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새 버전으로 돌아온 추억의 ‘빨강머리 앤’, 음악극 ‘붉은머리 안’

음악극 ‘붉은머리 안’ ⓒ북극성

주근깨 빼빼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상냥하고 귀여운 빨강머리 앤, 외롭고 슬프지만 굳세게 자라
가슴에 솟아나는 아름다운 꿈, 하늘엔 뭉개구름 퍼져나가네
빨강머리 앤, 귀여운 소녀 빨강머리 앤, 우리의 친구
- KBS 2TV판 ‘빨강머리 앤’ 주제곡

‘빨강머리 앤’이 방영되던 초등학생 시절, 어떤 애니메이션도 ‘빨강머리 앤’을 대신할 수 없었다. 반드시 그날 그 시간이 되면 초록 지붕 집에 사는 빨강머리 소녀 이야기를 보기 위해 초인적인 힘으로 숙제를 마무리했다.

앤은 그림처럼 예쁜 주인공이 아니다. 늘 사고뭉치에 상상력으로 가득한 소녀다. 캐나다 애번리 마을의 매튜와 마릴라 남매가 농사일을 도울 남자아이를 입양하려다 우연히 초록지붕 집에 데려온 소녀다. 왜 이 이야기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어째서 우리는 빨강머리 소녀 앤의 이야기를 애니메이션과 책으로 보는 것도 모자라, 연극 무대에까지 만나길 마다하지 않는 걸까?

추억의 한 페이지를 당당하게 차지했던 빨강머리 소녀, 앤

어린 시절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접한 ‘빨강머리 앤’은 나에겐 처음부터 애니메이션이었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란 세계적인 작가의 소설이 원작이란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나에게 앤은 주근깨 가득한 얼굴에 빨강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푸른 들판을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마음속 영웅이었다. 앤은 그 후로도 유년의 증표처럼 추억의 한 페이지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앤을 연극에서 다시 만났는데, 이름이 ‘빨강머리 앤’이 아니라 ‘붉은 머리 안’이었다.

2021 산울림 고전 극장 ‘우리가 사랑한 영미 고전’ 기획에서 마지막 작품으로 무대에 오르며 화제를 모았던, 음악극 ‘붉은 머리 안’이 2022년 8월 다시 관객을 만나고 있다. 음악극 ‘붉은 머리 안’은 어린 시절 본 ‘빨강머리 앤’과 완전히 다르다. 이는 앤이 미국식 발음이라면 안은 영국식 발음이란 1차원적인 구분과는 사뭇 다르다.

“넌 이름이 뭐니?”, “안이에요” ,“아니, 네 이름이 뭐냐니까?” , “안이라니까요?” ‘붉은 머리 안’은 우리 말이 지닌 언어의 해학성을 끄집어 내 한국적 재치와 웃음을 담아냈다. 원작이 원작 아닌 듯 바탕을 이루고 그 외 가능한 모든 것은 변화시켰다. 정말 완전히 다른 ‘빨강머리 앤’이 탄생했다.

새로운 어법과 독특한 구성으로 일본 애니의 추억을 갈아 치우다

우리 모두가 아는 이 붉은 머리 소녀의 이야기는 뜬금없고 기상천외하게 전개된다. ‘안’을 제외한 나머지 배우 4인이 10인 이상의 배역을 오고 가며 그야말로 난리 법석 블루스를 펼친다. ‘빨강머리 앤’의 주제곡 대신 김창완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가 주제곡이 되었다. 빨강머리가 갖는 유아적 이미지는 좀 더 한국적인 소녀 이미지로 성장했다. 관객들은 이 기상천외한 전개를 찰떡같이 알아들을 수 있다. 관객에게 마법을 걸기라도 한 듯 ‘붉은 머리 안’의 이야기는 새로운 어법과 독특한 구성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추억을 갈아 치웠다.

움직임과 말, 소리만으로 기차역이 되고, 마차가 되고 배꽃 가득한 농장 길이 된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초록 지붕이 관객들의 상상 속에 펼쳐지며 어린 시절 애니메이션 속 ‘앤’이 무대 위에 ‘안’이 되어 모험 가득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꽃이 내 무릎에 떨어지기로 했어.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어.” 안의 이 독특한 화법은 모든 행위의 주체를 나로 바꾸어 버린다. 관객은 그런 ‘안’의 화법에 매료되고 만다. “미안해요” ,“죄송해요”, “나는 안 죄송해요”, “나는 미안하지 않기로 했어요”, “나는 나를 사랑하기로 했어요” 늘 미안하고 죄송했던 한 소녀는 자신을 존중해 주는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인간으로 성장한다. ‘붉은 머리 안’의 진짜 이야기는 여기에 있다.

음악극 ‘붉은 머리 안’(공동 각색 홍사빈, 홍단비/연출_홍단비)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간 머리 앤’을 각색한 작품이다. 붉은 머리 ‘안’ 배역을 맡은 배우 최하윤은 공연을 앞두고 발가락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깁스를 하고 목발의 도움을 받아 무대에 오른 이 배우의 모습은 그대로 ‘안’이 되었다. 아마 진짜 ‘안’이었다 해도 부상은 아랑곳 않고 무대에 올라 쉼 없이 이야기하고 쉼 없이 실수하고 쉼 없이 실패하고 상처받으면서 쉼 없이 성장했을 것이다. 목발로 무대에 올라선 ‘붉은 머리 안’은 그래서 더 살아있는 감동을 준다.

필자는 공연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지만 공연이 끝나면 관객들의 반응을 살피는데 집중한다. 막이 내리자 공연의 감흥이 가시지 않는 듯 중년 여성 세 사람이 모여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나 이 공연 너무 좋다” ,“나 너무 좋아서 눈물 났어”, “김창완 노래랑 너무 찰떡이다” 십 대 소녀처럼 모여 서서 “너무 좋아”를 연신 외치는 그녀들은 흡사 중년 ‘안’의  모습 같았다. ‘빨강머리 앤’이 아니라 ‘붉은 머리 안’으로 돌아와 줘서 반가웠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음악극 ‘붉은머리 안’

공연날짜 : 2022년 8월 5일(금) – 8월 28일(일)
공연장소 : 브릭스씨어터
공연시간 : 평일 오후 20시/주말 및 공휴일 오후 15시 (화요일 공연 없음)
러닝타임 : 약 80분 (인터미션 없음)
관람연령 : 8세 이상 관람가 (초등학생 이상 관람가)
원작 : 루시 모드 몽고메리
창작진 : 공동각색 홍사빈 홍단비/연출 홍단비/작곡 심준보/안무 안미경/리듬 김솔지/무대디자인 설예준/조명디자인 곽태준/음향감독 박봉/분장디자인 석필선/무대감독 최정환/조연출 이정주/제작PD 이은경/기획 임수빈, 김유미
출연진 : 최하윤, 박강원, 허영손, 임모윤, 김재민, 최윤서
공연문의 : 02-6956-5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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