주류 기득권 중심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노력도 필요하다.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동등한 시민으로 바라보지 않는 이준석 대표의 왜곡된 주류 권력자로서의 오만함을 납작하게 만들 것은 투쟁이다.

혐오는 연대를 이길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사회가 엄청난 속도로 이윤을 내는데 몰입해 
동료 시민인 장애인의 인권에는 관심이 없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공존하고 다양한 사회구성원이 서로 존중하는 사회라면, 우리는 함께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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