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여러 국가에서 폐해가 드러난 전력 판매 시장 개방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전력 판매 시장에 민간 기업 참여를 허용한다는 계획이다. 앞서 시장을 개방한 국가에서는 1천개 이상의 요금제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소비자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경쟁 도입에 따른 전기요금 인하 효과도 불투명하다.
13일 전력 업계에 따르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국정과제에는 전력 판매 시장 계획이 담겼다. 에너지 관련 과제로 ‘경쟁과 시장원칙에 기반한 전력시장 구축‘을 제시했다. 지난달 에너지 정책 방향에서도 ‘한국전력 독점 판매 구조를 점진적으로 개방‘하겠다고 밝혔다.
정부가 개방한다는 전력 판매 시장은 한전과 시민·기업이 거래하는 소매 시장을 이르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전은 도매 시장인 전력거래소에서 발전사로부터 산 전기를 시민·기업에 판매한다. 인수위가 ‘한전 독점 판매 구조’라고 표현한 배경이다. 시장 개방은 한전뿐 아니라 민간 기업도 전력거래소에서 전기를 매입해 되팔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민간 기업에게 전력 판매 시장은 적은 투자 비용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신산업이다. 전력 산업은 ‘발전-송·배전-판매’ 구조로 이뤄진다. 발전사가 만든 전기는 한전이 구축한 송·배전망을 타고 주택·공장·빌딩 등 수요처에 들어간다. 송·배전망은 설비 투자에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지만, 수익성은 크지 않아 재계의 개방 요구가 크지 않다. 민간 기업은 전력 유통 길목에서 통행세를 받는 셈이다.
소비자 선택권 확대의 실체
전력 판매 시장이 개방되면 여러 민간 기업이 각종 요금제를 만들어 경쟁하게 된다. 시장 개방을 지지하는 쪽은 소비자 선택권이 확대된다고 주장한다.
일본 2위 통신사 KDDI도 전기요금 판매에 나서면서 ‘현명하게 선택해 비용 절감’이라는 홍보 문구를 내걸었다. 일본은 주요국 가운데 가장 최근인 지난 2016년 전력 판매 시장을 개방했다. 전력 판매 시장을 개방하겠다는 새 정부가 참고할만한 사례다.
일본 경제산업성 자원에너지청 자료를 보면, 2020년 기준 670여 개 기업이 1,300개 이상의 요금제를 판매한 것으로 집계됐다.
전력 판매 시장을 전면 개방한 이후 민간 기업이 대거 뛰어들었다. 기존에는 10개의 발전사만 전기요금제를 팔 수 있었다. 이들 요금제는 사실상 정부가 조정하는 구조였다.
요금제가 우후죽순으로 늘자 전기요금제를 비교해주는 서비스까지 등장했다. 셀렉트라(Selectra)는 사용자 거주지와 전력 사용량 등에 따라 최적의 요금제를 찾아준다. 현재 가입한 요금제보다 싼 요금제를 나열하는 방식이다.
홈페이지에서 연간 전력 사용량을 입력한다. 가구 인원과 사용하는 가전(세탁기·건조기·에어컨 등)을 설정하면 추정치도 알려준다. 자주 이용하는 시간대와 거실과 방 개수를 선택한다.
연간 2,500kWh 정도를 사용하며 도쿄전력 요금제에 가입한 2인 가구를 가정해 검색해보니 요금제가 125개 뜬다.
상세정보를 누르니 머리가 어지럽다. A 회사 요금제는 1kWh당 가격이 전력 사용량 구간별로 달라진다. 0~120kWh 구간은 19엔, 120~300kWh 구간은 25엔이다. B 회사 요금제는 월 200kWh 정액제로, 기본요금이 정해져 있다. 정량을 넘기면 1kWh당 추가 요금이 붙는다. 정량을 다 쓰지 못하면 이월할인이 적용된다. B 회사는 100kWh 정액제 요금도 판다. C 회사 요금제는 별도 조건 없이 1kWh당 가격이 책정돼 있다. 다른 회사는 가스 요금제나 통신 요금제를 동시에 가입하면 할인하는 요금제도 판다.
전기를 얼마나 쓰느냐에 따라 요금이 달라져 쉽게 유불리를 파악할 수가 없다. ‘현명하게 선택해 비용 절감’은 멀게 느껴진다.
선택지가 많으면 혼란스럽다
다양한 선택지는 소비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곤혹독점(Confusopoly)’은 기업이 요금체계를 의도적으로 알기 어렵게 해 소비자가 혼란을 겪는 현상을 이른다.
일본에서는 전기요금제의 복잡성을 곤혹독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노무라 무네노 간사이대학교 경제학부 교수와 쿠사나기 신이치 효고현립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는 일본 전력 판매 시장 개방 직후인 2017년 낸 ‘전력·가스 자유화의 진실’에서 곤혹독점을 언급하며, 다양한 전기요금이 반드시 소비자후생에 긍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들 교수는 일본에 앞서 전력 판매 시장을 개방한 영국을 사례로 들었다. 영국은 1999년 전력 판매 시장을 완전 개방했다. 요금이 복잡해져 비교하기 어렵다는 게 소비자들 반응이다. 전기요금제 비교 사이트 유스위치(uSwitch)의 2013년 조사 결과, 응답자 절반은 전력 판매 기업를 신뢰하지 않다고 답했다. 불신 주요 요인은 낮은 서비스 수준(50%)과 개방성·투명성 결여(37%) 등이었다. 다른 조사에서는 응답자 35%가 전기요금 청구서를 이해하지 못하며, 37%는 지불한 금액을 모른다고 답했다. 요금제가 난립하는 가운데 소비자가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영국에서는 복잡한 요금 체계를 바로잡기 위해 정부가 나섰다. 영국 에너지 규제 기관 오프젬(Ofgem)은 2013년부터 ‘더 단순하고 명확하며 공정한(simpler, clearer and fairer) 에너지 시장을 위한 전력 판매 기업의 행동 기준’을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기업별로 핵심 요금제를 4개까지만 제공하도록 제한했다. 소비자에게 정보를 제공할 때는 오해의 소지가 없어야 하고, 중요한 정보가 적절하게 부각돼야 한다. 판매 중단된 요금제에 가입한 소비자에 대해서는 더 저렴한 요금제로 변경하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기업 개선은 더디다. 노무라·쿠사나기 교수는 2016년 영국 전력 요금제를 보면 여전히 조건이 다양해 비교가 어렵다고 지적한다. 조기 계약 해지 수수료, 월간 추가 포인트, 연간 할인 등 조건이 붙는다. 영국 상황은 전력 시장 개방이 가져올 정부와 기업 간 지난한 조정 과정을 보여준다.
가격경쟁 효과는 한때
민간 기업이 전력 판매 시장에 진입하면 가격경쟁으로 요금이 떨어질 거라는 주장도 현실과 거리가 멀다.
전기요금은 국제 유가 영향을 받는다. 유가가 오르면 전기 판매 기업이 발전사에 지급하는 도매가격이 상승해 전기요금도 올라가게 된다. 원가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전기요금을 올리지 않는 전기 판매 기업은 수익성에 타격을 받는다.
영국 전기요금은 2000년대 초까지는 내려가는 경향이 있었지만, 2004년 이후에는 가격 인상이 이어지고 있다. 오프젬에 따르면, 2009~2012년 듀얼 퓨얼(가스와 전기를 한 회사로부터 공급받는 요금제) 연간 평균 요금은 1,095파운드에서 1,232파운드로 13% 올랐다. 이후 2013~2014년에는 평균 7% 상승했다.
원가 부담이 적은 저유가 시기에 전력 판매 기업이 요금을 낮춘다는 보장도 없다. 영국 전력 판매 기업은 이윤을 많이 남기기 위해 요금을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연간 평균 요금에서 도매가격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9년 68%(646파운드)에서 2014년 50%(612파운드)로 줄었다. 같은 기간 주요 6대 전력 판매 기업 당기순이익은 21.7% 늘었다. 특히 가정용 부문은 2억 3,300만파운드에서 11억 1,900만파운드로 4배 이상 뛰었다.
전력 판매 시장 개방 직후 전기요금이 일시적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가는 현상은 세계적으로 나타난다. 일본은 가정용 요금이 2010년 1kWh당 20.4엔에서 2018년 25엔으로 23% 상승했다. 2015년 24.2엔에서 2016년 22.4엔으로 떨어졌지만, 이듬해 바로 23.7엔으로 올랐다.
미국도 전력 시장 개방이 요금 인상으로 이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미국전력회사단체(APPA)에 따르면, 전력 시장을 개방하지 않은 주보다 개방한 주의 요금이 더 비쌌다. 그 격차는 1998년 1kWh당 2.5센트에서 2013년 3센트로 벌어졌다.
독일 전기요금은 2008~2012년 1.2배 올랐다. 같은 기간 도매가격은 50% 감소했다.
송재도 전남대 경영대학 경영학부 교수는 “민간 기업의 이윤 극대화 논리에 따라 마진이 증가하고 전기요금이 상승하는 현상이 여러 국가에서 나타났다”며 “경쟁이 요금을 낮춘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는 쪽에 최근 힘이 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 참여 예상 1순위는 통신사
한국 전력 판매 시장이 개방될 경우, 참여가 예상되는 기업으로 SK텔레콤·KT·LG유플러스 등 통신 3사가 언급된다.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판매망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장 참여가 용이하다. 일본의 2·3위 통신사인 KDDI와 소프트뱅크를 비롯한 여러 국가 통신사가 전기요금제를 팔고 있다. 이들 기업은 자사 통신 서비스와 결합한 전기요금제를 제공한다.
피쳐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넘어가고 LTE와 5G를 거치면서, 통신요금에 대한 소비자 불만이 끊이지 않았다. 데이터 제공량이 아주 적거나 필요 이상으로 많은 요금제만 팔고, 소비자 수요가 많은 구간의 요금제는 만들지 않아 비판이 제기된다. 비싼 요금제는 1MB당 단가가 싸고, 저렴한 요금제는 데이터 단가를 비싸게 매겨 형평성 논란도 인다. ‘쓰는 만큼 내는’ 간단명료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구조다.
통신 산업도 처음에는 국영으로 시작했다. 1998년 민간 기업 참여로 개방되고, 2002년 한국통신(KT) 지분을 매각해 민영화했다.
통신 시장 개방 당시 경쟁을 통한 가격 인하와 신기술 도입 등 장밋빛 전망이 나왔다. 기대와 달리 공공성이 저해되고 대기업 배를 불리는 결과를 낳았다. 가계통신비 인하가 대통령 공약으로 나올 만큼, 많은 국민이 비싼 통신 요금에 불만을 품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 사이 통신사는 매년 수조원대 영업이익을 올렸다.
도시가스사도 전력 판매 시장 참여가 전망된다. 일부 외국 사례와 같이 전기와 가스를 결합한 요금제를 판매하는 형태가 될 수 있다. 도시가스 시장도 SK 계열사가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SK E&S는 전국에 8개 자회사를 두고 사업을 하는데, 이들 점유율은 22.5%에 달한다.
민간 발전사가 직접 판매까지 할 가능성도 있다. 영국에서는 발전사가 전력 판매 시장의 주요 사업자로 활동하고 있다.
통신사·도시가스사·발전사는 대기업이 주를 이룬다. 전기라는 공공재에 대기업의 기업 논리가 작용하면 소비자 부담이 가중될 심산이 크다.
구준모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기획실장은 “민간 기업은 본성상 수익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요금을 부풀리려고 할 것”이라며 “통신 산업에서도 1위 사업자가 요금제에 대해 정부 허가를 받아야 하지만, 영업비밀을 이유로 원가구조를 공개하지 않아 사업 운영 결정권이 민간에 넘어간 상황”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