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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문재인의 반팔 노타이 vs 윤석열의 풀정장과 실내온도 21도

문득 옛 기억(아주 엿 같았던)이 하나 떠오른다. 2016년의 일이었다. 그해 여름은 실로 더웠다. 무더위가 한창일 때 당시 대통령 박근혜가 이정현 새누리당 신임 대표 등을 청와대에 초대해서 오찬을 가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전기요금 인하 문제를 논의했다.

그런데 이때 사진을 보면 박근혜는 분홍색 긴팔 정장을 입고 있었다. 이정현도 긴팔 셔츠에 양복까지 입었다. 무더위로 고통 받는 민중들을 위해 전기요금 인하를 논의하는 그 자리에서 복장이 꼭 그래야 되나? 청와대 시원하다고 자랑하는 거냐 뭐냐?

더 황당한 것은, 이 자들이 오찬으로 뭘 쳐드셨느냐 하는 거다. 무려 송로버섯과 샥스핀을 쳐드셨다. 나는 대통령이면 송로버섯을 쳐드실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물론 검약한 대통령이 더 보기 좋지만 워낙 중요한 직책에 오른 인물이니 그의 미감 취향이 그렇다면 쳐드실 수도 있는 거다. 하지만 쳐드시더라도 몰래 쳐드시면 좀 좋냔 말이다.

민중들의 전기요금 6,000원 깎아준다고 생색내는 자리에서 굳이 그 비싼 걸 공개적으로 쳐드실 이유가 도대체 어디 있나? 정치를 한다는 자들의 공감 능력이 이리도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내 눈에는 놀랍기만 했다. 보다가 열이 확 받아서 선풍기 틀어놓고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문재인의 반팔 vs 윤석열의 21도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회의 사진에서 에어컨에 찍힌 실내 온도가 21도였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신용회복위원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그 회의 이름은 무려 ‘제2차 비상경제민생회의’였다. ‘공무원들이 일하는 사무실의 에어컨은 28도에 맞추라고 해놓고 대통령만 21℃에서 회의했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다.

그 숫자가 현재 온도가 아니라 설정 온도라는 주장도 나온 모양인데 웃긴 이야기다. 설정 온도를 21도로 해놓았다는 사실은 결국 실내 온도를 21도까지 내리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졌다는 이야기 아닌가? 게다가 <오마이뉴스>의 확인 보도를 보니 그 에어컨 기종은 기계에 표시되는 온도가 설정 온도가 아니라 실내 온도였단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나는 그 사진에서 더 뚜껑이 열리는 장면을 보았다. 그 무더운 여름날, 윤석열 대통령의 복장이 긴팔 셔츠에 겉옷까지 걸치고, 넥타이까지 갖춘 풀 정장 차림이었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그렇게 입으면 당연히 덥다. 그 모양으로 대통령이 납시면 어디건 실내 온도를 21도 언저리로 낮출 수밖에 없다.

대단한 일도 아닌데 왜 그리 열을 내냐고? 그렇지 않다. 이건 공감 능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름이 되면 에어컨을 틀 여력이 안 되는 민중들은 집에서 거의 홀딱 벗고 다닌다. 그것으로도 견디기 어려운 한낮에는 은행을 찾는다. 눈치는 좀 보여도 그래야 무더위를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가?

정치인에게는 이런 민중의 고통을 이해하는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 이걸 이해하면 진심으로 민중들이 무더위를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고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감수성이 없으면 민중들의 고통 호소가 징징거림으로 들린다.

긴팔 정장 입고 송로버섯 요리 쳐드시면서 전기요금 6,000원 인하를 논의했던 박근혜는 민중들의 징징거림이 얼마나 같잖았을까? 긴팔 셔츠에 겉옷까지 껴입어도 더울 리 없는 21도에서 회의를 하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민중들의 고통이 전해질 리가 없는 거다.

윤석열 대통령이 14일 서울 중구 중앙 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에서 열린 제2차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뉴시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여름이 되면 늘 반팔 셔츠에 노타이 차림으로 회의를 주재했다. 실제 2018년 여름휴가에서 복귀한 직후 가졌던 대통령 주재 수석 보좌관 회의 사진을 보면 회의 참가자 중 단 한 명도 타이를 착용한 사람이 없다. 대통령을 비롯해 참석자 절반 정도가 반팔 셔츠를 입었다.

아무 차이가 아닌 것 같은가? 천만의 말씀, 이게 바로 정치인의 본질을 가르는 근본적 차이다. 그 수석 보좌관 회의에서 문 대통령은 전기 요금 누진제 완화를 지시했다. 이러면 사람들은 진정성을 느낀다. 바로 이 진정성과 공감능력이 지도자의 자질을 뜻한다.

무뎌지는 공감 능력

경제학자들은 인간을 오로지 이익과 손실에만 반응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할 때 공감을 통해 결정을 내린다는 ‘호모 엠파티쿠스’라는 사실을 더 지지한다.

공감 능력이란 쉽게 말해 타인의 감정을 그대로 복제해서 느끼는 것이다. 인간은 거울 뉴런이라는 신경 네트워크를 통해 타인의 감정을 그대로 복제한다. 이탈리아의 신경심리학자 지아코모 리촐라티(Giacomo Rizzolatti) 연구팀이 원숭이 실험을 통해 처음 발견한 이 거울 뉴런은 인류의 가장 혁신적인 발견 중 하나로 꼽힌다.

이런 감정은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강해진다. 내 경험상 이런 공감 능력을 을 가장 잘 설명하는 예시는 드라마 <다모>의 명대사다. 부상을 당한 하지원을 바라보며 이서진은 말한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고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나도 아픈 이 감정, 이것이 바로 공감 능력이다.

게다가 이 공감 능력은 후천적으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인 것이다. 한 살짜리 아이 앞에서 “아빠 손가락 다쳤어요. 아이 아파!”라고 엄살을 떨어보라. 말도 못하는 그 아이가 뒤뚱뒤뚱 걸어와 백발백중 하는 행동은 아빠의 손을 잡고 호~ 하고 불어주는 것이다. 아빠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은 그 마음, 이게 바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태어나는 공감 능력이다.

그런데 캐나다 온타리오 맥매스터 대학교 수크빈더 오브(Sukhvinder Obh)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권력을 가질수록 이런 공감 능력을 잃는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전기요금 6,000원 깎아주면서 긴팔 정장 입고 송로버섯을 쳐드신 박근혜다.

세월호의 침몰로 수백 명의 소중한 생명이 사라지는 판국에 그는 눈물 한 방울을 제대로 흘리지 못했다. 그리고 벌어진 세월호 참사의 처리 과정을 보라. 그게 정녕 나라였던가? 권력자가 민중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이것이다.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의 명저 <공감의 시대>를 번역한 이화여대 최재천 석좌교수는 역자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감은 우리와 유전자의 99% 가량을 공유하는 침팬지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우리와 진화적으로 그리 가깝지 않은 온갖 동물에게서도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이는 동물의 공감이 진화적으로 뿌리가 깊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대통령처럼 남의 아픔에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합니다.

공감 능력이 다양한 동물들에 존재하는 진화된 속성이라면 우리 종 즉 호모사피엔스의 구성원에게는 보편적으로 나타나야 할 텐데,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넘치도록 우러나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메말라 있을까요?

저는 이 책을 번역하며 깨달았습니다. ‘공감은 길러지는 게 아니라 무뎌지는 것’이라는 걸. 우리는 모두 충분한 공감 능력을 갖추고 태어납니다. 공감 능력은 우리 종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주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 타고난 습성이 무너지지 않도록 사회가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 서로 다독이며 상처를 보듬어야 할 때입니다.”

그렇다. 공감은 길러지는 게 아니라 무뎌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중들은 무더위에 고통을 받고 있는데 실내 온도 21도에 긴팔 풀정장으로 태연히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주재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공감 능력은 심각하게 무뎌져 있다고 봐야 한다. 내가 보기에 그의 공감 능력은 제로에 가까운 상태다.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주재하며 윤 대통령은 민중들이 정말로 얼마나 비상한 상황을 맞이했는지 제대로 공감했을까? 내가 던진 질문이지만 참으로 개뿔 같은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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