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당 지방선거 당선인들. 왼쪽부터 김종훈 울산 동구청장 당선인, 오은미 전남도의원 당선인, 최나영 서울 노원구의원 당선인. ⓒ당선인 페이스북
6.1 지방선거 결과 진보당이 21명의 당선인을 내면서 ‘약진했다’는 세간의 평가가 나오고 있지만, 진보당 안에선 오히려 아쉬움이 가득하다. 애초 설정한 목표에 많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열심히 선거를 준비했는데 아깝게 떨어진 후보들이 전국 곳곳에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딱 2% 부족했어요.” 진보당 지방자치위원장으로 이번 지방선거 준비를 총괄한 안주용 공동대표가 전남도 나주시의회 의석 하나를 두고 한 말이다. 진보당은 전남도에서 도의원 3명과 기초의원 5명을 배출하면서 명실상부한 ‘전남 2당’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이보다 더 많은 당선인을 낼 거라고 기대했다는 게 안 대표의 말이다. 전남 나주시의회 비례대표는 2석인데, 더불어민주당이 득표율 77.08%를 차지하면서 2석을 모두 가져갔다. 진보당의 득표율은 22.91%였다. 25%만 얻으면 1석을 가져갈 수 있었는데, 2%가 부족했다.
심지어 ‘보수텃밭’에서 불과 34표 차이로 떨어진 진보당 후보도 있었다. 그 주인공은 경북 의성군의회 나선거구에 출마한 신광진 후보다. 이 선거구엔 신 후보와 국민의힘 후보 2명 등 총 3명이 출마했다. 2인 선거구라 한 명이 탈락하는 구도다. 신 후보는 28.79%라는 꽤 높은 득표율을 얻었지만, 2등을 한 국민의힘 배재봉 당선인과 불과 34표차로 낙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세가 강한 지역에서 선전했다고 안 대표는 평가했다.
그 외에도 제주도 제주시의회 아라동갑선거구에 출마한 양영수 후보(22.10%), 강원도 홍천군의회 나선거구에 출마한 남궁석 후보(18.98%) 등 여러 후보들이 선전했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으로 대표되는 거대양당에 밀려 아쉽게 낙선했다.
진보당의 이번 지방선거 목표는 한 명의 기초단체장과 전국 광역시·도에서 당선인을 내는 것이었는데, 김종훈 울산 동구청장 후보의 당선으로 목표의 절반만 달성됐다. 나머지 절반의 목표에서는 진보당 조직이 없는 세종을 제외한 16개 중 9개 지역에서 당선인을 배출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불리한 정치지형 속에 가려져 있던 진보당이 존재감을 드러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2년 동안 준비했다”
운이 좋아 한순간에 이룬 성과는 아니었다. 안 대표는 “진보당은 지방선거를 2년 전부터 준비했다”며 “후보를 조기에 선출해 일찍 가시화한 것이 특징”이라고 밝혔다. 진보당은 지방선거를 1년가량 앞둔 지난해 7월 대부분의 후보를 선출해 일찍이 공식화한 상태였다. 올해 들어 후보를 선출하기 시작한 다른 정당과는 분명 차별화된 전략이었다.
일단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원내 정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원외 정당인 진보당으로선 일찍이 후보를 알릴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안 대표는 “선거를 4개월 남겨 놓고 출마를 한다고? 그건 말이 안 된다. 진보정당도 그동안 그랬는데, 그것은 후보자 스스로 준비도 안 될 뿐만 아니라 유권자들에게 예의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당선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요행을 바라는 것이고 정치도 아니라고 평가를 냉혹하게 하고 시작했다”며 “진정성 있게 지방정치를 하려면 후보자 본인이 2년 간 준비해야 한다고 정리했던 것이다. 진보정당은 특히 그래야 한다”고 밝혔다.
진보당의 이런 판단은 선거 결과로 어느 정도 입증됐다. 안 대표는 “놀랍게도 뒤늦게 3~4개월 준비한 후보는 당선은 고사하고 좋은 성적을 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며 “5% 미만 득표율로 그저 출마하는데 의의를 두려는 것인데, 사실 평가 자체가 불가능”이라고 꼬집었다. 반면에 “최소 1년 전부터 준비한 후보들은 당선됐다”며 “오랜 시간 준비한 후보들은 낙선을 하더라도 대부분 득표율 10%를 다 넘겼다. 그게 놀라운 점”이라고 강조했다.
단순히 일찍 후보를 내세우는데 그치지 않았다. 2년 동안 가장 중점에 두고 고민했던 것은 ‘어떤 의제로, 어떤 대중운동으로 지역 주민들과 함께 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그 결과 지역별로 다양한 의제가 다양한 형태로 개발됐다.
전남 장흥군에서 진보당이 시작한 아이스팩 재사용 운동 모습. ⓒ박형대 페이스북
작은 일이지만 큰 효과 발휘한 아이스팩 재사용 운동, 칼갈이 봉사활동
작은 일로 보이지만 후보를 알리는데 큰 효과를 발휘한 건 아이스팩 재사용 운동, 칼갈이 봉사활동 등이 꼽힌다.
전남도의원 선거에 출마해 압도적인 1등으로 당선된 박형대 당선인은 자신의 지역구인 전남 장흥군에서 당원들과 함께 2020년부터 아이스팩 재사용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진보당에서 시작한 이 운동은 장흥군 시민사회단체 연대체인 ‘장흥 항꾸네’로 번졌고, 장흥군도 면단위까지 수거작업을 하기에 이르렀다. 장흥군에서 진보당과 시민단체는 주당 평균 400~500개를 수거해 2시간 동안 씻어 말린 뒤 전통시장 상인회에 전달해 왔다. 매주 빠짐없이 진행된 아이스팩 재사용 운동은 일상생활 속 기후정의운동으로 자리잡히면서 많은 주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냈고, 도움을 받은 상인들도 크게 환영했다.
장흥군에서 흥행한 아이스팩 재사용 운동은 주변 지역으로 확산됐다. 이번에 당선된 전북 익산시의원 손진영 당선인, 전국 화순군의원 김지숙 당선인도 아이스팩 재사용 운동을 벌였다. 안 대표는 “자기만 아이스팩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조직해서 함께 했다”며 “자연친화적이고 기후환경을 개척해나갈 사람의 이미지가 후보에게 만들어졌다”고 평가했다.
그중 손진영 당선인의 경우 평소 쓰레기줍기 운동을 즐기면서 지속적으로 해나가기도 했다. 당선된 이후에도 동네를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줍고 있어 주변에서 말릴 정도라는 후문이다.
전남도의원 선거에서 1위로 당선된 진보당 오미화 당선인이 선거 전 전남 영광 마을회관에서 농민회의 칼갈이 봉사활동을 하는 현장을 찾아 주민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는 모습. ⓒ이석하 전 전농 광주전남연맹 사무처장 페이스북
진보당 지역위원회와 농민회가 함께 한 칼갈이 봉사활동은 칼갈이 기계도, 갈아줄 사람도 보기 힘들어진 농촌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주민들은 칼갈이 봉사활동이 시작되면 부엌 칼은 물론 농작업용 칼까지 한 무더기를 들고나왔다. 한쪽에서 칼을 가는 동안, 한쪽에선 좌담회가 열렸다. 그때 후보가 직접 와서 주민들에게 지역 현안에 대해 얘기도 하고 민원도 들었다. 지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서명도 받았다. 칼갈이 봉사활동도 전남 장흥에서 시작해 다른 농촌 지역으로 번질 정도로 흥행했다.
안 대표는 “주변에선 후보가 당연히 해야 할 이미지 구축사업이라고 볼 수 있고, 아주 소소한 일로 볼 수도 있는데, 우린 그렇지 않다고 봤다”며 “진정성을 보이면 주변에서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결국 가치있는 일로 인정을 받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김종훈 울산 동구청장 당선인이 ‘울산 동구 하청노동자 지원조례’ 주민발의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김종훈 페이스북
주민의 힘을 모으자! 남은 예산 주민 환원 운동, 조례 제정 운동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호응을 얻었던 것은 이른바 ‘남은 예산 주민 환원 운동’이었다. 지방자치단체가 전년도에 쓰고 남은 예산(순세계잉여금)을 곳간에 쌓아두지 말고 주민들이 원하는 곳에 사용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진보당 후보들이 지역 주민들에게 남은 예산을 어디에 쓸 것인지를 묻고, 이를 주민서명이나 주민대회를 통해 지방자치단체에 전달해 이행될 때까지 압박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위기가 이어졌던 만큼 주민들의 요구 대부분은 ‘재난지원금 지급’이었고, 서울 노원구의원 최나영 당선인, 전북도의원 오은미 당선인이 실제 이를 이끌어내는 성과도 거뒀다.
이 운동은 최나영 당선인이 처음 시작했다. ‘남은 예산 쓰기 운동’은 사실 3년 전부터 매년 개최하고 있는 노원주민대회의 이슈 하나에 불과했는데 그야말로 ‘대박’이 터졌다. 주민들의 큰 호응이 뒤따랐던 것이다. 이 같은 주민대회는 기성정치와는 차별화된 ‘주민직접정치’라는 새로운 정치모델로 떠올랐다.
최 당선인은 “기성정치인들은 자신들이 알아서 일을 하고 그 결과는 자신들의 공적이라는 게 강하게 드러나는데, 저는 주민들께 의견을 묻고 직접 결정하게 하고, 어떻게 행동할지 안내하고, 주민들에게 성과도 돌려드렸다”며 “포인트는 (예산이 아니라) 정치방식의 변화”라고 강조했다. 최 당선인은 노원구의회에 입성한 뒤에도 주민대회를 매년 이어나갈 예정이다.
진보정당의 유일한 기초 지방자치단체장이 배출된 울산에선 ‘조례 제정 운동’을 집중적으로 벌인 곳으로 꼽힌다.
진보당 울산시당 주도로 ‘울산시 고용보험 지원 조례’를 1만3천여명의 동의를 얻어 주민발의했고, 이어 ‘울산시 온종일 아동돌봄 통합지원조례’를 1만6천여명의 동의를 얻어 주민발의했다. 두 조례는 모두 지난해와 올해 울산시의회를 차례대로 통과했다. 울산에서 주민발의로 조례가 제정된 것은 2005년 ‘울산시 학교급식 지원 조례’ 이후 16년만이었다.
‘울산시 고용보험 지원 조례’를 통해 고용보험 사각지대에 있던 특수고용노동자와 예술인, 자영업자들의 지지를 얻고, ‘울산시 온종일 아동돌봄 통합지원조례’를 통해 육아에 매달려 있던 여성들의 지지를 얻은 것으로 평가된다.
아직 통과되진 않았지만 지방선거 직전에 4천여명의 주민 참여로 ‘울산 동구 하청노동자 지원조례’ 주민발의 서명부가 김종훈 울산 동구청장 당선인 주도로 동구의회에 제출되기도 했다. 김 당선인이 이번 선거에서 울산 동구 중심에 있는 현대중공업 정규직 노동자뿐만 아니라 비정규직인 하청노동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게 된 배경의 하나로 꼽힌다.
김 당선인은 “이번 선거는 단순히 하나의 선거였다기보다는 진보정치가 우리사회에서 자기 역할을 다하는 과정이었다”며 “우리가 내놓는 정책은 구호나 선거용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진짜 해결하려는 의지라는 것이 주민들에게 전달됐던 것 같다”고 평가했다.
진보당 지방선거 당선인들의 모습 ⓒ진보당
다시 존재감 드러내며 ‘생존신고’ 마친 진보당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런 노력이 전국 곳곳에 스며들면서 진보당은 21명의 당선인을 배출했다. 4년 전 선거 때 배출한 당선인의 두 배 정도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간판을 단 후보를 꺾고 진보당 후보가 1위로 당선된 지역도 8곳이나 된다. 그중 보수세가 강한 충북 옥천군의원 선거에서 국민의힘 추복성 후보(25.62% 득표율)을 꺾고 28.16% 득표율로 1위를 차지한 송윤섭 당선인을 두고는 당내에서도 ‘기대 이상의 선전’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나아가 현역 지방의원 8명 가운데 윤경선 경기 수원시의원, 황광민 전남 나주시의원, 백성호 전남 광양시의원, 국강현 광주 광산구의원, 김태진 광주 서구의원, 유영갑 전남 순천시의원 등 6명이 다선에 성공하고 돌아온 점은 진보당이 이미 실력을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재선에 성공한 황광민 당선인은 “4년 전 선거는 민주당 독식구조 속에서 이런 정당 한 명은 있어야 한다’는 기대로 치러졌다면 이번엔 4년 간 의정활동으로 평가받는 선거였다”며 “그런 상황에서 당선되다보니 책임감이 더 커지는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진보당인 만큼 지역사회 소외 계층이나 노동자, 농민을 위한 조례를 만들려고 했다. 생활임금 조례도 나주에는 없었는데 같이 만들어서 이제 시행 3년차가 됐다”며 “시의원 역할 자체에 충실하려고 했는데 좋게 평가해주신 것 같다”고 말했다.
진보당은 이번 지방선거를 계기로 ‘대안정당’으로 가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통합진보당 해산과 진보정당의 분열, 불리한 정치·언론 환경 등으로 인해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 선거를 계기로 ‘생존신고’는 마친 셈이다.
안 대표는 “‘우리가 그때 그 당입니다’라고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진보정당의 역사적 과정을 애써 외면하거나 부인하는 건 아니지만 세월이 10년 가까이 흐른 시점에서 우리는 이미 새로운 당이지 않나”라며 “지금은 오히려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옛날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쓰레기를 한 번 더 줍는 게 도움이 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