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지난 2일 출범한 행정안전부 경찰국을 찾아 근무자들을 격려한 뒤 나서고 있는 가운데, 김순호 경찰국장이 뒤에서 듣고 있는 모습. (자료사진) 2022.08.02. ⓒ뉴시스
“너 여기 왜 왔냐?”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이던 33년 전, 부천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도중 갑작스럽게 치안본부에 연행됐다가 풀려나온 A씨가 절친한 친구였던 김순호 현 행정안전부 경찰국장을 찾아가 들었던 말이다. 이 한마디는 김 국장이 노동운동 조직을 밀고했다는 의심이 더 뚜렷해지는 계기가 됐다.
인노회 사건 터질 때 잠적한 김순호, 그리곤 돌변했다
당시 A씨와 김 국장은 성균관대 81학번 동기이자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인노회) 부천지구위원회에서 함께 활동한 긴밀한 관계였다. 두 사람이 서로를 알게 된 건 인노회를 통해서다. 김 국장이 부천지구위원회 위원장, A씨가 부천지구위원회 1분회 분회장이었다.
A씨가 김 국장을 마지막으로 만난 그날은 1989년 4월 29일 인노회의 산파 역할을 했던 최동 씨와 함께 치안본부로 연행됐다가 2~3일 만에 풀려나온 후였다. 최 씨는 김 국장에게 ‘인노회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던 성균관대 한 학번 선배였다. A씨가 김 국장이 돌연 잠적했다는 소식을 들은 건 풀려난 직후였다. 그때 ‘김순호가 우릴 밀고한 거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가자 그를 직접 찾아 나섰던 것이었다.
7일 경기도 이천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서 열린 ‘제32주기 고 최동 열사 추모제’에서 민중의소리와 만난 A씨는 “제가 연행되고 진술을 거부하고 있었는데도, 이미 치안본부가 너무 많은 것을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저희 분회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며 “A3용지로 전체 조직도까지 보여주는 걸 보며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까지 알 수 있을까 생각했다. 저도 모르던 것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인노회는 회장단, 사무국, 조직국, 그리고 조직국 산하에 부평·주안·부천지구위원회로 구성돼 있었다. 또한 각 지구위원회는 여러 개의 분회들로 구성됐고, 회원들의 활동은 분회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렇기 때문에 회원들은 다른 분회 회원들을 잘 알지 못했다는 게 인노회 사건 관련자들의 설명이다.
A씨는 “조사를 받을 땐 몰랐는데 나오고 나서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보니 ‘(경찰에 인노회) 내부 조력자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그 ‘내부 조력자’로 가장 의심이 되는 사람으로 김 국장을 지목했다.
A씨는 “부천지역의 그 조직표를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사실 그 친구(김순호)밖에 없었다. 그 당시 잡혀 들어간 사람들 중에는 그런 조직도를 그릴 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며 “게다가 김순호가 그때 잠적했기 때문에 가장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앞서 연행된 사람들은 부천 지역에서 활동하던 회원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를 경찰에 알린 사람은 따로 있었을 거라고 본 것이었다.
A씨는 잠적한 김 국장을 찾기 위해 김 국장의 누나 집을 혼자 찾아갔는데, 공교롭게도 김 국장이 거기 있었다. 그날이 A씨가 김 국장을 마지막으로 본 날이다. A씨는 “지금 생각해보면 벨을 누른 저랑 눈이 마주쳐서 어쩔 수 없이 나온 느낌이었다. 그때 그 친구는 굉장히 침울한 분위기였다. 그동안 김순호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고 떠올렸다.
이어 “근처 다방에 가서 얘기하는데 갑자기 저한테 ‘너 여기 왜 왔냐’고 말하더라. 그렇게 얘기할 상황이 아니었다. 오히려 ‘괜찮냐’, ‘고생 많았다’ 이런 식으로 얘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다른 부분들은 너무 오래되어서 (좀 희미해졌는데) 그 부분만큼은 너무 충격이어서 기억이 난다. 그래서 저는 더욱 더 (김순호가 프락치였다는) 의심이 커졌다”고 말했다.
인노회 사건 이후 노동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오던 A씨가 다시 김 국장을 마주하게 된 건 뉴스를 통해서다. 최근 김 국장이 행정안전부의 초대 경찰국장으로 임명됐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다. A씨는 “놀라기보다는 씁쓸했다”고 말했다.
경기도 이천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위치한 최동 열사의 묘. ⓒ민중의소리
인노회 사건 담당한 부서로 경찰 특채된 김순호 ‘프락치’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인노회 사건의 배경에 ‘김순호’가 있다는 의심은 그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이미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구체적인 정황이 언론보도를 통해 드러나면서 의심은 확신으로 더욱 굳혀지고 있었다.
김 국장은 1983년 3월 운동권 서클인 ‘심산연구회’에 가입해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군대에 강제징집 됐다.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전두환 정권이 벌인 이른바 ‘녹화사업’의 대상자였던 것이다. 1983년 11월엔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심사를 받고 중간 등급인 ‘B급’ 관리대상이 됐다.
이후 김 국장은 서클 선배인 최 씨를 따라 인노회에 가입했다. ‘김봉진’이란 가명을 쓰며 부천 지역 조직 책임자인 부천지구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던 중 1989년 2월 인노회가 느닷없이 이적단체로 낙인찍히고 일반 회원을 포함해 18명이 줄줄이 연행돼 그중 15명이 구속됐다. 그 무렵 돌연 잠적한 김 국장은 같은 해 8월에 ‘대공공작업무 관련자’로 특별 채용돼 경찰관(경장급)이 됐다. 공교롭게도 김 국장이 경찰에 첫 발을 내디딘 곳은 다름 아닌 인노회 사건을 담당했던 치안본부 대공수사3과였다.
그러는 사이, 김 국장의 선배인 최 씨는 치안본부에 연행돼 조사 과정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고, 이후 우울증과 정신분열증세를 얻어 그해 구속된 지 4개월여 만에 집행유예로 출소했다. 그리고 이듬해 8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때 나이 겨우 서른 한 살이었다. 김 국장이 실제 ‘프락치’ 역할을 했던 것이라면, 최 씨의 죽음도 그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는 대목이다.
A씨는 “(인노회 사건 이후) 제가 결혼도 준비하면서 작은 카페를 열었다. 그 당시 정신적으로 굉장히 힘들어하던 최동 선배가 바람 좀 많이 쐬어야겠다면서 후배와 같이 카페에 몇 번 찾아와서 앉아있다 가곤 했다”며 “최동 선배 역시 치안본부에서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던 것에 대해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고 떠올렸다. 특히 누군가 밀고를 했을 것이라는 의심 때문에 정신적 압박감은 더 컸을 것으로 봤다. A씨는 “계속 누군가 날 감시하고 있는 것 같다, 날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식의 얘기들을 많이 했다”며 안타까워했다.
김 국장의 한 학년 선배로 최 씨와 함께 ‘심산연구회’를 만들었던 B씨는 “김순호는 최동이 굉장히 아끼던 후배였다. 그래서 여러 의혹이 나왔을 때 ‘설마 김순호가 그랬겠냐’ 하면서 나는 사실 믿지 않았다. 그런데 그 뒤로 나오는 구체적인 정황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며 “거의 사실인 거 같다. 이젠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고 본다. 김순호 본인이 사실은 사실대로 말하고, 실제 그런 행위를 했다면 관련된 사람들한테 (죄를) 뉘우치는 자리도 필요하다고 본다”고 밝혔다.
김 국장은 인노회 사건과 관련해 언론에 ‘운동권에 회의를 느껴 고향으로 내려가 고시 공부를 하다가 내적 갈등이 심해져 같은 해 7월쯤 직접 서울 홍제동 대공분실을 찾아가 인노회 사건 책임자에게 그동안의 활동을 자백했다. 다만 동료들에게 위험할 만한 진술은 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해명한 상태다.
당시 인노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C씨는 “2014년에 김순호에게 전화해서 ‘내가 너한테 물어볼 게 있으니 한번 보자’ 해서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땐 거짓말을 하더라. 그 뒤로는 연락을 받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어 “최근에 경찰국장이 되고 나서 인노회 사건으로 언론보도에 나오니까 뭔가 해명을 한다고 나에게 연락을 취해오더라. 내가 며칠 피하다가 전화를 해서 ‘그렇게 떳떳하면 여기 추모제에 오라’,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오라’고 했다. 그랬더니 (김 국장이) ‘내가 거기 갈 입장은 못 되는 거 알지 않느냐’고 하더라”고 전했다. 김 국장은 32년 동안 추모제에 단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인노회 사건은 2020년 4월 재심을 통해 대법원으로부터 “인노회는 이적단체가 아니다”라는 최종 판결을 받았다. 인노회 사건 관련자들은 이제 김 국장이 직접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들은 이날 성명을 통해 “30여 년 만에 독재정권이 씌운 이적단체라는 굴레에서 벗어났지만 기쁨도 잠시, 우리 인노회 사건 관련자들은 최근 1989년 자취를 감추었던 김순호가 그해 8월에 보안특채로 경찰이 되어 곧바로 인노회 회원들이 조사를 받던 그 치안본부 대공3부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데다가 그가 치안본부 부활이라고 비판받는 행안부 경찰국 초대국장으로 임명된다니 참담한 마음을 이루 금할 수가 없다”고 밝혔다.
이어 “10여 년간 긴밀하게 함께 활동해온 선배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한때나마 의기투합했던 친구와 동료들을 치안본부가 이적단체 가입죄로 조작해 탄압할 수 있게 협력했다면, 이제라도 진상을 낱낱이 스스로 밝히기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인노회 회장이었던 안재환 씨는 이날 추모제에서 “인노회가 이적단체가 아니라는 대법원 판결을 받았고, 최동 열사도 조만간 모든 활동들이 무죄가 되는 걸 보게 될 것”이라며 “이런 속에서 저희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게 왜 인노회가 탄압의 첫 번째 자리에 섰는지, 누가 우리들의 합법적이고 대중적인 활동을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틀에 가둬두는 짓을 했는지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이걸 밝히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성균관대민주동문회도 추모사를 통해 “많은 동지의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 호가호위하면서 작금에는 경찰국장으로 임명 받은 자의 추악함을 벗겨내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