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는 9유로(약 1만 2천원)짜리 티켓 하나만 사면, 한 달 내내 대중교통을 무제한 탈 수 있다. 정성규 재독한인총연합회 회장은 “반응이 폭발적입니다. 주변분들도 다 9유로 티켓을 끊었더라고요. 독일은 교통비가 비싼 편이거든요”라고 전했다.
이어진 말은 고민거리를 던진다. “저는 주로 자가용을 탑니다. 아무래도 노인들이 정거장까지 걸어가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는 게 쉽지는 않지요” 정 회장은 제2의 행정수도로 불리는 본에 거주한다. 시장직과 의회를 장악한 녹색당이 교통수단 전환(Modal Shift)을 추진하고 있다. 도로를 줄이고 자전거 길을 넓히고 있다.
수도 베를린 지역 대중교통 한 달 정기권은 약 80유로(10만 7천원) 수준이다. 다른 도시로 이동하려면 별도 요금을 내야 한다. 9유로 티켓은 파격적인 가계 지원 대책인 셈이다.
독일교통기업연합(VDV)에 따르면, 9유로 티켓은 시행 첫 달인 지난 6월 2,100만장이 팔렸다. 기존 연간 이용권 구매자 1천만명까지 더하면 3,100만장이다. 독일 인구가 8,388만명이니 3명 중 1명은 티켓을 산 셈이다. 연간 이용권은 매월 결제하는데, 9유로를 제외한 차액을 돌려준다.
9유로 티켓 시행의 직접적인 배경은 물가 급등이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독일 인플레이션은 급격하게 심화했다. 올해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기 대비 7.9% 올랐다. 3개월 연속 최고치로, 1973~1974년 석유 파동 당시와 비슷한 수준이다. 에너지 가격 급등이 물가 상승을 부추겼다. 난방유는 94.8%, 천연가스는 55.2%, 자동차 연료는 41% 올랐다. 에너지를 제외한 물가상승률은 4.5%였다.
독일 정부는 긴급 대책을 세웠다. 통합적인 부담 완화 정책, 이른바 구호 패키지(Entlastungspaket)다. 9유로 티켓을 비롯해 유류세 인하 등 에너지 가격 상승에 대한 대책이 담겼다. 아동·취약계층 수당을 추가 지급하고, 소득세도 낮췄다.
특단의 조치로 인플레이션 확산세가 꺾였다. 9유로 티켓 시행 첫 달인 6월 물가상승률은 7.6%로 전달 대비 소폭 완화됐다. 독일 통계청장은 “에너지 가격 인상은 여전히 높은 인플레이션의 주요 원인”이라면서도 “9유로 티켓과 유류세 인하가 6월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비상’이라더니 대책은 ‘사골’
고유가 상황을 맞은 한국 대응은 관성적인 수준에 머무른다. 정부가 지난달 제1차 비상경제장관회의에서 마련한 고유가 대응 방안을 보면, 기름값 인하에 초점을 맞추었다. 골자는 유류세 인하다. 이번달부터 유류세 인하 폭을 기존 30%에서 법정 한도인 37%로 확대했다. 지난해 11월과 올해 5월 이어진 유류세 인하의 연장선이다.
지난달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유류세 인하 법정 한도를 늘리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 7일 비상경제민생경제회의에서 “고유가 상황이 지속·악화할 것을 대비해 적기에 유류세 추가 인하가 가능하도록 유류세 탄력세율 한도 확대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국제 유가가 오를 때마다 유류세를 대폭 낮추겠다는 취지로 읽힌다.
유류세 인하는 비효율적이다. 국민 부담 완화 효과는 미미하지만, 정부 재정 손실은 크다. 세금을 내려도 국제 유가 상승이 지속되면 기름값은 떨어지지 않는다. 또한 정유사와 주유소가 유류세 인하분 일부만 유류 가격에 반영하고 나머지는 마진으로 챙겨 소비자에게 혜택이 온전히 돌아가지 않는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다.
세수 감소도 부담이다. 유류세 인하 폭이 커지고 장기화할수록 정부가 거둬들이는 세금이 줄어든다. 고유가·고물가 시기 취약계층 지원 등 재정 투입 수요는 커지는데 오히려 곳간이 쪼그라드는 셈이다. 현재 유류세 인하 수준을 연말까지 유지할 때 세수 감소 규모는 5조원 정도로 추산된다.
기후변화 문제가 대두되는 가운데 자가용 이용에 혜택을 준다는 점도 비판 지점이다. 대중교통 요금을 내려 자가용 이용을 줄이도록 유도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자가용이 없는 서민에게 대중교통 요금 인하 혜택이 집중된다는 점에서도 바람직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달 보고서를 내고 “각국 정부는 가장 도움이 필요한 가구를 보호하면서 국제 가격이 국내 가격으로 전달되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국제 유가가 오르면 유류세 인하로 구태여 기름값을 낮추려 하지 말라는 얘기다. 사회 안전망을 위한 재정 여력이 위축된다는 경고다.
9유로 티켓 이후 고민하는 독일
9유로 티켓은 한시적인 고유가 대책에 머무르지 않는다. 기후위기 대응책이다. 교통수단 전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전국민적인 실험이다. 볼커 비싱 독일 교통부 장관은 9유로 티켓과 관련해 “에너지 절감을 독려하는 동시에 대중교통을 더 많이 이용하도록 동기부여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효과는 가시적이다. 독일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6월 철도 운송 이동량은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보다 평균 42% 늘었다. 중거리(100~300km) 철도 운송 이동량은 6월 첫 주 기준으로 3년 전 대비 64% 증가했다. 같은 기간 단거리(10~100km)도 58%의 증가 폭을 보였다.
도로 교통량은 줄었다. 6월 중거리 도로량은 코로나19 이전 대비 6% 감소했다. 9유로 티켓 시행 전인 5월 기준으로는 13% 증가했던 것이 감소세로 돌아섰다. 단거리는 증가세가 이어지기는 했으나, 9유로 티켓 시행 전보다 증가 폭이 작아졌다.
독일 통계청은 “통근자들이 도로 교통에서 철도 교통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설명했다.
독일에서는 9유로 티켓 이후가 논의된다. 대중교통 할인을 상시화하자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표적인 게 ‘기후티켓(Klimaticket)’이다. 일 1유로, 연 365유로로 대중교통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배기가스를 배출하는 디젤 연료에 대한 세제 혜택과 완성차 기업에 대한 보조금을 줄여 기후티켓 재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제시된다.
기후티켓 도입으로 자가용에 대한 지원을 줄이고 대중교통 요금을 낮춰, 자가용에서 대중교통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하자는 구상이다. 현실은 반대다. 대중교통 요금은 2000년 이후 약 80% 인상된 반면, 주차 요금은 일정하게 유지됐다고 시민단체 독일환경지원은 설명한다.
독일환경지원은 “기후티켓을 통해 기후 친화적이고 깨끗한 이동성으로 더 빠르게 전환할 수 있다”며 “자전거와 보행자를 위한 공간, 발달된 대중교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독일 정부도 우호적이다. 비싱 장관은 지난 18일 “9유로 티켓은 대중교통 변화의 방향성을 보여 준다”며 “대중교통 요금 할인과 관련한 여러 대안을 검토하고 적용 가능한 가격 수준을 따져볼 것”이라고 언급했다.
대중교통 무료화는 이미 일부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다. 에스토니아 탈린은 2013년 유럽연합(EU) 국가 수도 중 처음으로, 지난해에는 룩셈부르크가 전 세계 국가 최초로 대중교통을 무료화했다.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도 올해 여름부터 미성년자·노인에게 대중교통을 무료로 제공한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은 2012년 연간 365유로의 시내 대중교통 티켓을 도입했다. 2019년 기준 인구 195만명 중 85만명이 티켓을 구매했다. 최근 들어 잘츠부르크와 포랄베르그 등 다른 도시도 비슷한 요금 수준의 티켓을 속속 도입하고 있다.
한국은 노인, 장애인, 국가유공자 대중교통이 무료인데 복지 차원의 접근이라는 점에서 기후변화 대응 일환으로 대중교통 할인 무료화를 추진하는 유럽 국가와 차이가 있다.
한국서 물살 타는 ‘대중교통 할인’
한국에서도 대중교통 요금 할인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에서 관련 법안 발의가 활발하다. 김성환·양이원영·우원식 의원실이 대중교통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고유가 시기 서민 부담을 덜고,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대중교통 요금을 할인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할인 방식에서는 발의안마다 차이를 보인다.
김성환 의원안은 일단 기존 요금대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되, 추후 정부가 교통비의 반값을 돌려주는 방식이다. 할인 기간은 올해 8~12월로 정했다. 정부·지자체가 대중교통과 관련해 지원할 수 있는 대상에 기존 공공기관과 운영 업체뿐 아니라 이용자도 추가해, 할인 근거를 마련했다.
양이원영 의원안은 독일 9유로 티켓 방식과 유사하다. 일정 기간 저렴한 정액권으로 근거리 대중교통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 요금 특별 할인 제도’ 도입을 규정했다. 물가 급등 등 유사시 5개월 이내에서 시행하도록 했다. 제도 시행 조건과 정기권 금액 등 구체적인 내용은 시행령에 위임했다.
우원식 의원안은 큰 틀에서 대중교통에 대한 정부 책임을 강화했다. 국가의 책무로 대중교통 운영 공공성 확보를 위한 요금 체계 개선과 재정 지원 강화를 명시했다. 우 의원은 지난달 기자회견을 열어 “대통령 의지로 비상경제장관회의를 통해 교통비 10% 할인 제도를 시행하라”고 촉구하면서 “대중교통법 개정안은 선 시행, 후 법적 근거 강화 취지”라고 설명했다.
독일은 9유로 티켓을 시행하면서 대중교통 운영 업체 지원 예산으로 25억 유로(3조 4천억원)를 책정했다. 재원은 지역화기금을 활용한다. 철도와 버스 등 지역 대중교통 운영을 지원하기 위한 기금이다. 연방 정부가 각 주 정부에 배분하면, 주 정부가 업체를 지원한다.
이용자에게 직접 환급하든, 할인 정기권 도입으로 수익이 줄어드는 대중교통 운영 업체를 지원하든, 요금 할인에는 돈이 필요하다. 김 의원실 관계자는 “교통비 환급 예산을 추산해보니, 독일이 9유로 티켓 예산으로 3개월간 3조원 정도 잡은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양이 의원실 관계자는 “정기권 도입으로 대중교통 운영 업체 지원이 필요하다면 정부가 할 수 있다”고 했다.
요금만 깎아주면 대중교통 탈까?
대중교통 요금 할인이 효과를 보려면, 인프라 확대가 병행돼야 한다. 실제 독일에서도 9유로 티켓 이후 철도가 연착되는 등 대중교통 수용 한계가 드러나기도 했다. 현지 언론은 9유로 티켓이 단순히 요금 할인에 그치지 않고 자가용에서 대중교통으로 전환을 유인하기 위해서는 대중교통이 더 편리한 이동수단이 돼야 한다는 전문가 조언을 전하고 있다.
교통 컨설팅 기업 PTV그룹은 “저렴한 티켓은 대중교통 이용 동기가 될 수 있지만, 자가용 이용자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며 “오랜 출퇴근 이동 습관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대중교통 서비스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이 자가용 출퇴근을 선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에스토니아 탈린의 경우 대중교통 무료화 이후 이용자 수가 매년 1%씩 증가해 활성화 효과가 나타나기는 했다. 다만, 도보 이동은 40% 대폭 감소한 반면, 여전히 출퇴근의 절반 이상이 자가용으로 이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룩셈부르크 역시 주로 도보나 자전거로 이동하던 사람의 대중교통 이용이 늘었고, 자가용에서 전환한 비중은 크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비수도권·농어촌 지역의 상대적으로 열악한 대중교통 인프라가 자가용 이용 감축 걸림돌로 꼽힌다.
독일 공영방송 뉴스 타게스샤우는 '9유로 티켓은 대도시 정책'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보도를 통해, 주변부 마을인 카스텔룬에서 주심 도시인 마인츠까지 자가용으로는 1시간이 채 안 걸리는데, 대중교통으로는 최소 2시간,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2시간 40분까지도 걸린다고 전했다.
또 다른 공영방송 ZDF도 농촌 지역에서는 9유로 티켓이 지지받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보도에서 언급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함부르크와 같은 대도시 지역에서는 긍정 평가가 절반을 넘었지만, 농촌 지역 대다수는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한 공기업은 독일 인구 8,300만명 가운데 대도시 거주자를 제외한 5,500만명은 대중교통이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기후티켓을 주도하는 독일환경지원도 할인과 더불어 인프라 구축을 강조한다. 독일환경지원은 “교통 정책은 수도권 밖 사람들의 이동성 관련 요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며 “시골 지역에 더 많은 정류장을 세우고 이동 시간을 단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지역 격차 상황도 다르지 않다. 국토교통부의 광역교통기본계획 자료에 따르면, 서울은 대중교통으로 이동할 때 소요 시간이 승용차보다 1.1배 더 걸린다. 승용차로는 1시간, 대중교통으로는 1시간 6분 걸리는 셈이다. 이 수치가 충청권, 전남, 부·울·경, 대구 경우 2.2~3배에 이른다.
도로 인프라에 쏠리는 예산
정부 정책에서 대중교통은 소외돼있다. 국토부가 올해 마련한 제4차 대중교통 기본계획을 보면, 총 교통량 중 대중교통 분담률의 2026년 목표를 28.6~32.2%로 잡았다. 2019년 대중교통 분담률 33%보다 낮다.
녹색교통운동은 “코로나19로 인한 분담률 감소를 회복한다는 설정이 고려된 수치이기는 하나, 탄소중립 실현 등 대중교통 혁신을 정책목표로 설정한 것에 비하면 매우 초라하고 낮은 지표”라며 “국토부는 대중교통 이용 확대에 대한 의지가 없음을 이번 계획에서 스스로 자인한 것”이라고 직격했다.
이번 계획에서 설정한 대중교통 분담률 목표로는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2030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2030년 40%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같은 기간 자동차 주행거리 4.5% 감축을 전제로 한다.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는 2050년 승용차 통행량 15% 감축을 명시했다. 대중교통을 확대하지 않고서 자동차 통행량을 줄이겠다는 건 앞뒤가 안 맞다는 지적이다.
국토부는 “친환경차 전환은 수송부문 온실가스 감축 핵심전략이나, 산업계 반발과 부처 간 이견으로 답보 상태”라며 “따라서 대중교통 이용 확대와 친환경 교통수단 활성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김광일 녹색교통운동 사무처장은 “뉴욕·LA·런던·파리·싱가폴 등 여러 도시는 이미 자가용 분담률을 낮추고 대중교통을 중심으로 한 자전거와 보행의 분담률을 60~80%까지 높이는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며 “대중교통 기본계획은 각 지자체가 주도하는 대중교통 체계에 대한 가이드라인인 만큼 전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재정 투입도 대중교통보다 도로 인프라 건설에 집중된다. 교통 관련 재원은 주로 교통시설특별회계에서 나온다. 도로·철도·공항·항만 시설 확충과 관리·운용에 쓰게 돼 있다.
항목별 재원 배분율을 보면, 도로가 43~49%로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이어 철도(30~36%)와 항만(7~13%)이 뒤를 잇는다. 대중교통 지원을 포함하는 교통체계관리는 10% 이하에 그친다.
대중교통 재정이 충분하지 못 하다보니 운영기관이 부담을 떠안게 된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이용자 수가 감소해 손실이 불어난 상황이다. 특히 지하철은 기존 무임수송비용으로 이중고를 겪고 있다. 서울·부산·인천·대구·광주·대전 지역 도시철도 운영기관의 무임수송비용은 2016년 5,640억원에서 2019년 6,236억원으로 불었다. 지자체도 중앙정부에 대한 재정 의존도가 높아 대중교통 지원에 소극적이다.
교통시설특별회계 배분율을 조정하자는 제안이 나온다. 도로 항목 비중을 줄이고 교통체계관리 항목을 늘리자는 것이다. 이영수 사회공공연구원 연구위원은 “대중교통에 사용할 돈이 부족한 게 아니다”라며 “교통시설특별회계를 통해 대중교통 지원에 대한 예산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