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고향 세탁’ 의혹 한덕수 씨는 답하라, 당신 고향은 호남인가 서울인가?

먼저 분명히 하고 싶은 게 있다. 나는 그 어떤 이유로도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는 것에 반대한다. 인종, 성별, 나이, 학력, 성 정체성, 출신지 등을 막론하고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는 모든 이유에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뻑큐를 날린다.

나는 지금부터 새 정부 첫 총리 후보로 사실상 내정된 한덕수 씨의 고향 이야기를 오랫동안 할 참이다. 그런데 이는 고향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기 위함이 당연히 아니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빌어먹을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고향으로 사람을 차별해 올 때, 한덕수 씨가 실로 놀라운 수준의 얍삽한 행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이 얍삽함이 총리로서 완벽한 결격 사유라고 생각한다.

포털 사이트에 한덕수 씨의 프로필을 검색해보면 ‘1949년생 전라북도 전주’라고 나온다. 호남이 고향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의 프로필에 고향이 전북으로 확정된 과정에 관한 스토리는 매우 역겹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보자. 이 이야기는 동아일보에서 파리 특파원과 노조위원장을 지냈으며 오랫동안 한덕수 씨의 행적을 추적해온 김기만 전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이 SNS에 올린 기억들이다.

고향이 서울이었다가 전주였다가

일단 한덕수 씨는 TK(대구·경북) 쿠데타 세력과 PK(김영삼) 세력이 집권했을 때 철저히 자기의 고향을 숨겼다. 이에 관한 김기만 전 사장의 회고는 이렇다.

여기서 H씨의 주목할 증언을 보자. 1979년 EPB(경제기획원)에서 처음 만난 후 40년 이상을 사귀었는데, 한덕수 입에서 고향, 전주에 관한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 말을 안 꺼내니 묻기도 그래서 동향끼리 전주 얘기 한번 섞지 않고 지내왔다나! 참으로 지독하지 않은가?

뭐 여기까지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향을 묻지 않았으니 답하지 않는다”는 태도가 욕을 먹을 일은 아니니까. 그런데 그의 다음 행적은 그렇지 않다.

1995년 일이다. 초대 민선 전북지사로 29, 30대 전북지사인 유종근 박사(전 아태재단 사무총장)는 취임 이후 ‘전북 경제 살리기’를 강조했다. 중앙정부의 지원이 절실했다. 중앙부처 요직에 전북 출신이 누가 있는지 찾아보던 중 상공부 국장 한덕수를 발견했다.

즉시 한 국장을 방문, “전북 경제가 많이 어려우니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이런 대답을 들었다. “나는 전북 출신 아니니 앞으로 절대 나를 찾아오지 마시오.”

미국 뉴욕주립대 경제학 박사에 럿거스대 교수를 했고, 한덕수보다 5살 많은 유 전 지사가 일생 이 냉대와 수모를 잊을 수 있을까?


한덕수 씨, 이 일은 기억이 나시는가? 이 일은 김 전 사장이 유종근 전 지사에게 직접 확인한 이야기다. 하지만 한덕수 씨 당신은 물론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발뺌을 하겠지. 안 봐도 비디오다. 그렇다면 이 일은 어떤가? 이건 기억이 나시는가?

1996년 12월 그가 특허청장에 임명됐다. YS 정권 말기였고, 호남 출신 장차관이 아주 적었던 때였다. 그를 개인적으로 잘 아는 전북 출신 기자들이 그의 출신지를 ‘전북’으로 썼다(동아일보는 ‘군산’으로 썼음). 그러자 그는 해당 언론사에 일일이 연락해 자신의 본적이 ‘서울’임을 밝혔다.(그는 6남 3녀 중 5남이기 때문에 결혼해 분가하면 본적이 바뀜).

각 언론사에 일일이 연락하실 정도로 부지런하셨으니 이건 기억이 나실 것이다. 설마 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는 하지는 않겠지? 그러니 이쯤에서 웬만하면 기억을 좀 하자.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보통 이렇게 본인이 정색을 하고 고향을 서울이라고 언론사에 직접 통보하면 언론사는 다음에 실수하지 않기 위해 한덕수 인사카드의 본적을 서울로 정정한다. 나도 막내 기자 시절 이런 일을 몇 번 해봤다. 이때부터 한덕수의 고향은 공식적으로 서울이 된 것이다. 상기하자면 이때가 1996년 12월이었다.

자, 그로부터 고작 15개월 뒤에 벌어진 다음 사건이 오늘의 하이라이트다. 매우 놀랍고 재미있을 예정이오니 임신부, 노약자, 미성년자, 평소 작은 일에도 깜짝깜짝 놀라시는 분들 모두모두 여기에 모여 이야기를 즐겨주시기 바란다.

김대중 정부 출발점이던 1998년 3월 그는 초대 통상교섭본부장으로 발탁되었다. 언론사는 1년 여 전의 경험이 있어 그의 본적을 ‘서울’로 썼다.

그러자 이번에는 한 본부장이 각 언론사에 팩스를 보냈다. 
‘전주가 고향이며, 초등학교 일부도 전주에서 다닌 전북 출신’이라는 요지였다. 김대중 정부이니 호남 출신임을 밝히는 것이라 이해하고 싶어도, 그 팩스를 보는 순간 동향 후배로서 참담한 심정이 됐다. ‘가명인(假明人)’이라는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그를 보는 전북 출신 기자들의 눈초리가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어떤가? 독자 여러분들 기대만큼 엿 같은, 아니 참, 재미진 이야기 아닌가? 내가 이래서 한덕수 씨에게 묻는 것이다. 전주인 듯 전주 아닌 전주 같은 너님의 고향은 도대체 어디냐? 뭔 고향이 서울이었다가 전주였다가 단 15개월 만에 버무려지나? 고향이 비빔밥이냐? 나의 최애 음식 중 하나인 전주비빔밥은 댁처럼 고향을 막 비벼먹으라고 만들어진 음식이 아니다.

이런 자가 무슨 국민 통합?

내 학문적 지식(?)을 총 동원해 이야기해 보자면 이런 행태를 공식 학술 용어로 ‘졸라 얍삽하다’라고 칭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졸라 얍삽함’이 단지 그의 얍삽함에 그치지 않고 국민 통합에 심각한 걸림돌이 된다는 데 있다.

생각해보라. 호남은 박정희 집권 이래 수십 년 동안 그야말로 처절한 차별을 당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깡패나 사기꾼은 전부 호남 사람이었고, 이 때문에 호남 사람은 서울에서 하숙도 구하기 어려웠던 황당했던 시절이 있었다.

새정부 초대 총리후보로 지명된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가 3일 서울 통의동 인수위 기자회견장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2022.04.03. ⓒ뉴시스


이 슬픔을 가슴에 꾹 누르고 호남의 민중들은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을 당선시켰고, 이후 실로 대인배다운 모습을 보였다. 노무현, 문재인으로 이어지는 영남 출신 정치인에게 몰표를 줌으로써 2기, 3기, 민주정부를 열었던 것이다.

이런 호남 민중들에게 한덕수 씨의 이런 얍삽함이 어떻게 보이겠는가? 고향이 호남이라는 이유로 취직도 안 되던 한을 참아왔던 그들이, 혼자 살겠다고 “내 고향은 전북이 아니라 서울이오! 똑바로 알고 계시오!”라고 호통을 치던 한덕수를 무엇으로 보겠냔 말이다.

게다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자 태세를 전환해 “어이쿠, 잘 모르셨나본데 내 고향이 호남이어요”라고 알랑거리는 자를 어떻게 받아들이겠나? 내가 아는 한 호남 민중들은 대부분 마음이 넓은 편이지만, 남도 특유의 한 성깔 하는 기질들이 있어 이런 얍삽한 자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자가 국민 통합을 우선시해야 하는 국무총리에 적격인가? 장담하는데 한덕수 씨가 국무총리가 되면 호남 민중들, 그리고 그 호남 민중들에게 마음의 빚을 지닌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할 것이다. 국민 통합? 진짜 밤송이 까고 자빠진 소리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덧붙이자. 앞에서 적은 김기만 전 사장의 여러 증언에 대해 한덕수 씨가 “나는 그런 적이 없다”고 길길이 뛸 가능성에 대해서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김기만 전 사장은 동아일보에서 나와 함께 일했던 선배였다. 그는 재직 시절 부당한 사주 권력에 맞선 용맹한 투사였으며, 누구보다 모범이 되는 진실한 기자였다. 그래서 나는 그를 믿는다. 나는 이번 일로 꽤 장시간 그와 통화했는데 그의 확신에 찬 목소리는 그의 기억들이 100% 진실임을 나에게 각인시켜줬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한덕수 씨, 만약 이 칼럼에서 다뤄진 당신의 고향 세탁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할 참이라면 언론중재위원회건 소송이건 뭐든지 당장 시작하라. 단, 나는 이 칼럼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는 데 나의 명예와 내 지갑 안에 든 3만 5,000원, 그리고 호주머니 안에 든 500원짜리 동전까지 모조리 걸겠다. 너님은 뭘 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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