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윤석열 대통령의 지각에 아무 불만 없습니다

사상 첫 출퇴근 대통령(!)인 윤석열 대통령이 업무 첫 주부터 몇 차례 지각을 한 모양이다. 이를 두고 “성실히 일 안 하냐?”라거나 “술 마시다가 늦잠 잤냐?”는 비판도 꽤 많은 것 같다. 진혜원 검사가 “선출직 공무원 지각은 법 위반”라며 맹비난을 퍼부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하지만 나는 의외로(!) 윤 대통령의 지각에 아무 불만이 없다. 거 사람이 살다보면 지각 좀 할 수 있는 거지! 설혹 지각의 사유가 전날 과음으로 인한 늦잠이어도 상관이 없다. 거 사람이 살다보면 과음 좀 할 수 있는 거지! 대통령이 너무 불성실한 거 아니냐고? 거 사람이 좀 불성실할 수도 있는 거지!

게다가 나는 요즘 같은 창의성의 시대에 나인 투 식스 엉덩이 오래 붙이는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창의성은 뇌의 휴식에서 나오는 것이니 충분히 불성실하고 충분히 게을러도 괜찮다는 이야기다.

내가 전직 대통령 이명박에게 가졌던 가장 큰 불만은, 이 사람이 머리는 나쁜데 부지런하다는 점이었다. 최악의 리더는 ‘멍부(멍청한데 부지런한 리더)’라고 했던가? 차라리 머리가 나쁘면 게으른 게 더 낫다. 그래서 나는 윤 대통령의 게으름을 비판하고 싶은 마음이 진심으로 1도 들지 않는다.

왜 부지런해야 하나

대통령의 게으름에 별 불만이 없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자본주의는 300년 역사 동안 일관되게 근면과 부지런함을 노동자의 덕목으로 칭송해 왔다.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부지런함과 성실함의 신성화가 그 단면이다.

우리나라는 이 정도가 더 극심하다. 나는 왜 아직도 노동자를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근로자(勤勞者)라고 부르는지, 왜 신성한 노동을 ‘부지런히 일해야 함’이라는 뜻의 근무(勤務)라고 부르는지 당최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

윤석열 대통령이 12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출근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2022.05.12. ⓒ뉴시스

수많은 노동자들의 투쟁의 결과로 만들어진 노동절이 왜 ‘근로자의 날’인지 더 알 수 없다. 게다가 일 하러 가는 순간을 왜 ‘부지런함을 향해 나아간다’는 뜻의 출근(出勤)이라고 부르는지, 심지어 일을 마치고 노동으로부터 잠깐 해방되는 그 행복한 순간조차 ‘부지런함에서 물러난다’는 뜻의 퇴근(退勤)이라고 부르는지 조금도 설득이 되지 않는다.

눈 뜨자마자 시작된 부지런함의 강요가 하루를 마감하고 잠자리에 들기 직전까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놓치고 있다. 근면과 성실은 과연 도덕인가?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도대체 왜 부지런함을 강요받아야 하나? 그리고 이 강요 덕에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래서 마르크스의 사위이자 독자적인 사상가였던 폴 라파르그는 ‘게으를 권리’를 주장한 바 있다. 라파르그가 남긴 주옥같은 몇 문장을 함께 감상해보자.

자기들 스스로 외쳐댄 소리에 귀가 멀고 바보가 돼버린 경제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일하라. 노동자 계급이여 일하라. 사회의 부와 그대들의 개인적 번영을 위해 일하라. 더 가난해져서 일해야 할 이유가 더 많아지도록, 그래서 더 비참해지도록 일하라. 자본주의 생산의 가차 없는 법칙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형이상학적 법률가들이 지어낸 무기력한 ‘인간의 권리’보다 천 배는 더 고귀하고 성스러운 ‘게으를 권리’를 선언해야 한다. 노동자 계급은 하루에 3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여가와 오락을 즐기는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

예수는 산상 수훈에서 게으름에 대해 이렇게 설교했다. “들에 핀 백합화를 생각해보아라. 그것은 힘들여 일하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결코 그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입지는 못했다.” 진노한 하느님, 수염이 덥수룩한 여호와는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게으름의 대표적인 예를 보여주었다. 그 자신이 엿새 동안 일을 한 뒤에는 영원한 휴식에 들어가지 않았는가?


게으름에 대한 찬양

나는 이 글을 읽고 우리에게 강요된 부지런함이 얼마나 폭력적인 사상인지 깊이 공감했다. 그런데 이런 글을 보고도 색깔론에 찌든 사람들이 “마르크스 사위 같은 자의 이야기를 왜 귀담아 듣느냐?”고 항의를 할까봐 이번에는 영국의 위대한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명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의 주옥같은 몇 구절을 소개하겠다.

근로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며 현대 세계는 노예의 도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현대의 생산 방식은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리석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음을 영원히 이어나갈 이유는 전혀 없다.

우리는 생산에 관해선 너무 많이 생각하고 소비에 대해선 너무 적게 생각한다. 그 결과로 우리는 즐거움의 향유나 소박한 행복에는 별 중요성을 두지 않으며 생산을 그것이 소비자에게 주는 기쁨에 근거해 판단하지 않는다. 노동시간을 4시간으로 줄여야 한다고 해서 나머지 시간이 반드시 불성실한 일에 쓰여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내 얘기는 하루 4시간 노동으로 생활필수품과 기초 편의재를 확보하는 한편, 남는 시간은 스스로 알아서 적절한 곳에 사용하도록 되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현재보다 더 많은 교육이 이루어지고 그 교육의 목표에 여가를 현명하게 사용하는데 필요한 안목을 제공하는 항목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필수적이다.


어떤가? 라파르그는 하루 세 시간, 러셀은 하루 네 시간만의 노동을 이야기한다. 그 외의 시간에는 ‘근무’를 강요당하지 않아야 하고, 각자 행복할 권리를 찾아야 한다. 심지어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에 대한 교육도 받아야 한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근면에 대한 강요가 노예제도의 그것과도 같다는 점이다. 어쩌면 우리는 ‘부지런함’의 노예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요구한다. 무슨 사유인지 모르지만 ‘근무’ 첫 주부터 지각을 밥 먹듯 하시던데 이왕 그렇게 게으를 것이면 국민들에게 절대 부지런함을 강요하지 말라. 대통령에게 지각할 권리가 있듯 우리 민중들에게도 게으를 권리가 있다. “주 120시간 바짝 일하고”같은 헛소리는 꼭 집어치우길 권한다. 그리고 출퇴근 시간도 안 지키는 분이 그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비웃는다. “너나 잘 하세요” 그러면서 말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다 같이 게으를 권리를 찾아나가자. 윤석열 대통령의 지각할 권리를 모든 민중들에게! 술 마시고 지각할 권리도 모든 민중들에게! 대한민국의 민중들이여, 게으름으로 단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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