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음악을 찾아 듣지 않는다.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듣는 음악을 따라 듣거나 예전에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듣는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음악 말고도 알아두거나 확인해야 할 콘텐츠가 무궁무진하기도 하다. 문제는 그러면서 좋은 음악이 없다고 단정하는 사람들이다. 예전에는 좋은 음악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좋은 음악이 적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좋은 음악이 안 나오는 시대는 없다. 음악을 배우고 만드는 이들이 훨씬 늘었고, 음악을 만드는 기술도 더 나아졌는데 좋은 음악이 안 나올 리 없다. 그런 논리라면 요즘 음악을 찾아 듣는 사람들은 바보인가. 그런 식으로는 케이팝의 세계적인 인기를 설명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다만 자신이 찾아 듣지 않는 것이다. 아니 찾아 들어도 요즘 음악과 친해지지 못하는 것이다. 유행을 주도하는 세대가 달라지고, 자신의 감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특히 청소년기에 듣지 않은 음악에는 추억이 생기지 않기 마련이다. 꾸준히 듣지 않은 음악, 친숙하지 않은 음악이 좋아질 리 만무하다. 하지만 자신의 변화와 노력 부족을 탓하지 않고 음악을 탓하는 이들은 늘 들끓는다. 그런 이들에게는 한정원의 음반 [Circle] 역시 닿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노래가 없는 음악, 연주만으로 채워지는 음악은 이른바 대중성이 없는 음악으로 치부당하기 십상이다.
Jungwon - Into The Woods (Music Video)
그렇다고 뮤지션 한정원이 정원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정규음반 [Circle]을 숨어있는 음반이라거나 저주받은 음반 같은 구태의연하고 낡은 레토릭으로 수식하고 싶지 않다. 한국의 온라인 음악 서비스에서는 찾아들을 수 없지만, 애플뮤직과 밴드 캠프, 유튜브에서는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음반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 표현에 혹해 음반을 들을지 모르지만 그런 표현은 마케팅의 영역이지 비평의 역할이 아니다.
다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음반은 앰비언트 음악의 가치와 매력을 알려주고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앰비언트 음악에도 여러 가지 스타일과 지향이 있어 단순하게 표현할 수 없겠지만, 앰비언트 음악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감지할 수 있는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무의식이라거나 꿈이라거나 현실의 이면, 혹은 본질과 영원이라는 단어 또는 다른 표현을 써도 좋을 것이다.
앰비언트 음악은 현실을 초월하고 순간을 넘어선다.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고 존재의 빈틈으로 스며든다. 사이와 여백을 감지하게 하고 그곳에서 머무르게 한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비로소 존재하게 하는 음악이다. 나에게 그 존재를 알아차리게 하는 음악이고 교감하게 하는 음악이다. 감정을 고양시키기도 하지만, 마음을 열고 영혼을 깨우는 하는 음악에 가깝다.
정원의 음반에 담은 12곡 또한 ‘Life On Earth’나 ‘In The Beginning’처럼 심오한 주제를 건드리기도 하고, ‘Piles of Paper’처럼 고정된 사물을 응시하기도 한다. 빛, 존재, 순환, 물, 숲, 혜성, 공간을 가리키는 곡의 제목은 그 자체로 철학적이다. 하지만 자신이 연주하는 피아노와 키보드, 그리고 김성완의 색소폰과 다른 이들의 목소리 정도로 채우는 음악은 대개 미니멀하다. 곡의 길이 역시 짧고 템포는 느리다. 그렇지만 곡들은 모두 나름의 언어로 번득인다. 고요한 피아노 연주로 다가오는 곡이 있는가 하면, 키보드 연주를 가미해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곡이 있다.
흔한 뉴에이지 스타일의 곡만으로 채워진 음반이 아니다. 수록곡들은 친숙한 전개로 다가오다가 돌연 방향을 틀고 듣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해버릴 때가 빈번하다. 그래도 그 혼란은 음악의 언어로 매순간 보상을 받는다. 곡을 주도하는 멜로디의 선명함이 서로 다른 악기를 빌어 드러날 때 듣는 이들은 더 풍부한 사유가 가능해진다. 곡마다 사용한 악기의 배합과 울림은 맑거나 불투명하거나 다른 빛깔로 빛을 발한다. 그래서 제목으로 표상한 세계의 현현을 귀로 감지하면서 상상하고 침잠하게 된다. 거대하거나 드라마틱한 재현을 만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단편의 연작에 가까운 작품집이다. 찰나의 복구이며 완성이다.
무너지고 흔들리는 현실 앞에서 뮤지션이 좀 더 야심차게 재현하고 도전해도 좋았겠지만 그 역할은 자신의 몫이 아니라고 판단한 음악은 상투적인 표현에서 곧잘 이탈하면서 자신의 관찰에 충실하다. 불안에서 치유되기도 하고, 미지의 세계를 탐사하기도 한다. 그 순간마다 소박하고 정직한 아름다움이 있다. 허풍도 허세도 과장도 없는 울림이다. 보석 같은 음악은 곳곳에 있다. 좋은 사람이 어디에든 있는 것처럼. 때로는 그 좋은 사람이 바로 자신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