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때 국내 모 IT기업에서 금융서비스팀장이라는 직책으로 잠깐 일을 한 적이 있었다. 평생 글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잘 알지도 못하는 IT 기업에 입사해 한참 어리바리할 무렵의 경험담이다.
아침에 좀 일찍 출근을 한 날이면 어김없이 동료 팀장 중 한 명이 우리를 총괄하던 임원 방에 들어갔다 나오는 거다. 임원은 아직 출근도 안 했는데 왜 저기를 매일 들락날락하는 걸까?
우연히 주변 사람들로부터 답을 듣고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그 팀장의 반려자가 아침마다 임원의 도시락을 정성껏 장만하고, 그 팀장은 그걸 또 정성껏 임원 방에 차려놓고 나온다는 거다.
평생 그런 사회생활을 경험해보지 못한 터라 ‘아, 세상에서 출세하려면 저렇게 살아가야 하는 거구나’ 크게 깨우친 바(!)가 있었다. 매일 도시락을 챙기던 그 팀장이 임원의 최측근이며 우리 파트의 실세라는 소리도 들었다.
자원봉사 같은 소리 하고 있다
이후 팀장 회식에서 그 실세 팀장이 자기가 얼마나 임원 도시락을 정성껏 장만하는지 막 자랑을 하더라. 나 같으면 숨길 것 같은 이야기인데(왠지 아부만 하는 사람으로 보일까봐) 이 사람은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면서 그 팀장이 한 말. “내가 왜 이런 일을 매일 하겠어? 봉사지 봉사. 우리 임원님이 아침 든든히 드셔야 회사가 잘 돌아가니까.”
봉사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마시던 맥주를 풉 하고 뿜었다. 그 실세 팀장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으나, 나 역시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또라이였으므로 ‘뭘 야려?’라는 표정으로 함께 그를 노려봤다. 잠깐 눈싸움으로 분위기가 서먹해지자 주변 팀장들이 “자 맥주 마십시다”라며 겨우 분위기를 무마했던 기억이 난다.
윤석열 대통령과 영부인 김건희 여사 주변에 비선 논란이 한창이란다. 검찰 출신인 이원모 대통령실 인사비서관의 부인이 윤석열 대통령 부부의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 일정에 동행했다는 거다.
이 비서관 부인은 심지어 순방 사전답사단 일정에도 참여했고, 순방 기간에는 김건희 여사 일정을 주로 도왔다고 전해졌다(대통령실은 이를 부인했지만). 민간인이 대통령 전용기에 탑승하는 것도 모자라 대통령 공식 해외 일정에 함께한 것이 적절한가라는 논란이 불거지면서 비선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통령실의 해명이 가관이었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민간인 자원봉사자도 순방에 필요한 경우 ‘기타 수행원’ 자격으로 순방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원봉사라는 단어를 읽는 순간 나는 10여년 만에 또 한 번 풉 하고 뿜지 않을 수 없었다.
학계에서는 이런 행태를 공식 용어로 ‘개수작’이라고 부른다. 자원봉사라고? 어디서 개수작이야? 지금 이 비선 논란이 악질적인 이유는, 갑질과 알랑방귀 사이에 가족을 끼워 넣었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라. 검찰 시절부터 윤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는 이원모 비서관이 대통령에게 알랑방귀를 뀌고, 윤 대통령이 그를 애지중지한다. 이건 뭐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 비서관의 부인이 자원봉사를 빙자해 그 일에 끼어들고 김건희 여사가 그 일에 개입한다. 이러면 이 일은 베갯머리송사가 된다.
성평등 시대에 베갯머리송사가 웬 말인가?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과거에는 장교 관사 아파트에 살면 “아내의 계급은 군인 남편의 계급이다”라는 말이 있었다. 대부분의 장교가 남자였던 시절 만들어진 말로 실로 성평등에 어긋나는 말인데, 진짜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대통령실이 3일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의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 순방 사진을 추가 공개했다. 사진은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지난 30일(현지시간) 스페인 마드리드 바라하스 국제공항에서 공군 1호기로 향하는 모습. (사진=대통령실 제공) 2022.07.03 ⓒ뉴시스
투스타 집에서 김장을 하면 대령 중령 소령 대위 중위 소위 아내들이 그 집에 다 모여 김치 속을 집어넣고 있는 거다. 당연히 그 누구도 일당을 받지 않는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이 비서관 부인이 돈을 받지 않아 자원봉사라고 하던데, 그 논리대로라면 이 투스타 집에 모였던 부하 장교 아내들의 노동도 자원봉사냐?
이원모 비서관 부인이 그 ‘자원봉사’에 나선 이유가 무엇이겠나? 국가를 위해서? 웃기지 마라. 당연히 남편의 출세를 위해서일 것이다. 그래서 이원모 비서관이 승승장구를 했다 치자. 그 비서관 부인은 자기 아랫사람 가족들에게 똑같은 일을 강요하지 않겠나? 자기도 그렇게 당했으니까.
과거 군인 부인들의 갑질 관행이 오랫동안 뿌리 뽑히지 않은 이유도 그것이다. 나도 당했으니 너희도 당해야 된다, 이게 바로 갑질과 알랑방귀의 연쇄작용 아닌가?
더 심각한 일은 이게 경쟁이 붙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내가 경험했던 그 실세 팀장이 승승장구할 무렵, 다른 팀장들도 임원에게 경쟁적으로 알랑방귀를 뀌기 시작하더라. 그게 먹힌다고 생각하니 그런 것이다.
그러면 이원모 비서관 부인의 마드리드 동행 사실을 들을 윤 대통령 주변 측근 그룹 가족들이 뭔 생각을 하겠나? ‘아, 내가 먼저 그걸 했어야 하는데’ ‘이원모 쪽에서 치고 나가네? 나는 어떻게 영부인 쪽을 더 뚫어보지?’ 이러고 있지 않겠냐고! 이 참담한 일이 버젓이 지금 대통령실에서 벌어지는 거다. 이게 나라냐?
폼만 잡고 싶으면 대통령을 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자. 경제학 용어 중 체리 피킹(cherry picking)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의무와 권리가 있다. 그런데 그 중 권리만 쏙 빼먹고 의무는 등한시 하는 태도를 ‘체리만 따먹는 얍실한 자’라는 뜻으로 체리 피커(cherry picker)라고 부른다.
2016년 영국이 브렉시트를 결정한 뒤 보수당 소속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 총리가 “이민은 제한을 하는 대신 유럽 자유무역은 지금처럼 유지하자”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독일 총리는 “협상에서 ‘과실만 따먹기(Rosinenpicken)’ 원칙은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특권만 누리고 의무는 다 하지 않겠다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라고 반박했다. 이때 메르켈 총리가 언급한 ‘과실만 따먹기’가 바로 체리 피킹에 해당한다.
나는 임기를 시작한지 고작 몇 개월째인 윤석열 대통령 부부를 보면서 이 체리피킹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폼은 폼대로 다 잡고 싶고, 과거 검사 시절 위세도 다 누리고 싶고, 부하직원 부인도 내 부인 수발을 다 들어야 하고, 주말에는 영화관에서 영화도 보고 싶고, 빵집에서 빵도 사고 싶고···. 다 좋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그게 대통령이라는 자리에서 행하기 적절치 않다면, 예를 들어 내가 빵집에서 빵을 사느라 교통 통제가 벌어져 시민들이 불편을 겪는다면, 혹은 부인의 갑질로 국가 인사체계가 무너진다면, 위세를 누리느라 국민 생활이 도탄에 빠진다면, 당연히 그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게 대통령이라는 자리의 의무다.
그런데 윤 대통령 부부는 이 간단한 사실을 모른다.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국민에게 봉사하는 가장 낮은 자리가 아니라, 국민 위에 군림하는 가장 높은 자리라는 생각이 확고한 거다. 그러니 비선 논란에 빵집 논란에, 뭔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자기 부부는 그래도 되는 자리에 올랐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다.
이거야 말로 심각한 체리피킹이다. 대통령 자리에 올랐으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 권리만큼, 아니 그 권리보다 훨씬 큰 의무가 있다. 비선 논란으로 인사 절차를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빵 쇼핑으로 국민 불편을 야기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법이 정한 절차를 몸소 어김으로써 국가의 근간이 되는 질서를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그런데 윤 대통령 부부는 대통령 부부로서 폼은 신나게 잡고 싶고 누릴 권리는 마음껏 누리고 싶은데, 정작 해야 할 중요한 의무는 내팽개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지지율이 그 모양 그 꼴인 거다.
아무튼 이원모 비서관 부인의 자원봉사 쇼 잘 봤다. ‘봉사’라는 단어로 웃기기 쉽지 않은데, 10여년 만에 봉사로 나를 다시 웃겨줘서 고맙다. 하지만 나라가 아주 개판으로 돌아가고 있어서 마음껏 웃지도 못하겠다. 제발 작작 좀 웃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