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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윤석열의 시대, 고난이 심할수록 내 가슴은 뛴다

마침내 윤석열 정권이 출범한다. 내가 ‘마침내’라는 부사를 사용한 이유는 최근 몇 개월 동안 윤석열 예비 정권이 한 짓을 보면 집권 3~4년차 같은 피로감이 몰려오는데 정작 이 정권이 아직 출범도 안 했다는 놀라운 사실 때문이다. 시간에 슬로우 모션을 걸었나? 이것도 재주라면 참 놀라운 재주다.

몇몇 지인들이 “앞으로 5년을 어떻게 버텨야 하냐?”라며 나에게 묻는다. 고백컨대 나에게도 앞으로 5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는 지난 2개월 동안 중요한 화두였다.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절망스런 민중들의 마음을 달랠 그 어떤 미사여구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윤석열 정권 출범이라는 이 거대한 사건을 앞두고 뭔가 마음을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며칠의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나의 결론은 이것이다. “별 수 있나? 그냥 열심히 싸우는 거지 뭐.”

진보는 늘 어려웠다

행동경제학에는 현상유지 편향이라는 이론이 있다. 진보와 보수의 길이 눈앞에 놓여 있을 때 인간은 대체적으로 보수의 길을 선택한다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보자. 사바나의 연약한 동물이었던 인류는 어떻게든 포식자들 사이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늘 물을 마시던 곳에서 물을 마시고, 늘 과일을 따던 곳에서 과일을 따는 것이다.

그런데 무리 중 누군가가 “우리 저쪽 산 너머로 한 번 가보자. 거기에는 물이 더 맑고, 과일도 더 달콤할지 몰라”라고 제안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부족원 대부분은 이 제안에 단호히 반대한다. 왜냐? 지금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7일 경기 시흥시 삼미시장 앞 유세 현장에서 어퍼컷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2022.03.07 ⓒ뉴시스

물론 산 너머가 더 살기 좋을 수 있다. 하지만 그곳이 사자의 영역일 수도 있다. 위험과 기회가 공존할 때, 인류의 상당수는 위험을 피하는 선택을 한다. 그래야 연약한 동물인 인류가 생존 확률을 더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이런 성향이 나타나는 이유는 위협을 기회보다 더 절박하다고 보는 생물이 생존할 확률이 더 높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즉 변화를 추구해 얻는 손실보다 그냥 살던 대로 살아서 얻는 안전함이 생존에 훨씬 유용했다는 이야기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진보는 늘 어려웠다. 자기 것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새로운 것을 찾아 도전하려는 사람이 충돌하면 대부분 전자가 이긴다. 사람들은 도전하려는 자를 무모하다고 조롱한다. 지금 이대로가 더 편하지 않냐고, 왜 나서서 굳이 세상을 바꾸려 하냐고 비난한다.

우리 속담에 “강아지도 자기 집 앞마당에서 싸우면 절반은 이기고 들어간다”는 말이 바로 그런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강아지가 자기 집 앞에서 싸우면 평소보다 훨씬 강해진다. 왜냐? 자기 집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보금자리를 지키는 것은 동물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반면 남의 집을 침공한 강아지는 자기 집을 지키는 강아지에 비해 절박하지 않다. 이기면 새 영역을 얻어서 기쁘긴 한데, 그렇다고 그 기쁨을 위해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다.

만약 둘의 전력이 비슷하다면 이 싸움은 하나마나다. 절박한 쪽이 그렇지 않은 쪽에 비해 훨씬 강한 전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 앨콕(John Alcock) 같은 행동생태학자는 “어떤 영역을 점령한 동물이 경쟁자의 도전을 받으면, 거의 항상 주인이 이긴다. 그것도 대개 몇 초 안에 이긴다”라는 유명한 정리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것도 현상유지 편향의 일종이다. 안 그래도 뭔가에 도전하려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그 도전에 최선을 다 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반면 지키려는 자는 다르다. 지키지 못하면 내 것을 잃기에 거의 전력을 다해 지금의 세상을 사수하려 한다. 역사적으로 보수가 진보보다 늘 강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진보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현상유지 편향이 만연한 속에서도 인류는 끝내 진보를 이뤄냈다는 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두려워함에도 그 속에서 진보를 누구보다 절박하게 여기는 송곳 같은 돌연변이들이 꼭 존재하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 돌연변이들은 때로는 변화를 위해 목숨을 건다. 고대 노예제 시절에도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해 노예 해방을 부르짖는 송곳 같은 전사가 꼭 등장을 한다. 중세 봉건제 시절, 절대 왕권의 총칼 앞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노라”며 새 시대의 희망을 부르짖는 돌연변이가 반드시 나타난다. 프랑스 대혁명이 그랬고, 동학 혁명이 그랬다.

이게 쉬운 일일 리가 없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인간은 현상유지를 더 선호하는 동물이다. 그 속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자신을 매우 불편하게 만들어야 하고, 때로는 많은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역사가 끊임없이 진보해 온 것을 보면 인류는 이 송곳 같은 돌연변이들의 삶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앞으로 50년 같은 5년을 보내야 한다. 이 속에서 우리 진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감히 이 거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을 만한 식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내가 딱 하나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잘 몰라도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는 분명히 안다. “그래, 세상이 다 그렇지 뭐”라며 푸념하는 것,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절대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철학자 니체의 말 중 내가 무척 좋아하는 것이 있다.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 풍파 없는 항해, 얼마나 단조로운가? 고난이 심할수록 내 가슴은 뛴다.”

윤석열 정권의 출범은 싸움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그 길은 당연히 어렵겠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는 현상유지 편향에서 벗어나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송곳 같은 돌연변이여야 한다.

험한 길은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 윤석열 정권은 역사의 진보를 꿈꾸는 이들에게 당연히 고난이겠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고난은 우리의 벗이기도 하다. 고난이 심할수록, 내 가슴은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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