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도 더 된 기억이다. 친구와 친구의 지인들을 함께 만난 적이 있었다. 지인들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 임원이라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친구의 지인은 자신이 면접관으로 신입사원 면접을 본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이들이 중학생이었던 친구와 나는 면접관의 실전 이야기를 기대하며 집중하고 있었다.
대강의 이야기는 그랬다. 면접을 해보면 좋은 학교 나온 아이들이 일머리도 있고 사고도 긍정적이란 거였다. 여기서부터 문제였다. 그저 객으로 낀 자리에서 못된 성질머리가 발동한 거다. 좋은 학교 나온 것과 긍정적인 것은 무슨 연관이 있는 거냐, 일머리는 또 무슨 연관이냐, 객관적이어야 할 면접관이 먼저 그런 생각을 가지면 시험 보는 아이들은 어쩌란 얘기냐. 즐겁게 얘기하던 자리에서 나는 정색을 하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 아이들이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지 못해서 좋은 대학을 못 갈 거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어서였을까? 좋은 학교에 가지 못해서 일머리 없고 긍정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평가받는 것 같아 불편했던 거였을까? 물론 애들 챙기러 가야 한다고 뒤도 안 보고 집에 돌아왔기에 그 후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연극을 보며 10년도 더 된 그날의 아쉬움과 하지 못한 말들이 떠올라 한참을 생각에 빠졌다.
교육을 통해 ‘공정’을 묻다
두산아트센터 두산인문극장은 2022년 ‘공정’을 주제로 공연, 전시, 강연 등을 이어오고 있다. 연극 ‘편입생’은 그 가운데 마지막 공연 프로그램으로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공정’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이 작업은 우리 사회가 원하는 ‘공정’은 무엇인지, 우리는 어떤 ‘공정’의 기준을 찾아가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어서 더 의미가 크다. 연극 ‘편입생’은 한국 사회가 가장 예민하게 느끼는 교육을 통해, 기회와 평가에 대한 공정을 들여다보게 한다.
두산인문극장 2022 연극 ‘편입생’ ⓒ두 산아트센터
데이비드는 지역 인재들을 발굴해 명문대 편입을 위한 면접시험 준비를 돕는 일을 한다. 그는 동부 명문대 편입 면접시험을 앞둔 두 명의 학생들에게 모의면접을 연습시킬 예정이다. 데이비드를 만나기 위해 온 클라런스와 크리스토퍼는 뉴욕의 슬럼가에서 함께 자란 친구 사이였다. 오랜 시간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살다 데이비드를 만나러 온 자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클라런스와 크리스토퍼는 면접관 앞에서 자신이 이 학교에 필요한 인재임을 증명해야 한다. 클라런스는 면접관으로 러시아 문학을 연구하는 조지아를 만난다. 클라런스는 특유의 친밀함과 문학과 글에 대한 섬세한 통찰력을 보여주며 조지아에게 깊은 인상은 남긴다. 한편 크리스토퍼는 레슬링 선수로 뛰어난 성적을 보유하고 있어 추천서까지 받은 상태다. 운동뿐만 아니라 수학에도 탁월하다. 여기까지 보면 클라런스와 크리스토퍼는 뛰어난 인재들이다. 적어도 자신이 공부하고 싶은 분야에 재능을 갖고 있고 열심히 하려는 의지도 갖고 있다.
이 연극은 미국 작가 루시 서버(Lucy Thurber)의 작품이다. 이 작품에 대한 사전 조사를 하고 오지 않았다면 관객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은 모두 장학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아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각각의 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하나씩 밝혀지면 우리는 왜 이 이야기가 특별한지 알게 된다. 크리스토퍼는 히스패닉계 남성이며 슬럼가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가 살던 고향은 ‘사람이 벌레처럼 죽어 나가는 곳’이었다. 그는 그냥 똑바로 걸어서 학교와 집을 오가는 것조차 힘들었던 시간을 버텨내야 했다. 그래서 크리스토퍼는 욕을 입에 달고 살며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존중을 배우지 못했다.
클라런스 역시 슬럼가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았다. 클라런스는 재능은 뛰어나지만 SAT(미국 대학 입학시험) 점수가 해럴대 입학 요구 점수에 한참 못 미친다. 그는 해럴대의 높은 수준의 학습을 감당하기에 너무 낮은 학교를 나왔다. 이들에 대한 추가 정보가 제공되면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다른 결론으로 이어진다. 조지아와 루시, 장학 프로그램 담당자 데이비드 세 사람은 학생들을 평가하기 위해 모였다. 그리고 조지아는 클라런스를 단호하게 반대한다.
공정의 기준은 공정한가?
공정이란 무엇일까?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 사회는 교육이나 취업에서 같은 출발선, 즉 기회의 공정에 주목한다. 부모의 경제력이 대학의 이름을 결정하고 부모의 권력이 부정입학, 부정 입사로 이어지는 일을 우리는 늘 경험하며 산다. 그래서 학생생활기록부에 외부 수상이나 외부 활동 이력을 쓸 수 없게 했다. 취업 이력서에 졸업한 대학을 기재하지 않기도 한다. 심지어 블라인드 테스트도 한다.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겠다는 거다. 그럼 이제 공정해졌을까?
두산인문극장 2022 연극 ‘편입생’ ⓒ두산아트센터
데이비드는 클라런스를 반대하는 조지아에게 말한다. “그 애는 결핍에서 시작했어요. 우리는 과잉에서 시작했고요." 조지아 역시 반박한다. “기준이 존재하는 이유가 다 있어요. 당신은 지금 기준을 무너뜨리고 우리 사회가 그동안 구축해온 시스템을 흔들려 하고 있어요.” 마지막 데이비드의 말은 공정의 기준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출발점이 다른데 어떻게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있어요.”
연극 ‘편입생’은 미국 교육 시스템의 불평등을 통해 교육계 전반에 퍼져 있는 부조리를 고찰한 작품이다. 모든 교육 ‘공정’의 초점이 대학에 맞춰져 있는 우리에게 ‘편입’은 학교 레벨을 높여 사회 진출에 높은 위치를 선점하려는 목적이 더 크다. 즉 이미 세상은 ‘공정’하지 않으며 우리는 거대한 ‘불공정’ 사회에서 아주 미미한 ‘공정’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연극 ‘편입생’의 한국 초연은 2020년 제11회 두산 연강예술상 공연부문 수상자인 윤혜숙이 연출을 맡았다. 이 공연은 기간 중 공연 관람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배리어프리 관람을 진행한다. 사전 신청자에게 개별 단말기를 통해 공연 중 한글 자막 및 소리 정보를 함께 볼 수 있는 문자통역을 제공한다. 그리고 작품 내용, 무대 설명 등이 포함된 공연 안내와 공연장 안전 대비 방법 등을 음성 소개 자료로 제공한다. 또한, 시각장애인 관객을 대상으로 공연의 시각적 요소들을 직접 접촉하여 이해할 수 있는 터치 투어를 3회 진행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