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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세상읽기]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Justitia)’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덩달아 복잡해지는 것이 법입니다. 십계명만 가지고도 돌아가던 세상이 수만 페이지가 넘는 법전을 만들어야 할 만큼 분화되고 어지러워진 것이지요. 그래도 변하지 않는 기본은 ‘정의’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신이 있습니다. 바로 정의의 여신‘유스티티아(Justitia)’입니다.

일곱 가지 중죄를 무찌르는 유스티티아 Justitia vanquishes the Seven Capital Sins c.1613 oil on panel 99.5 cm x 104.5cm ⓒ개인소장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한 손에는 저울을 든 여인이 7명의 죄인의 목에 줄을 걸고 그들의 죄를 심판하고 있습니다. 여인의 이름은 유스티티아, 정의의 여신이고 여신에게 잡혀 판결을 받고 있는 7명의 이름은 각각 교만, 나태, 음욕, 분노, 탐욕, 질투, 인색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7명의 죄인은 지금 상황이 어떤지 파악 못 하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자신들의 행동을 계속하고 있거든요.

16세기 중반과 17세기 초반에 플랑드르 지방에서 활동하던 화가 앙툰 클레에센스는 인간 세상 죄의 근원들을 심판하는 정의의 여신을 등장시켜 당시의 혼란스러움을 표현해냈습니다.

유스티티아는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처음 도입되었으니까 비교적 신참 신인 셈입니다. 그러나 정의의 여신은 곧 로마 황제들의 관심을 받게 되고, 많은 황제가 자신의 얼굴을 담은 금화를 발행할 때 반대편에 정의의 여신을 담았습니다. 정의를 지키고 정의의 편에서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일종의 각오이자 대중들에게 보여주는 몸짓이었습니다. 물론 각오와 말이 행동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지요.

유스티티아 Justitia 1857 oil on canvas 48.5cm x 26.7cm ⓒ개인소장


광장 입구에 서 있는 정의의 여신상에 햇빛이 내려앉았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석상 아래에는 풀이 자라고 있고 눈은 안대로 가져져 있습니다. 들고 있는 저울도 한쪽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정의의 여신을 돌보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도 그럴 것이 여신의 동상이 서 있는 뒤쪽 벽의 그림자에 숨어 예리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군인의 모습이 보이거든요. 그의 눈빛은 정의의 여신상 앞에서 참배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잡겠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정의의 여신상에 내리는 햇빛은 아주 차갑고 건조하게 느껴집니다.

독일 낭만파 화가 카를 스피츠베그는 19세기 중반 엄혹한 세태를 이렇게 담았습니다.

유스티티아는 원래 눈을 가리지 않는 모습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다가 16세기 이후 눈을 가린 모습으로 등장했는데, 여기에는 풍자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눈앞에 있는 진실을 못 본척한다는 뜻이었지요. 그러나 이 의미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편견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손에 들고 있는 저울로 공정과 공평을 실현한다는 좋은 의미로 변했다고 합니다. 들고 있는 칼은 권위와 정의롭지 않은 것에 대한 쾌도난마의 뜻이지요.

한국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은 눈을 뜨고 있고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습니다. 또 특이하게도 서 있는 모습이 아니라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법의 판단이 흔들릴 때마다 정의의 여신이 들고 있는 것은 법전이 아니라 힘있는 사람과 친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장부라는 비아냥을 받았습니다.

헌법 제정을 기념하는 제헌절을 앞두고, 문득 지금 정의의 여신은 어디에 계실까 궁금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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