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지표의 경고음이 울리며 경제위기가 밀려온다. 다가오는 민생위기를 대처하기 위한 생산적 논의가 이루어져도 부족한 국회는 33일째 공회전이다. 집권당은 “민생이 우선”이라고 매일같이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협의의 진전을 위해 양보하는 모습은 없다.
야당이 여야 합의를 위해 양보안을 제시한 날에도, 국회 원 구성 협상단의 여당 의원은 무슨 일 있냐는 듯 “집에 간다”며 국회를 나섰다. 설마 정말 집에 갔겠냐 싶어 퇴근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이 국회에서 기다리고 있자, 다시 국회로 돌아와 말했다. “뭘 가져가야 하는데, 중요한 걸 놓고 와서...집에 가질 않네, 이 사람들.” 그리고 ‘민주당의 제시한 양보안을 받을 거냐’고 묻는 기자들의 질의에, 민생 현안이 산적한데도 국회 개원이 별로 시급하지 않다는 듯 이같이 답했다. “어떻게 받아, 그거 받을 수 있겠어?” 민생을 챙겨야 한다, 국가 역량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여당의 말은 헛구호였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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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과 야당은 5월 30일부터 국회를 개원하지 못하고 법제사법위원장 자리를 두고 다퉜다. 결국 야당인 민주당이 6월 24일 당내 반발에도 불구하고 법사위원장 자리를 국민의힘에 내주겠다고 했다. 다만 조건을 붙였다. 박병석 국회의장 중재로 여야가 합의한 검찰 수사권 조정 취지를 살려서 사개특위 구성 명단 제출, 검찰 수사권 조정 법 관련 헌법재판소 권한쟁의심판 취하 등이다.
여당도 아닌 야당의 양보안이었기에, 긍정적인 전망이 조심스럽게 나왔다. 원내수석 간 조율만 잘 된다면, 극적 합의 타결이 가능할 것이고, 27일 월요일 오전에 원내대표 회동에서 합의문 작성도 가능하다는 전망이었다. 경제위기가 코앞인 만큼 여당도 정쟁에 몰두하지 않고, 양보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기대였다.
헛된 기대였다. 집권당은 야당의 양보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27일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정책의원총회에서 민주당이 법사위원장을 내어주는 일은 당연한 일인데, 거기에 검찰 수사권 조정 법 관련한 조건을 붙였다며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완전 조삼모사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개특위 정상 운영시키고, 헌재에 제소한 권한쟁의심판을 취소한다면 결국은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의 줄임말) 법에 대해 저희들이 동의하는 것밖에 안 된다”라며 “분명히 말한다. 이 두 가지 민주당의 요구 조건은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천명한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그가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한 이른바 ‘검수완박 법’은 권 원내대표가 동의하여 여야 합의까지 했던 법이다. 그는 박병석 국회의장 중재안에 동의한다는 서명을 한 뒤 지난 4월 25일 해당 법안에 대해 “결코 검수완박이 아니다”라며 자신이 동의한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27일 의원총회에서도 그는 “검수완박 의장 중재안에 제가 사인한 것은 맞다. 그런데”라며 자신이 동의한 사실을 재차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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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열린 국민의힘 중진의원들의 현안간담회에서도 국회 공전 사태가 모두 민주당 탓이라는 주장이 난무했다. 중진의원들은 “민주당이 민생을 뒤로 여긴다.”, “민주당이 몽니를 부린다.”, “민주당이 국민을 우롱한다.” 등의 말을 쏟아내며 야당 책임론에 몰두했다. 박대출 의원은 “대선 불복”이라며 “민주당이 만일 국회의장 선출을 강행한다면 전무후무한 개헌 쿠데타”라고 주장했다.
말은 다 다르지만, 의미는 같았다. 민주당이 받아줄 수 없는 조건을 양보안인 양 내미는 바람에, 국회 공전이 장기화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의원총회에서의 권 원내대표 말대로 검찰 수사권 조정에 반대하는 것이 ‘국민의힘의 정체성’이라면, 그 정체성이라는 게 그렇게 반복해서 외치던 “민생이 우선”이라는 말보다 중요하다는 걸까? 먼저 양보안을 제시해도 시원찮은 여당이 야당의 양보안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면, 민생보다 대통령과 검찰 지키기가 우선이라고 외치는 것 같다. 대규모 수사인력을 동원해 직접 수사하고 기소 여부까지 판단하는데 대놓고 정치까지 하려 하는 검찰의 무소불위 권력의 위험과 이 권력을 여러 수사기관으로 분배할 필요성에 관해 논하지 않더라도, 검찰 수사권 지키기를 국민의힘 최우선 정체성으로 굳혀도 되는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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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 아니다. 여당이 야당과 함께 박병석 국회의장의 중재안에 서명했을 때도, 국회 공전 장기화를 끝내기 위한 여야 합의 직전에도, 검찰의 반발과 이른바 ‘왕장관·소통령’이라 불리는 한동훈 법무부장관의 반대 뒤에는 국회의 협치 정신이 깨졌다.
여야가 박병석 국회의장이 제시한 검찰 수사권 분리 중재안에 서명하자마자, 검찰 지휘부가 총사퇴하면서 집단 반발했고, 당시 장관 후보자였던 한동훈 법무부장관은 중재안에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도 한동훈 장관과 교감한 뒤 중재안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중재안에 직접 서명한 권성동 원내대표도 결국 합의 파기 쪽으로 뒤돌아섰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24일 금요일 민주당의 양보안이 나온 후, 27일 월요일 타결 가능성에 대해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27일 법무부(장관, 한동훈)가 헌법재판소에 검찰 수사권 조정 법안에 관한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했다.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청구하면 어떤 효과가 생기는지 모르겠지만, 국민의힘이 이미 올해 4월에 청구한 권한쟁의심판을 또 시의적절하게 청구한 것. 이후 국민의힘은 하나 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민주당이 말도 안 되는 조건(권한쟁의심판 청구 취하)을 제시해 국회를 공전시키고 있다는 주장이다. 권성동 원내대표는 다음날 필리핀 대통령 취임식에 간다며 필리핀으로 출국해버렸다.
민생을 위한다지만, 사실 검찰의 수사권 사수와 대통령실의 논리가 우선이었던 것은 아닐까. 묻고 싶다. 뭣이 중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