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성폭행 사건서 대법원 엇갈렸다, 발뺌하면 무죄 인정하면 유죄

성소수자 여성 해군 성폭행 혐의 해군 상관 무죄 확정

3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대법원 선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2022.03.31. ⓒ뉴시스

하나의 권력형 성폭행 사건에 대해 대법원의 판단이 엇갈렸다. 혐의를 완전히 부인한 피고인은 무죄를 확정받고, 일부 혐의를 인정한 또 다른 피고인은 유죄 취지로 다시 재판을 받게됐다.

한 사건을 두 재판부가 심리하면서 서로 다른 결론이 나온 것이다. 이 사건 피해자는 성소수자 여성 해군이고 피고인들은 피해자의 상관이다.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재판부는 피해자의 성적 지향과 피해자가 피고인에게 절대 복종할 수밖에 없는 관계를 고려했지만, 무죄를 확정한 재판부는 이를 외면했다.

3년 넘게 대법원에서 계류됐던 사건이었다. 피해자는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며 “오늘 저는 또다시 죽었다”고 입장을 밝혔다. 이번 판단으로 이 사건 피해자뿐 아니라 군대 내 성폭력 피해자, 성소수자들까지 무력화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성인지 감수성 부족’ 군사법원 판결 인정한 대법원

3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대법원 선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2022.03.31. ⓒ뉴시스

31일 대법원 3부(주심 대법관 김재형)는 군인등강간치상·군인등강제추행치상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 소령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반면 대법원 1부(주심 대법관 박정화)는 군인등강간치상 등 혐의로 기소된 B 중령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단이 잘못됐다며 유죄 취지로 사건을 고등군사법원으로 돌려보냈다.

A 소령은 피해자의 직속 상관으로 2010년 9월부터 11월까지 피해자가 성소수자임을 이용해 2회 강간하고 10회 강제추행한 혐의를 받는다. 피해자는 이 사건으로 임신했고, 임신중지 수술을 위해 당시 함장이었던 B 중령에게 피해를 보고했다. 그러나 B 중령은 위로를 핑계로 피해자를 숙소로 불러 성폭행한 혐의를 받는다.

1심을 맡은 보통군사법원은 피고인들의 혐의를 모두 인정해 A 소령에게 징역 10년을, B 중령에게 징역 8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고등군사법원은 이를 뒤집고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 진술을 믿을 수 없으며, 설령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인정되더라도 피해자의 저항이 어려울 정도의 폭행·협박이 없었다고 판단했다.

피해자가 성소수자란 점, 피해자는 임관 이후 함대에 처음 배치된 하급자로서 임관 11년차 직속상관과 함장에게 저항하기 어려웠다는 점 등을 고려하지 않은 판결이라며 당시 시민사회에서 비판이 빗발쳤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서도 간부들을 처벌해달라는 청원이 15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기도 했다.

대법원 자료사진 ⓒ김슬찬 기자

대법원은 3년 4개월간 판결을 미루다가 이날 서로 다른 판결을 내놨다.

대법원 1부는 두 번째 가해자로 지목된 B 중령의 성폭행 고의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이 수사기관에서부터 원심 법정까지 일관된다며 신빙성을 배척한 원심 판단이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B 중령이 일부 공소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피해자의 동의가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 “합리성이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재판부는 피해자가 처한 상황을 고려해 권력형 성범죄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군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급장교로서 평소 지휘관인 피고인의 지시에 절대 복종할 수밖에 없는 지위에 있었던 점 등”을 고려해 B 중령이 피해자 몸 위에 올라가 팔을 누른 행위도 “피해자의 반항을 현저히 곤란하게 하는 유형력 행사로 평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피해자가 얼굴을 돌리며 거부 의사를 분명하게 표시”한 점도 짚었다.

B 소령이 피해자의 성적 지향이나 무력한 상태에 ‘편승’한 점도 유형력 행사로 평가됐다. 재판부는 “더욱이 피해자는 당시 A 소령과 원치 않는 성관계로 임신하고 임신중절 수술까지 받은 일들로 인해 정신적·육체적으로 무력한 상태”였다며 “피해자는 그런 상태에서 평소 신뢰하던 지휘관인 B 중령로부터 이런 일을 당하게 되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게 됐고 그로 인해 눈물을 흘리는 것 외에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해군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는 지난 2일 오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성폭력사건 장기계류는 인권침해다. 멈춰진 대법원시계, 인권위가 돌려라' 기자회견을 열었다. 2022.03.02. ⓒ뉴시스


반면 대법원 3부는 첫 번째 가해자로 지목된 A 소령을 무죄로 본 원심을 수긍했다. 재판부는 A 소령 사건으로 인해 B 중령 사건이 발생했는데, 두 사건을 다른 사건으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원심이 피해자 진술에 신빙성이 부족한 정황이 있고 따라서 검찰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A 소령의 유죄를 증명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것에는 수긍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과 B 중령 사건은 구체적인 경위, 피고인과 피해자의 관계, 피해자의 진술 등이 서로 다르므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나 그 신빙성 유무를 기초로 한 범죄 성립 여부가 달리 판단될 수 있다”고 봤다.

피해자 “행복한 군인으로 살아갈 소망 짓밟혔다”

3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대법원 선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2022.03.31. ⓒ뉴시스


선고 직후 피해자를 지원해온 ‘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는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시대착오적 판단”이라며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서로 다른 판결에 피해자 측 박인숙 변호사(청년 법률사무소)는 “참담하다”고 평가했다.

박 변호사는 “피해자와 연인관계라며 처음부터 혐의를 잡아떼고 의료기록을 뒤져 피해자를 공격한 피고인은 무죄고, 일부 혐의를 인정한 피고인은 유죄가 선고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피고인이 하나도 인정하고 모든 범행을 부인하는 경우에는 범죄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보여진다”고 대법원이 가해자들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일련의 사건인데 다른 재판부가 판단하면서 생긴 문제”라며 “대법원이 재판부가 다르게 배정되면 달리 판단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이런 사건은 병합해 한 재판부가 제대로 판단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았나, 전원합의체에서 판단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A 소령 사건을 심리한) 재판부는 두 사건 일시·장소·행위 등이 다르니 개별 사건으로 보면서 정황상 연결되는 지점을 안 봤다. 기계적인 해석”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성소수자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화간이라고 봤다. 피해자의 성정체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판결이다. 본인이 판단하지 못하면 전문가에게 물어보기라도 해야 했다”고 질타했다.

피해자는 대독을 통해 “3년 넘게 기다렸다. 파기환송 소식에 잠시 희망을 가졌지만 다시 절망에 빠졌다”며 “행복한 군인으로 살아갈 제 소망은 짓밟혔다. 후배들은 저 같은 경험을 안 하길 바란다. 피해자가 안 되길, 피해자가 되더라도 생존자로 살아남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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