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0일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합니다. 윤석열 정부 출범으로 그간 어렵게 진전시켜온 민주주의마저 퇴행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적지 않습니다. 벌써부터 인사와 정책에서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혐오와 차별의 언동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국외적으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기점으로 기존의 국제질서가 크게 변하면서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대선 이후 고민이 많을, 더 많은 민주주의와 근본적인 개혁을 바라는 이들에게 전하는 제언을 연재기고로 담았습니다. 노동, 기후, 젠더 등의 현장에서 뛰는 활동가와 정치, 경제, 사회에 걸친 전문가의 기고가 이어집니다. 이번 새로운 상상과 진보의 성장에 좋은 계기가 되길 기대합니다.
20대 대선 결과에 좌절했는가?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이번 선거에서 국민의힘 소속 당선자는 48.56%를 얻었지만,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노동당의 득표를 모두 합하면 50.38%로 절반을 넘었다. 역사적으로 노동계급은 숫자상 과반이 되어 본 적도 없으며 대부분 분열된 상태로 존재했다. 강력하고 통합된 노동운동세력을 보유한 스웨덴에서조차 사회민주당이 정권 확보를 위해 농민당이나 화이트칼라 계층과 연대한 이유이다. 그 연대가 영국 노동당의 신(新) 중간층과의 연대처럼 불안정한 경우 진보정당의 역할은 제한될 수 있다. 계급보다는 지역이, 세대가, 심지어는 젠더까지 정치적 균열이 점점 더 다원화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과반의 득표는 의미 있는 사회변화의 징후이다.
새 보수정부가 표를 얻지 못한 과반의 국민에게도 우호적인 정책을 펼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지금까지의 보수정부는 우편향된 사회를 볼모 삼아 정권을 잡는 순간부터 기업과 기득권의 입장만을 대변하며 폭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기업규제를 과감하게 풀겠다는 기조 하에 윤석열 당선자의 노동공약도 노동시간의 유연화, 임금체계의 개편 등 기존의 장시간 노동과 임금 불평등을 악화시킬 수 있는 내용이 대다수였다. 노동시장에서의 차별금지, 노동기본권의 확대와 단체교섭구조의 개선 등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기업 측의 입장에 동조하고 있다. 복지보다는 성장에, 확장재정보다는 재정준칙에 방점을 둔 사회정책도 이어지겠다. 그러나 장기화될 여소야대 국회로 인해 주요한 법·제도상의 개악은 어려울 것이다. 현재까지 당선자나 인수위가 보여준 바에 비추어 과반의 국민도 쉽게 비판적인 입장을 거두지 않으리라 예상된다. 초박빙이었던 이번 대선은 보수 정치의 문제점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진보의 새로운 전략을 고민해 볼 최소한도의 여지를 제공해 주었다.
진보의 전략을 구상하기 위한 두 가지 질문
진보의 전략을 구상하기 이전에 답해야 할 두 가지 질문이 있다.
무엇보다도, 진보세력이 얻은 총 득표의 거의 전부에 가까운 47.83%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 과연 진보인가? 이 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도 보수 정부처럼 폭주하지는 않았다는 점이 다를 뿐 우편향된 사회를 방패 삼아 개혁을 미루고 버려둔 것이 사실 아닌가? 맞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의 정당정치는 당원과 국민이 이끌어가는 것이다. 특히 이번 대선 후보였던 이재명의 노동 및 복지정책은 정의당 심상정 후보의 정책과 큰 틀에서 유사했으며, 적절한 요구와 보완을 통해 충분히 진보적인 정책으로 발전해 나아갈 가능성을 담고 있었다. 이번 대선을 통해 정치세력화하기 시작한 20대 여성을 포함한 진보적인 시민들이 더불어민주당을 보다 개혁적으로 변화시키고 더 진보적인 소수정당들이 나름의 전문성을 확장하면서 이들 간의 최소한도의 연대의 틀이라도 마련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진보정치는 분명히 희망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소수정당이 연대의 역량을 가지고 있는가? 소수정당 자체가 존립하기 어려운 척박한 정치환경이 이들의 활동의 폭을 심하게 축소하고 있는 만큼, 정치 개혁이 빨리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런 제도 개혁 전이라도, 아니 바로 그런 제도 개혁을 보다 전면적으로 이루어내기 위해서라도 범진보 정당들 사이의 전략적인 선거 연대나 정책 연대의 실험들을 시도해 보면 어떨까. 실제 소수정당 소속 정치인의 경우 거대 기득권 당으로 여겨지는 더불어민주당과의 협력 자체가 피해나 후퇴로 다가올 수도 있겠다. 더불어민주당이 너무나 미약한 소수정당과의 연대에 무관심한 것도 현실이다. 정당 밖에서 그저 관찰하고 있을 뿐인 필자가 알 수 없는 정당 간 긴장과 갈등이 존재할 수 있겠다는 점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놓친 기회들이 너무 아쉽다. 선거에서의 물리적인 단일화 같은 방식이 아니더라도, 유사한 노동·복지 정책의 장점을 국민에게 알릴 수 있는 발전적인 통합 토론을 이어나가는 것도 넓은 의미의 연대이다.
우리는 항상 법·제도가 만들어져야 실질적인 변화가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관행과 태도와 생각이 바뀔 때 그런 변화를 반영한 법과 제도가 뒤따르기도 한다. 여러 차원에서 연대하기 어렵다면 특정 정책에 한정해서 연대해도 된다. 그런 전략적 연대의 경험이 쌓인다면 더불어민주당 소속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정의당에서 노동부 장관이나 여성가족부 장관이 나오고, 기본소득당에서 복지부 장관이 나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번 지방선거부터라도 이런 연대의 시도가 있으면 좋겠다. 중앙정부에서 최저임금을 무력화시킨다 해도 지자체들이 생활임금운동을 지지한다면 보수정부가 당선된 피해가 줄어들 수 있다. 중앙정부에서 자산조사에 기반한 협소한 선별적 복지에 중점을 둔다 해도 지방정부에서 기본소득을 도입한다면 로봇 혁명 시기에 더 적합한 복지사회의 기반을 확장해 나갈 수 있다.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의 공통분모 찾아갈 수 있는가에 주목
칼 폴라니가 이야기한 이중의 운동처럼 극단적인 시장의 확장은 그것을 무마하고자 하는 반대의 운동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마구잡이로 진행 중인 분열과 혐오의 정치가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로 인해 넘어지고 다치게 된 피해자들이 힘을 모으게 되면 그런 정치는 결코 오랜 기간 지속하기 어렵다. 과반의 국민이 진보를 지지한 것을 확인했다면, 앞으로는 그런 목소리가 정치를 이끌어나갈 새로운 방법을 찾으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새롭게 정치세력화하기 시작한 여성운동과 전통적인 사회운동인 노동운동이 얼마나 공통분모를 찾아갈 수 있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노동에 대한 억압 모두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독립적인 내적 동력과 기제를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 두 운동 모두 보수의 분할 지배 정치 전략의 피해자인 동시에 폭발력 있는 진보의 담지자이며, 서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운동의 협력이 필요하다. 자본주의는 성중립적으로 보이지만, 극단적인 이윤의 추구로 인한 장시간 노동, 세수 부족, 돌봄 노동에 대한 무관심은 여성의 지위 향상을 구조적으로 제한한다. 여성을 노동시장에서 동등하게 활동할 수 있게 하는 복지서비스와 휴가제도는 노동운동과의 연대를 통해 더 용이하게 획득할 수 있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노동운동은 숫자상 사회의 과반이 되기 어렵다. 사회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지지는 그 자체로 큰 자산이며,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의 대다수가 여성인 만큼 여성 차별은 노동운동의 과제이기도 하다. 또한 여성운동이 지향하는 성평등한 복지국가로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노동시간을 줄이고 보다 인간적인 노동환경을 만든다는 점에서 노동운동의 이해와도 일치한다.
따라서, 차별금지법의 통과와 같은 실존적 인권 보호, 일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기본법을 포함한 기존 사회보장체제 밖의 국민에 대한 사회권 강화, 경제의 이중구조와 부와 소득의 극단적 양극화 방지, 여성의 유리천장 타파, 모든 조직에서의 모든 종류의 폭력 근절, 장애인의 이동권과 일할 수 있는 권리 보장, 산업재해 예방 강화, 환경 보호와 함께 하는 일자리 창출 등 우리 사회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은 물론, 모든 진보정당의 실질적 협력과 전략적 연대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는 것, 이것이 이번 대선 결과로 우려되는 노동 배제와 복지 후퇴를 막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대통령은 중요한 자리이다. 그러나 때로는, 함께 모여진 작은 목소리들, 미미한 변화의 누적이 장기적으로는 더 큰 변화를 불러오는 물꼬가 되기도 한다. 5년은,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