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노동자 오모씨는 철판을 옮기는 작업을 하던 중 크레인 오작동으로 공장 내 철제 기둥과 철판 사이에 끼어 숨졌다. 노후된 크레인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으면서 3톤 가량의 철제판이 멈춰야 할 곳에서 멈추지 않은 것이다. 현대중공업 창사 이래 472번째 죽음이었다.
참혹한 죽음 전, 위험 신호는 충분했다. 25년 전 만들어진 이 크레인은 사고가 나기 직전까지 잦은 오작동을 일으켰고, 노동자들은 수차례 제대로 된 점검과 수리를 요구했다고 노조는 전했다. 크레인 정비는 외부 업체가 아닌 현대중공업 자회사 모스의 하청업체가 맡았는데, 수리를 하더라도 고장은 반복됐다. '별다른 이상은 없다'는 허술한 점검 결과가 나온 뒤, 오씨는 크레인 고장으로 인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언제라도 사고가 날 수 있는, 그래서 내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위험한 작업을 거부할 수 있었다면 안타까운 472번째 죽음은 막을 수 있었을까. 법은 오씨에게 그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씨에게 그 권리는 너무 멀었다. 이는 작업중지권이 있어도 사실상 보장받지 못하는 모든 노동자가 처한 현실이기도 하다.
1995년 처음 보장된 노동자의 작업중지권 법은 강화됐지만, 현실은 여전히 멀었다
'위험한 상황에서는 일을 멈추고 대피할 수 있다.' 너무나도 당연한 노동자의 이 권리는 1995년부터 법으로 보장돼 왔다.
전면 개정 전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은 노동자가 위험한 상황에서 일을 멈추고 대피할 권리보다 '대피했을 때 지체없이 상급자에게 보고할 의무'를 더욱 강조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산안법에서 규정하는 의무의 주된 주체는 사업주기 때문에 노동자는 사업주의 조치에 따를 의무가 있는 위치로 서술하고 있는 탓이다.
하지만 고 김용균 씨 사망사고를 계기로 2019년 산안법이 전면 개정되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보다 명확히 보장하는 방향으로 진전됐다. "근로자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에는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다"는 조항(산안법 52조)을 신설하고, 이것이 노동자 권리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작업중지권 행사에 복잡한 절차가 있는 건 아니다. 노동자가 급박한 위험이 있다고 판단할 경우 일단 일을 멈추고 대피한 뒤, 그 사실을 관리감독자나 부서장에게 보고하면 된다. 보고받은 관리감독자 등은 안전과 관련한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법은 강화됐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랜 기간 노조에서 활동한 이들도 "실제로 작업중지권을 발동한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라고 입을 모았다. 산안법 전면 개정 후에도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은 여전히 법에만 있는 권리로 머물러 있다는 얘기다. '노동자의 실질적인 작업중지권을 보장하라.' 노동계의 요구는 벌써 수년째 반복되고 있다.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이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작업중지권 행사 '이후'에 벌어지는 일 때문이다. 위험한 상황이라고 판단해 일을 멈추고 대피했다가, 자칫 사업주로부터 징계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당하기 일쑤기 때문이다. 건설 현장의 일용직 노동자의 경우 작업중지에 따른 임금 손실을 보전해주지 않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 일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자신의 권리를 행사했을 뿐인데 불이익도, 손해도 노동자 스스로 감수해야 할 몫으로 남아있다. 사업주는 노동자 판단에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면 작업중지를 이유로 해고 등 불리한 처우를 해서는 안 된다고 산안법에 명시돼 있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 않은 것이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이태의 노동안전보건위원장은 '민중의소리'와의 통화에서 작업중지권이 유명무실화된 배경을 지적했다. 이 위원장은 "작업중지로 인한 손해를 노동자 당사자에게 물리거나 시키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재계약을 하지 않아 일자리를 잃게 되는 일도 있다"며 "작업중지권이 산안법에 명시돼 있어도 노동자의 신변을 보호해주거나 급여를 보조해주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통계 수치로도 확인된다. 민주노총 산하 전국건설노조가 올해 1월 17일부터 이틀간 조합원 7천57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위험작업에 대해 거부하고 있다'는 응답은 44.3%, '위험해도 그냥 한다'는 응답은 55.7%였다. 중대재해가 주로 발생하는 건설 현장에서도 작업중지권이 활발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위험작업에 대해 거부하면 받아들여지나'라는 질문에는 '무시한다'는 답변이 37.9%에 달했다. 이러한 문제 인식에서 건설노조는 지난 11일부터 자체적으로 '작업중지권 신고센터(02-848-9191)'를 개설해 운영하는 중이다. 개인 노동자가 모든 위험을 떠안고 작업중지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니 노조 차원에서 함께 대응하겠다는 취지다.
건설노조 전재희 노동안전실장은 통화에서 "건설 노동자의 경우에는 고용이 불안하다 보니 작업중지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상황이고, 또 건설 현장은 연계 공정이어서 한 작업이 중지되면 다른 작업도 다 일을 못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며 "이를 노동자 혼자 감당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전 실장은 "법으로는 작업중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돼 있지만, 사업주는 이 법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고, 법원에서 보수적인 판결을 해버리면 법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라며 "결국은 사업주와 사회 환경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위험한 상황 대피한 노동자들에게 징계와 손해배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2016년 충북 청주의 한 공장에서 벌어진 사건은 노동계에서 유명 일화처럼 전해지고 있다. 인근 공장에서 화학물질 유출 사고가 발생하자 조합원들을 대피시킨 노조 지회장 A씨의 얘기다. A씨는 회사로부터 작업장 이탈 및 조합원에게 이탈을 지시한 행위 등으로 회사 징계위원회에 회부됐고, 결국 정직 2개월을 처분받았다.
A씨는 반발했다. 그는 자신은 법에 정해진 정당한 작업중지권을 사용한 것이고, 조합원들에게도 작업중지권 사용을 권유한 것이라고 항변하며, 법원에 정직 처분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법원은 당시 소방본부와 회사의 대응을 종합해 볼 때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 섣불리 작업을 중지해 회사 업무에 차질을 빚었다는 이유에서 A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작업중지권을 행사하면 이렇게 된다더라.' A씨의 사례는 지역을 넘어, 업종을 넘어 회자되고 있었다.
박주영 노무사는 '민중의소리'와의 통화에서 "판례를 보면 법원 역시 작업중지 요건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등 소극적으로 판단해 왔다"며 "(당시 상황이) 얼마나 위험했는지는 경우에 따라 다른데, 그동안 법원에서는 (노동자가 주장하는) 위험 상황을 잘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고의 위험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노동자가 작업중지권을 행사하기가 어려운 구조"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법원의 소극적인 판단도 노동자가 작업중지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배경 중 하나로 꼽힌다. 노동자는 위험한 상황이라고 판단해 작업중지를 했지만, 회사에서는 손해를 입었다며 징계하거나 손해배상 청구하고, 법원은 작업중지 요건을 협소하고 엄격하게 해석하면서 사측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해당 사례는 산안법이 개정되기 전의 일이고, 현행법에 따른 법원의 판단은 '급박한 위험'에 대한 노동자의 판단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달라질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작업중지권을 행사한 노동자는 법원 판결이 나기까지 최소 수개월, 길게는 수년이라는 혹독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이유도 대지 않은 채 삭제한 사업주 처벌 조항, 국회와 정부도 실효성 없는 작업중지권 만든 공범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을 보장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 기회를 버린 건 정치권이었다. 당초 정부가 낸 산안법 전면개정안에는 사업주가 근로자의 작업중지를 이유로 불이익을 줄 경우, 징역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벌칙 조항이 있었다. "근로자의 작업중지권 행사를 실효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의원들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해당 법안을 심의한 지난 2018년 환경노동위원회 환경노동소위원회에서 당시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신보라 의원은 "근로자가 이것(작업중지권)을 남발할 경우"를 방지해야 하지 않느냐는 취지로 정부에 따졌다.
그리고 그다음 소위 회의에서 해당 벌칙 조항이 사라졌다. 여야가 합의했다는 얘기 외에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당시 소위원장이었던 자유한국당 임이자 의원은 "'1년 이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 벌금', 이것을 삭제하기로 합의하지 않았냐"며 "이것은 얘기를 다 끝내 가지고 (회의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기록이 남는 소위 회의를 하기 전, 여야가 '밀실' 합의했다는 것이다.
'작업중지를 했다가 해고나 불리한 처우를 했을 땐 어떻게 하는 것이냐'는 당연한 질문이 뒤따랐지만, 정부 역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시 임서정 고용노동부 차관은 "일반적으로 부당해고나 부당징계 형태로 가면 될 것 같다"며 "처벌 규정만 안 넣으면 되겠다"고 말했다.
그동안 작업중지권의 실효성이 보장되지 않아 벌칙 조항을 만든 것인데, 작업중지권 행사로 불리한 처우를 받으면 이전처럼 소송 등 다른 구제 절차를 밟으면 된다는 논리다. 그렇게 국회와 정부도 실효성 없는 노동자 작업중지권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실질적인 작업중지권 보장을 위해선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을 온전히 보장하기 위해서는 작업중지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노동계는 한목소리로 요구한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손진우 활동가는 "정부와 사측이 노동자에게 작업중지권을 행사해도 괜찮다는 신호를 아주 분명히 보여줘야 한다"며 "작업중지권을 이유로 불이익을 주지 않을 테니 위험한 상황에서는 일단 대피하라는 얘기를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민주노총은 산안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위험작업 중지 노동자에 대한 불이익 처우 시 형사처벌 도입 ▲작업중지에 따른 임금 손실, 원하청 계약의 손실 보장 등을 법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은 4월을 '노동자 건강권 쟁취 투쟁의 달'로 선포하고, 작업중지권 실질적 보장을 촉구하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오는 28일에는 서울 고용노동청 앞에서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위한 결의대회를 진행할 예정이다.
민주노총 이태의 노동안전보건위원장은 "현재의 산안법은 노동자가 위험한 작업을 거부할 수 있다고만 돼 있을 뿐, 그 결과의 책임은 노동자에게 묻고 있는 것"이라며 "작업중지권을 행사했어도 불이익을 당하는 게 아니라 당연한 권리로 인정해주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아가 이 위원장은 작업중지권 발동 전, 정기적으로 위험한 작업 환경을 조사하는 위험성 평가 등에 노동자의 실질적인 참여가 보장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노동자의 시각으로 안전하지 않은 작업 환경을 미리 지적하고, 사측이 이를 개선하는 과정이 선행돼야 실질적인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 산안법 전면 개정과 함께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면서 삼성물산, HDC현대산업개발, 포스코건설 등 일부 대기업은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을 전면 보장한다는 선언을 잇따라 내놓고 있지만, 보여주기식 대책으로 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처벌을 피하기 위해 안전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한 노림수가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 위원장은 "작업중지권 보장과 함께 위험성 평가 등에 노동자가 참여하는 방안도 병행해야 한다"며 "위험한 시설의 개선이나 부족한 인원의 증원에 대한 예산이 반영돼야 실제로 작업중지권을 보장한다는 기업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