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18세기 영국 여성에게서 건진 ‘공정’, 연극 ‘웰킨’

‘차이메리카’ 루시 커크우드 신작...진해정 연출

연극 '웰킨' ⓒ두산아트센터

빅 히스토리, 불신시대, 예외, 모험, 갈등, 이타주의 등 다양한 주제를 통해서 동시대를 꼬집어 왔던 두산아트센터 두산인문극장이 올해 주제를 '공정'으로 정했다. 과거든 현재든 '공정'에 대한 화두는 늘 뜨거웠다. 하지만 올해 두 번의 선거를 거치면서 '공정'에 대한 주제가 여느 때 보다 더 뜨겁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공정'이라는 주제로 두산아트센터에서 관객을 만나고 있는 연극은 '웰킨'이다. '차이메리카'로 한국 관객에게도 친숙한 영국 극작가 루시 커크우드(Lucy Kirkwood)의 신작이다. 2020년 연국에서 초연한 이 작품이 올해 처음으로 한국 관객을 만나게 됐다. 정말 귀한 기회다.

'웰킨'은 18세기 영국의 여성을 내세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관극 전 드는 생각은 하나다. 21세기도 아닌 먼 과거 18세기, 그것도 영국의 여성을 통해서 한국 관객은 과연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 였다. 그러나 180분의 상영시간이 흐를수록 관객은 알게 된다. 시대도 국적도 다른 여성들의 삶이 21세기를 관통하고 있음을 말이다. 특별한 주기를 간직한 채 인간의 눈에 등장하는 핼리 혜성처럼.

연극 '웰킨' ⓒ두산아트센터

작품의 굵직한 사건은 바로 영아살해 사건이다. 때는 1759년, 영국의 외딴 지역에서 마을 유지의 딸이 잔혹하게 살해된 채 발견된다. 마을은 발칵 뒤집힌다. 용의자가 유지의 저택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던 21살 샐리 포피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사형 선고를 받은 샐리는 자신이 아기를 임신 중이라고 주장하고, 덕분에 사형은 잠시 유예된다. 그리고 샐리의 임신 여부를 확인 하기 위해 출신도 인종도 나이도 다른 12명의 여성이 작은 다락방에 모이게 된다.

이런 구조를 봤을 때, 단순히 '12명의 성난 사람들'이 떠올랐다.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아버지를 칼로 찌른 소년의 살인 혐의를 두고 12명의 배심원들이 소년의 유무죄를 가리게 되는 법정 드라마다.

하지만 '12명의 성난 사람들'이 합리적 의심에 대한 얼굴과 사건의 얼굴을 점진적으로 그려가고 있다면 '웰킨'은 좀 달랐다. '웰킨'이 사건의 얼굴에 점점 접근한다는 점은 '12명의 성난 사람들'과 비슷했지만, 하늘과 땅 사이에 놓인 12개의 얼굴이 더욱 또렷하게 드러난다는 점은 '12명의 성난 사람들'과 또 달랐다.

12개의 얼굴들. 그러니까 그 얼굴들은 땅에 발을 딛고 선 사람들이다. 동시에 땅에서 무를 뽑고, 약초를 캐고, 절구질을 하고, 빨래를 하는 여자들의 얼굴이다. 동시에 빨래를 널기 위해 하늘을 보는 일을 제외하곤 하늘을 볼 일이 없는 여자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집안일에 갇힌 여성들이다.

동시에 이들은 임신과 출산에 관한 공통된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들은 임신을 해봤거나, 출산을 해봤다. 그리고 임신과 출산을 할 예정인 이들로 구성됐다. 직간접적으로 공통의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연극 '웰킨' ⓒ두산아트센터

그런 그들은 개인의 경험과 지식을 총동원해 샐리의 임신 여부를 진단하기 시작한다. 때론 정확하고 때론 모호하고 때론 사적인 미움과 감정이 얽히고 설킨 여성들의 토론 속에서 노동, 법, 일상, 사회, 계급 문제가 함께 피어 오른다. 하늘과 땅 사이, 겨우 틈을 만들어낸 그 답답한 다락방 어디 쯤에서 복합적이고 다단한 대화의 결들은 '공정'은 무엇인지, '공정'의 얼굴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감옥같은 무대에서 뿜어져 나오거나 혹은 나오지 못하는 에너지들은 관객에게 전이된다.

진해정 연출가가 연출을 맡았다. 진 연출가는 두산인문극장 측과 진행한 인터뷰를 통해 "(웰킨은) 존엄에 대한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땅이라는 현실 속에서 스스로의 존엄을 잊거나 잃었던 인물들이 끝내 그것을 회복하는 이야기라고 보고 있다"면서 "그 '회복'이라는 것이 당시에는 아주 미약하고 무의미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 순간들이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이끌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지난 7일 막을 연 '웰킨'은 오는 6월 25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볼 수 있다. 고윤희, 김별, 김정아, 라소영, 민대식, 백종승, 부진서, 송영주, 송인성, 안민영, 이선주, 이세영, 이정미, 이하영, 하지은 등 총 15명의 배우가 출연한다. 

기사 원소스 보기

기사 리뷰 보기

관련 기사

기사 원소스 보기

기사 리뷰 보기

관련 기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