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위원장과 조합원들이 31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열린 '노조법 개정, 노란봉투법 제정 촉구 민주노총 기자회견'에서 노동조합의 파업투쟁에 대한 사용자의 무력화의 도구 손해배상청구 철폐를 촉구하고 있다. 2022.08.31. ⓒ민중의소리
470억원. 대우조선해양이 하청노동자의 점거 농성으로 손해가 발생했다고 소송을 제기하며 청구한 금액이다. 피고로는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간부인 김형수 지회장과 강인석·유최안·안준호 부지회장, 이김춘택 사무장 5명이 적시됐다. 단순히 계산해봐도 1인당 평균 94억원인데, 이들이 200년 이상 일해야만 낼 수 있는 수준의 금액이다.
31일 민중의소리와 만난 김형수 지회장은 대우조선해양이 낸 손해배상 소장을 전날 처음 확인했다고 말했다. "정말 이렇게까지 했구나…. 이 세상이 살 가치가 있는 걸까. 참 잔인한, 비인간적인 살인 행위다." 말만 무성했던 470억원이라는 금액이 찍힌 소장을 직접 확인한 뒤 김 지회장이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이다.
'교섭 당사자' 아니라며 책임 회피한 대우조선 "원청이 대화 나섰다면 얼마든지 손해는 막을 수 있던 상황"
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유최안 부지회장이 1도크 배 안에 가로·세로·높이 1m의 철 구조물을 설치해 스스로를 가두는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금속노조 제공
대우조선해양이 낸 소장을 보면, 사측은 하청노동자의 투쟁을 '정당성이 없는 불법 행위'라고 규정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동조합법) 3조에서는 "이 법에 의한 단체교섭 또는 쟁의행위로 인해 손해를 입는 경우에 노조 또는 노동자에 대해 그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며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고 있지만, 이는 '정당한 쟁의행위'에 대해서만 인정된다. 이에 대우조선해양 측은 원청은 하청지회에 대한 단체교섭 당사자가 아니며, 노동조합법 시행령이 금지하고 있는 건조 중인 선박을 점거했다는 논리를 펴며 하청노동자들의 파업이 불법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빠진 것이 있다. 바로 손해에 대한 원청의 책임이다. 하청지회의 법률대리인인 김두현 금속노조법률원 변호사는 민중의소리와의 통화에서 "법리상 (사측은) 어떤 행위를 통해 손해가 발생하지 않거나 확대되지 않는다면 그에 대한 책임까지 물을 수는 없게 돼 있다"고 설명했다.
김 변호사는 "이 사건을 보면 대우조선해양은 하청지회와 대화 자체를 거부했다"며 "대우조선해양은 노조법상 하청노동자들의 사용자로 인정될 여지가 많고, 만일 인정되지 않더라도 최근 원청의 사용자성이 인정되는 법리도 있다. 원청이 대화에 나섰다면 얼마든지 손해를 막을 수 있었는데 (파업이 진행된) 50여일 동안 전혀 하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지금과 같이 다단계 하청구조가 만연해 있는 현실에서 하청노동자가 자신들의 노동조건을 실질적으로 좌우하는 원청을 상대로 한 쟁의 행위들은 불법으로 내몰리는 경우가 많다. 노동조합법상 '사용자'가 지나치게 협소하게 해석되면서 대부분 직접적인 근로계약 관계가 있는 경우에만 사용자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원청과 직접 계약하지 않는 하청노동자들이나 법적으로 개인사업자로 분류되는 특수고용노동자들의 쟁의행위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배경이다.
손배 폭탄 날아온 뒤, 더 가로막힌 노동자의 진짜 요구
하이트진로 옥상 옥외광고판에서 화물노동자들이 고공농성 16일째인 31일 서울 강남구 하이트진로 본사 앞에서 원청 사용자성 인정, 손배가압류 철회, 노조법 개정, 하이트진로 투쟁 승리 민주노총 결의대회가 열린 가운데 하이트진로 본사 옥상에서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2.08.31 ⓒ민중의소리
15년째 동결된 운임의 정상화를 요구하며 농성했다가 하이트진로로부터 수십억원 손해배상 소송을 당한 하이트진로 화물노동자도 같은 상황이다. 하이트진로 화물노동자들이 서울 강남구 하이트진로 본사 옥상에서 손해배상 소송 취하 등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에 돌입한 지도 이날로 16일째에 접어들었다.
이날 서울 중구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열린 '노동조합법 개정, 노란봉투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한 화물연대본부 하이트지부 이진수 부지부장은 "15년 전 운송료로 도저히 생활할 수 없어 파업을 선택한 우리에게 하이트진로는 28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며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있다"며 "정상 운송을 재개하면 손해배상을 취하해주겠다며 복귀를 종용하기도 하다. 손해배상을 무기처럼 휘두르며 노조를 탄압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부지부장은 "회사와 20번 넘게 교섭을 진행했지만, 계약 해지와 손해배상을 앞에 놓고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며 "하이트진로와 (화물노동자들과 직접 계약한 위탁운송사인) 수양물류는 (당초 노조의 요구인) 운송료 얘기는 꺼내지도 않은 채 계약해지와 손해배상은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측의 손해배상 소송이 시작되면서 어느새 노동자의 진짜 요구였던 '운임 정상화'는 사라져 버린 셈이다.
이 부지부장은 "지금의 노조법은 화물노동자의 투쟁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막대한 손해배상을 합법적으로 청구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이를 통해 노조를 무너뜨리고 노동자의 절박하고 정당한 요구를 가로막고 있다"며 "목숨을 내놓고 빚을 쌓아가며 하는 화물노동자의 투쟁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어마어마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며 회사의 책임을 회피하고 노동조합을 파괴하는 하이트진로와 같은 악행이 더는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배 고통 직접 겪고 있는 민주노총 위원장 "문제 근원은 원청에 직접 요구할 수 없는 노조법 때문"
양경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위원장이 31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열린 '노조법 개정, 노란봉투법 제정 촉구 민주노총 기자회견'에서 노동조합의 파업투쟁에 대한 사용자의 무력화의 도구 손해배상청구 철폐를 촉구하고 있다. 2022.08.31. ⓒ민중의소리
사측의 무분별한 손해배상 소송을 막기 위해선 노동조합법상 손해배상청구 제한 사유도 확대해야 한다. 현행법에서는 노동조합법에 의한 단체교섭 또는 쟁의행위로 인해 손해를 입은 경우에만 노조 또는 노동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대우조선해양 사례처럼 노동조합법에서 인정하는 쟁의행위는 현실의 노동환경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삶을 파괴하는 손해배상 소송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선 노동조합법 2조와 3조를 모두 개정해야 한다는 게 민주노총의 요구다.
민주노총 양경수 위원장 역시 손해배상소송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당사자다. 2015년 금속노조 기아자동차지부 화성지회 사내하청분회장이었던 양 위원장은 기아차 불법 파견 문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한 노조 투쟁의 책임자로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고, 법원은 양 위원장을 비롯한 3명의 노동자들이 5억 8천만원 손해배상액을 내야 한다고 확정 판결했다.
양 위원장은 "(현재도) 제 개인의 계좌는 모두 다 압류되어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당시에는) 비어있는 집에 냉장고, 세탁기와 같은 살림살이마저 집행관들이 들어와서 압류 딱지를 붙이고 경매를 진행한 바도 있다"며 "개인의 삶이 철저히 파괴되는 것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양 위원장은 "손배 제도의 근원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요구를 투쟁의 대상에게 직접 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며 "기아자동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기아자동차와 교섭할 수 없고, 대우조선의 하청노동자들이 대우조선과 교섭할 수 없고, 하이트진로를 운송하는 노동자들이 하이트진로 원청과 얘기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양 위원장은 "그들(원청)은 모든 권한과 모든 책임을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마디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고, (노동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노조 파업에 대한 계약해지, 해고, 손배 가압류다. 이것을 단절하지 않는 이상 한국 사회에서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은 온전히 노동자에게 주어질 수 없다"며 "우리는 올해 하반기 투쟁을 통해서 더 이상 노동자들의 투쟁에 손해배상으로 족쇄를 채우는 불합리한 현실을 바로잡고자 한다. 민주노총은 노동조합법 2조와 3조를 하반기에 반드시 개정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싸우겠다"고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