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투기 경기에서 피투성이가 된 선수들이 용맹스럽게 싸우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나라면 겁도 나고 아파서 죽을 것 같은데, 그 사람들은 고통을 모르는 전사처럼 쉴 새 없이 주먹을 뻗는다.
이유가 있다. 사람의 몸은 일정 정도의 스트레스를 능히 극복하도록 설계돼 있다. 뇌는 공포나 스트레스를 느끼면 몸속에 아드레날린 혹은 코르티솔이라는 이름의 호르몬을 분비한다. 아드레날린은 특정 근육의 혈관을 확장시킨다. 혈관이 확장되면 그 쪽으로 몸의 에너지가 확 쏠려서 비정상적인 힘이 발휘된다. 일시적인 슈퍼맨이 되는 셈이다.
원시 인류는 매우 연약한 포유류였지만 스트레스 호르몬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자가 나타나면 스트레스 호르몬 덕에 비정상적인 힘으로 빨리 도망갈 수 있었다. 격투기 선수들이 피투성이로 싸우면서도 고통을 거의 못 느끼는 이유도 아드레날린 때문이다. 온 몸의 신경이 싸우는 일에만 집중돼 고통을 인식하는 기능이 일시적으로 정지된 것이다.
스트레스 호르몬의 슬픈 진실
‘와, 그거 참 멋진 이야기인데?’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스트레스 호르몬은 인간을 일시적인 슈퍼맨으로 만들지만,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고통을 느껴야 하는 동물이다. 몸이 아프다는 것은 ‘더 이상은 무리야. 이제 그만 둬야 해!’라는 몸의 신호다. 그런데 아드레날린은 이 신호를 무시하고 몸의 힘을 계속 한곳에 집중시킨다. 이 때문에 다른 영역의 기능이 정지된다. 아드레날린이 많이 분비되면 소화나 배변, 사색 등의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이런 ‘일시적 슈퍼맨’을 멋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시적 슈퍼맨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몸은 다른 방식으로 서서히 죽어간다. 사자한테 물려죽지는 않지만, 소화 장애로 몸이 약해져서 죽는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유일한 해법은 반드시 스트레스 호르몬에 준하는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사자한테 쫓기다 안전한 동굴에 들어오면 사람의 몸에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줄어들고, 휴식 호르몬 혹은 보상 호르몬이 온 몸에 퍼진다. 심장 박동이 느려지고 근육도 이완된다. 소화기능이 다시 돌아오고 면역 기능도 활성화된다. 이때가 되면 비로소 사람은 긴장을 풀고 주변과 소통을 시작한다. 사랑도 하고, 추억도 나눈다. 이 모든 것들은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됐을 때에는 불가능했던 일들이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학부모들이 5일 오전 서울 용산구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대회의실에서 만5세 초등학교 취학 학제개편안에 대한 영유아 학부모 긴급 간담회를 열었다. 한 학부모가 발언하던 중 울먹이고 있다. 2022.08.05. ⓒ뉴시스
이 두 과정이 반복돼야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래서 해가 진 이후의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는 아침부터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해 낮에 최고조에 이른다. 생존을 위해 몸이 긴장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해가 떨어지면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가 서서히 줄어든다. 사람은 이때 사랑하고, 소통하고, 생각하고, 추억 나누며 인간다운 삶을 살기 시작한다.
휴식은 효율적이다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자. 하버드 대학교 경영대학원 레슬리 펄로(Leslie Perlow) 교수의 실험 중 이런 것이 있다.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는 컨설턴트들을 두 그룹으로 나눴다. 첫 번째 그룹에게는 주 50시간 이상 일을 시키고 휴가도 일절 못 쓰게 막았다. 또 각종 통신기기를 이용해 24시간 내내 회사와 연결된 상태로 일을 하도록 했다.
두 번째 그룹에게는 주당 40시간만 일을 시켰고 휴가도 남김없이 쓰도록 장려했다. 퇴근 후에는 고객과 통화를 일절 못 하도록 막아 업무와 완전히 단절된 온전한 휴식을 누리도록 했다.
어느 쪽이 더 높은 업무 효율을 보였을까? 이 질문을 잘 봐주시기 바란다. ‘어느 쪽 노동자들의 업무 만족도가 높았을까?’를 물은 게 아니다.
업무 만족도는 당연히 두 번째 그룹이 높다. 펄로 교수는 업무 만족도를 측정한 게 아니라 업무 효율성을 측정한 거다. 그런데 두 그룹의 업무를 점수로 평가한 결과, 업무 효율성마저 압도적으로 두 번째 그룹이 더 높았다.
펄로 교수는 광범위한 후속 연구를 통해 주 5일이라면 하루 7시간, 하루 8시간이라면 주 4일 노동이 노동자들의 효율을 최대로 높이는 적절한 노동 시간임을 밝혀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어떤 방식이건 오후 6시 이후에는 무조건 노동을 중단해야 한다. 장시간 끝없이 일하는 것보다 적절한 휴식이 동반돼야, 즉 긴장과 이완이 적절히 반복돼야 노동의 효율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창의성은 쉴 때 발전한다
하나만 더 살펴보자. 뇌는 뭔가에 집중할 때에는 에너지를 사용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멍 때리고 있을 때에도 뇌가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상태를 전문 영어로 디폴트 모드(Default Mode), 혹은 내정상태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내정상태에서 뇌는 무언가에 집중할 때보다 오히려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다. 멍 때린다는 것은 뇌가 휴식을 취한다는 뜻일 텐데, 왜 그 시간에도 뇌가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멍 때릴 때조차 뇌가 무언가를 쉴 새 없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뇌를 촬영해보면, 집중을 할 때 움직이는 뇌의 영역과 휴식을 할 때 움직이는 뇌의 영역이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휴식을 할 때 움직이는 뇌의 영역(전전두엽이나 쐐기앞소엽 등)이 바로 창의성의 영역을 관장한다.
논리적 추론, 올바른 의사결정, 미래에 대한 계획, 자기 성찰 등이 이 영역에서 결정된다. 그런데 쉬지 않고 뭔가를 하는 사람은 이쪽 뇌의 기능이 퇴화한다. 한마디로 더럽게 안 창의적인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Archimedes)가 왕으로부터 받은 어려운 과제를 해결한 장소는 연구실이 아니라 목욕탕이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노곤하게 졸던 아르키메데스 머리에 번쩍 하고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알몸으로 튀어나와 “유레카!”를 외쳤다. 이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인간의 뇌는 휴식을 취할 때 창의적으로 변한다.
요즘 대세 드라마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마침내 정주행했다. 그 드라마에 등장하는 어린이 해방군 사령관 방구뽕의 확신에 찬 선언이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어린이는 지금 당장 놀아야 한다. 어린이는 지금 당장 건강해야 한다. 어린이는 지금 당장 행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