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발표한 전력 판매 시장 개방을 두고 민영화냐, 아니냐 논란이 일고 있다. 새 정부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한전 독점’을 깨고, ‘시장원칙’을 도입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민영화를 ‘민간에 공기업을 팔아넘긴다’는 단편적인 뜻으로 보면, 시장 개방과는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실제와 동떨어진 얘기다. 새 정부는 민영화 의미를 과도하게 축소하면서 혼란을 주고 있다.
시장 개방은 민영화로 귀결된다. 전력 산업에서 판매 시장 개방은 민영화로 가는 핵심 고리다. 판매 시장 개방을 위해서는 산업 전반에서 걸쳐 정부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 한국전력이 공기업으로서 역할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민영화와 다를 바가 없다.
역대 정부의 전력 시장 개방은 1990년대 후반 세워진 민영화 로드맵에 기초한다. 전국민적 반발과 정치적인 여건 변화로 중단되기도 했으나, 후임 정부는 전임 정부가 마련한 토대 위에서 순차적으로 전력 시장 개방을 추진했다. 새 정부도 그 연장선에서, 멈췄던 로드맵에 다시 박차를 가하려는 것이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하에서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바람으로 공기업 민영화 압박이 가해졌다. 경쟁체제를 도입해 효율성을 제고해야 한다는 게 핵심 근거였다. 발전-송·배전-판매 기능이 통합된 공기업 체제에서 각 부문을 민간에 개방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김대중 정부는 1999년 전력산업구조개편안을 확정한다. 전력 시장을 발전-송·배전-판매 순으로 점차 개방을 확대하는 방안이 담겼다.
민영화를 하려면 우선 한전을 사업 부문별로 쪼개야 한다. 전력 산업 통합 체계의 한전은 대기업도 살 수 없을 만큼 규모가 크다. 가장 먼저 발전 부문이 다른 사업과 분리됐다. 발전 부문만으로도 규모가 커, 매각하기 적정한 규모의 여러 자회사로 나누어졌다. 2000년 한전 발전 부문이 6개 발전자회사로 분할된 배경이다.
이어 민간 기업도 발전사를 운영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줬다. 이때부터 한전은 직접 전력을 생산하지 않고, 자회사와 민간 기업으로부터 구입해오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시도한 배전 분할은 노동계와 시민사회 반발에 부딪혀 무산됐다.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는 전압을 조정하는 변전소를 거쳐 각 수용처에 들어간다. 변전소와 수용처를 연결하는 게 배전망이다. 망 시장을 개방해 민간 투자를 촉진해야 한다는 게 시장주의 진영 주장이었다. 앞서 이뤄진 발전 시장 개방과 같이 우선 한전의 배전 부문을 자회사로 분리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전국전력노동조합은 배전 분할이 민영화 단초라는 점을 지적하며, 공공성 훼손을 이유로 반대했다. 배전 부문이 민영화돼 시장 논리에 지배되면, 지역 격차가 발생한다고 우려했다. 민간 기업은 인구가 적어 수익성이 나지 않는 농어촌 지역과 산간오지에는 배전망을 구축하지 않을 심산이 컸다. 소외 지역 주민들은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지 못할 뿐 아니라, 망 이용료에 있어서도 차별받게 된다.
대도시 지역을 포함해 전국적인 망 이용료 인상 가능성도 제기됐다. 배전 사업은 대규모 투자가 수반돼 자본력을 갖춘 일부 대기업만 진입할 수 있다. 민영화가 진행되면서 일부 대기업의 독점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때가 되면 대기업이 망 이용료를 올려 폭리를 취해도 정부가 제어하기 어려워진다.
민간 기업 간 배전망을 공유하지 않아 중복투자 등 비효율성이 발생할 우려도 있다. 현재 통신 3사가 자사 기지국 사용을 다른 기업 가입자에게 허용하지 않는 현상이 우려를 방증한다.
대규모 시위를 이어가던 노조는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기로 한다. 정부·노조·중립 인사 6명으로 배전 분할 검토를 위한 공동연구단이 꾸려졌다. 2004년 배전 분할은 편익보다 위험이 크다는 결론이 나오면서 일단락됐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전력 민영화가 배전에서 판매 부분으로 넘어간다. 2008년 ‘공공부문 선진화 정책’에서 한전 판매 부문을 독립사업부로 개편하는 방안이 발표된다.
전력노조가 전면 투쟁을 선포한 가운데 광우병 파동이 겹치면서 판매 시장 개방은 추진 동력을 잃었다.
박근혜 정부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2014년 산업부가 발주해 에너지경제연구원이 수행한 ‘전력산업 발전방안’ 보고서에 판매 시장 구상이 담겼다. 민간 기업 참여를 허용해 한전과 경쟁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2016년 산업부가 판매 시장 개방 로드맵을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대통령 탄핵 국면을 맞으면서 무산된다.
시장 개방은 정부 통제 기능 무력화 초래
전력 소매 시장 개방은 도매 시장 개편과 연계된다. 박근혜 정부 ‘전력산업 발전방안’ 보고서에도 도매 거래에서 정부 규제를 걷어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전력거래소에서 이뤄지는 도매 거래는 경쟁보다 정부 규제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한다. 도매가격이 규제에 묶여있으면 소매 시장도 경직돼 경쟁 활성화가 제한된다는 지적이다.
새 정부의 전력 시장 개방 계획도 소매 시장뿐 아니라 도매 시장을 포괄한다. 인수위는 ‘전력구매계약(PPA) 허용범위 확대 등을 통해’ 판매 시장을 점진적으로 개방하겠다고 밝혔다. PPA는 전력 판매 기업과 발전사 간 직접거래를 이른다. 현재 도매 거래는 전력거래소에서 이뤄진다. 도매가격은 경쟁보다 정부 규제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한다. PPA를 통한 도매 거래가 활성화하면, 그만큼 정부 통제력이 약화된다.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소매 시장 자유화는 도매 시장 자유화로 이어진다”며 “소매 시장과 도매 시장이 완전 자유화되면 공기업을 통한 정부의 시장 통제 기능이 상실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공기업 존재 의미가 사라진다는 건 민영화와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한국이 PPA를 도입한 건 지난해 10월이다. PPA 허용 범위는 재생에너지로 제한한다. 기업의 재생에너지 사용을 활성화한다는 취지다. PPA를 도입한 일부 국가에서도 재생에너지로 국한된다.
활용은 저조하다. 제도 시행 반년만인 지난 3월에야 첫 계약이 체결됐다. 아모레퍼시픽이 SK E&S로부터 재생에너지 전력을 산다. 비누와 치약 등 생활용품을 생산하는 아모레퍼시픽 대전 사업장은 올해 4분기부터 20년간 SK E&S 재생에너지 전력을 공급받는다.
기업이 PPA에 나서지 않는 건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서다. 한전의 값싼 전기를 받는 편이 유리하다. 한전의 송·배전망 사용료에 대한 산전 방식 등 불명확 부분도 남아있다.
인수위가 언급한 PPA 허용 범위 확대의 구체적인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재생에너지뿐 아니라 원자력, 석탄, LNG 등 다른 발전원도 허용하는 것 아니냐는 추측도 제기됐으나, 지난 9일 이창양 산업부 장관 후보자는 “재생에너지만 그런 (PPA 확대) 범주에 속하고, 나머지 발전원에 대해서는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PPA 활성화를 지원한다는 의미일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구체적인 지원 방식은 미지수다.
무엇보다 재생에너지 발전 단가 내려가야 한다. 한국은 재생에너지 발전 단가가 다른 발전원보다 비싸다.
정부가 PPA 확산을 추진하는 와중에 재생에너지 발전 단가가 내려가면 어떻게 될까. PPA를 둘러싼 우려가 제기되는 지점이다.
전력 생산 원가(발전 단가)는 발전원에 따라 달라진다. 이번달 평균 연료비 단가는 원자력(6.36원)-석탄(101.38원)-LNG(145.87원)-유류(336.5원) 순으로 저렴하다. 연료비 단가가 낮을수록 발전 단가도 싸다.
전력거래소는 하루 전 예측한 전력 수요량을 기반으로 발전사로부터 공급 입찰을 받는다. 발전 단가가 싼 발전소부터 입찰을 받아준다. 원자력과 석탄 발전으로 예측 수요량이 채워지지 않을 때 LNG와 유류 발전소로부터 전력을 공급받는다.
발전원마다 발전 단가가 다르지만, 한전은 가장 비싼 발전소의 발전 단가를 모든 발전사에 적용해준다. 이를 계통한계가격결정(SMP)라고 한다.
주요 선진국처럼 재생에너지가 다른 발전원보다 싸지면, 기업이 PPA를 통해 싼 전력을 선점하게 된다. 재생에너지 사업자는 구매력이 있는 기업에 전력을 팔아 사업 안전성을 확보 수 있고, 기업은 전력을 싸게 조달받을 수 있다.
피해는 일반 국민에게 전가된다. 저렴한 재생에너지는 PPA로 빠져나가고 전력거래소에는 비싼 전력만 남는다. 한전이 도매 시장에서 전력을 구입하는 비용이 커진다. 공기업 경영 악화는 그 자체로 부정적이다. 한전 부담이 전기요금 인상 요인으로 작용할 여지도 있다.
구준모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기획실장은 “미국에서도 PPA 도입하면 일반 국민의 요금이 인상되는 등 형평성이 훼손될 것을 우려해 버지니아주가 PPA를 불허한 사례가 있다”며 “새 정부는 실효성도 없는 PPA 확대를 지렛대로 전력 시장 개방을 가속화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민영화 아닌 통합 체계로 에너지전환 대응해야
전력 판매 시장 개방을 반대하는 쪽에서도 산업 구조 개편 목소리가 나온다. 민영화가 아니라 통합 체계가 제시된다.
민영화든 통합 체계든 문제 인식은 같다. 전력 산업은 탄소중립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직면했다. 전력 발전량을 줄여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공급 측면에서는 전력 수요 예측 정확성을 높여야 한다. 현재 발전사는 예상 수요보다 15% 정도 더 전력을 생산한다. 전력거래소가 수요를 예측해 발전사로부터 공급 입찰을 받는다. 수요가 예상보다 늘어나거나 공급에 차질이 빚어질 경우를 대비해 예비율을 둔다. 에너지저장배터리(ESS)에 담지 못한 전력은 사용되지 못하고 버려진다.
실시간 수요 예측이 가능해지면 잉여 전력을 최소화할 수 있다. 스마트그리드는 전력망에 ICT 기술을 접목해, 공급자와 수요자가 실시간으로 정보를 교환하는 개념이다. 가령 초 여름 이른 더위가 찾아와 에어컨 사용 급증으로 수요가 예측치를 초과해도, 발전사가 빠르게 수요량에 맞춰 전력 생산을 늘릴 수 있다. 수요가 낮을 때도 대응 속도를 높여 필요한 만큼만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
수요 측면에서 전력 소비를 절감해야 한다는 과제도 있다. 이른바 수요 관리다. 스마트그리드 일환으로 스마트 계량기(AMI) 보급이 추진 중이다. AMI는 전력 사용 데이터를 실시간 소비자에게 알려줘 자발적인 전력 사용 절감을 유도한다. 사용량과 시간대별 요금을 제공한다.
시장주의 진영은 민영화를 해야 에너지전환 대응을 위한 자금 확보가 유리하다는 입장이다. 공기업만으로는 투자가 더디다는 것이다.
한전 통합 체계를 강조하는 쪽은 경쟁 도입으로 효율성이 높아진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한다. 시장 개방에 앞장선 유럽 국가 AMI 보급률이 높은 건 정부 정책 효과가 크다. 정부가 AMI 설치 의무를 강화하면서 전력 판매 기업이 뒤따르는 형국이다. 한국은 한전 통합 체계에서도 정책적으로 AMI 보급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전력은 필수재인 만큼 경제적 효율성뿐 아니라 공공성 확보가 병행돼야 한다. 기업은 투자한 자금을 요금 인상 등으로 결국 회수해 갈 것이다. 여러 국가의 사례가 시장 개방 폐해를 보여준다.
정세은 교수는 “민간이 하면 에너지전환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주장은 허구”라며 “국가가 주도적으로 재정을 투입해 빠르게 진행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장 개방 효율성은 시장주의자와 재정 보수주의가 만들어낸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