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뜬금없지만 고대 그리스 신화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신화 중에는 오이디푸스(Oedipus)라는 비극적 인물이 등장한다. 이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잘 몰라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는 한 번쯤 들어본 분들이 많을 것이다.
아버지를 극도로 증오하는 반면, 어머니에게는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아들의 심리를 뜻하는 정신의학 용어다. 이 용어의 어원이 바로 이번 칼럼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다.
또 한 가지, 이집트 피라미드 앞에 놓여있는 스핑크스가 행인들에게 “아침에는 발이 네 개, 점심에는 발이 두 개, 저녁에는 발이 세 개인 동물이 뭐게?” 뭐 이런 질문을 던졌다는 이야기를 다들 들어보셨을 것이다. 이 질문에 답을 못해 수많은 행인들이 스핑크스에게 잡아먹혔는데, 한 청년이 답을 해 이 난관에서 벗어났다는 게 이 전설의 요지다.
그런데 이 정답을 말한 청년이 오이디푸스다. 이렇듯 오이디푸스는 여러 면에서 우리에게 꽤 친숙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이런 자투리(!) 이야기들은 널리 알려진 반면 오이디푸스의 진짜 이야기는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그의 진짜 이야기를 잠시 따라가 보자.
오이디푸스의 이야기
오이디푸스는 고대 그리스 테베(Thebes)라는 도시국가에서 왕자 신분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테베의 왕 라이오스(Laius)였고, 어머니는 왕비인 이오카스테(Iocaste)였다. 당시에는 미래를 내다보는 신탁이 유행을 해서, 왕 라이오스는 왕비가 임신을 하자 신관한테 아이의 미래를 내다봐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런데 거기서 왕이 신관으로부터 끔찍한 예언을 듣는다. “새로 태어나는 왕자가 장성하면 아버지이자 왕인 당신을 죽일 것이고 당신의 아내, 즉 왕비를 차지해 결혼할 것이다”라는 예언이었다.
이 충격적 예언을 들은 왕은 왕비에게 “아들이 태어나면 즉시 죽여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어떤 어머니가 자기가 낳은 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인단 말인가? 차마 그 일을 직접 하지 못한 왕비는 하인에게 아들을 맡기고 대신 죽여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마음이 약한 하인조차 갓 태어난 아기를 죽이지 못하고 숲에 버려두고 말았다. 아기는 곧 주변을 배회하던 양치기에게 발견됐고,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양치기는 이 아이를 인근 국가 코린트(Corinth)의 왕에게 바친다. 참고로 코린트라 불렸던 이 도시국가가 바로 성경에 나오는 ‘고린도’다. 그리고 이 아이가 바로 이 칼럼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다.
마침 아이가 없었던 코린트의 왕은 이 아이를 양자로 삼고 애지중지 키웠다. 그런데 왕자로 자라나던 오이디푸스 역시 코린트의 신관에게 비슷한 예언을 듣고 말았다. “너는 자라면 나중에 아버지를 죽인다. 그리고 그 후 어머니와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 말이다.
놀란 오이디푸스가 그 슬픈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나라를 떠나 유랑을 시작했다. 그는 유랑 도중 자신의 진짜 고향 테베에 이르렀다. 물론 오이디푸스는 그곳이 자기의 고향인 줄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비가 붙은 끝에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 라이오스를 죽이고 만다. 자기 친아버지를 죽인 것이다.
마침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의 퀴즈를 풀어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자, 테베 국민들은 오이디푸스에 열광했다. 결국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됐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테베에는 누군가가 새로 왕좌에 오르면, 직전 왕의 부인과 결혼을 하는 개떡 같은 전통이 있었다. 오이디푸스는 이 전통에 따라 직전 왕의 부인인 이오카스테와 결혼을 했다. 이오카스테가 바로 자신의 친어머니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결국 신관의 예언이 다 맞아떨어지고 만 셈이다.
모자(母子) 사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결혼을 한 이 두 사람은 나중에야 진실을 알게 된다. 어머니인 이오카스테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오이디푸스는 자기 눈을 찔러 스스로 눈을 멀게 한 뒤 방랑길에 올랐다. 이 이야기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오이디푸스의 스토리다.
낙관적 믿음에서 시작하자
“고대 그리스나 2022년 한국이나, 그놈의 점쟁이가 문제다”라는 말을 하려고 이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게 아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의 진보적 경제학자 야니스 바루파키스가 자신의 저서 ‘작은 자본론’에서 인용을 한 바 있다. 예언이 자기 충족적 기능을 하는 경우가 현실 경제 세계에서 꽤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사실 오이디푸스의 스토리를 곱씹어보면 줌 웃긴 대목이 있다. 대충 들으면 신관의 예언이 진짜 실현된 것 같은데(점쟁이가 참 용하네!), 가만히 생각해보면 또 그게 아닌 거다.
왜냐하면 신관이 애초 그 예언을 하지 않았다면 오이디푸스는 테베에서 왕자로 잘 먹고 잘 살았을 것이고 자기 아버지를 죽일 일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오이디푸스가 코린트에서 비슷한 예언을 듣지 않았다면 그는 코린트를 떠날 일도 없었을 것이고 테베에서 친부(親父)를 죽일 일도 없었다. 즉 이 사건에서 신관의 예언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신통방통하게 맞춘 놀라운 능력’이 아니라 그 사건이 벌어지도록 유도한 중요한 원인이었다는 이야기다.
경제학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벌어진다. 예를 들어 경제 전문가를 자처하는 자들이 “올해에는 경제가 엄청 나빠지고 주가가 폭락할 것이다”라고 입을 모아 예언했다고 치자. 실제 그 한 해 동안 각종 경제 수치가 급락하고 주가는 끝 모를 추락을 거듭했다.
그러면 경제학자들은 “거 봐, 우리의 예언이 맞았지?”라고 우쭐댈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그런 예언을 하지 않았다면 경제는 그만큼 나빠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전문가라는 자들이 그런 말을 떠들고 다니니 불안해진 사람들이 소비와 투자를 멈춘다. 기업도 불안 심리에 젖어 고용을 줄인다. 그러다보니 진짜로 경제가 안 좋아지는 거다. 민주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경제가 곧 망한다”고 저주를 퍼붓는 보수 언론의 예언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게 그냥 헛소리 예언이기만 하면 좋은데, 그 헛소리 예언이 종종 현실을 바꾸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미래에 대한 어떤 확신이 세상을 바꾸는 큰 힘이 될 때가 매우 많다는 점이다. 실제 나는 인류 사회가 매우 평등하고, 매우 인간적이며, 매우 협동적인 사회로 진보할 것이라는 확신을 단 한 순간도 잃은 적이 없다.
사람들이 나에게 “당신은 뭘 근거로 그렇게 낙관적이냐?”고 종종 묻는데, 사실 나의 이 확신에 별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늘 그렇게 확신하고 낙관한다. 왜냐고? 그렇게 확신해야 그 믿음을 가지고 더 치열하게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확신에 찬 치열함은 세상을 바꾸는 좋은 원동력이 된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 미래에는 더 나은 세상이 올 거라는 낙관, 그리고 당면한 이 싸움에서 우리는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나를 더 생동감 있게 만든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는 이 낙관에서 시작해야 한다. 윤석열의 시대는 대한민국의 암흑의 시대로 기록될 것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여러 민주진보 세력의 이번 지방선거 전망은 어둡기만 하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우리는 절망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이겨내고 대한민국을 보다 나은 사회로 진보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이런 우리의 믿음이 굳건할수록, 우리의 현실은 우리의 믿음에 더 가까이 갈 것이다. 우리는 막 시작된 윤석열 시대의 광기에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