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1일 울산 중구 중앙여자고등학교에서 고3 수험생들이 2023학년 대학수학능력시험 모의평가를 치르고 있는. 모습. 기사와 관련이 없는 자료사진. 2022.08.31. ⓒ뉴시스
교육부가 발표한 새 교육과정 총론 시안에서 지난 문재인 정부 때 교육목표에 반영하는 방향으로 논의되던 ‘노동’ 관련 내용이 빠져 논란이 일고 있다. 새 교육과정 총론에 ‘노동’이라는 표현조차 단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
교육부는 노동에 관한 내용까지 포괄적으로 담긴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노동계와 교육계는 노동에 관한 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교육의 헌법’이라고 불리는 총론에 분명히 명시돼야 한다고 반박했다.
정권 바뀐 후 교육과정 총론에서 ‘노동’이 빠졌다 교육부 “직접적이지 않을 뿐 모두 포괄하고 있다” 강변
교육부는 지난 8월 30일 ‘초·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 시안을 공개하고 9월 13일까지 의견을 수렴해 연말에 확정하겠다고 밝혔다. 새 교육과정은 2017년생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2024년 초등학교 1~2학년부터 먼저 적용되고, 이듬해인 2025년부터는 중·고등학교에도 적용된다.
교육부가 공개한 A4 60장 분량의 교육과정 총론 시안을 보면, ‘노동’이라는 단어는 직업계고 교과과목 중 하나인 ‘노동인권과 산업안전보건’에만 등장한다. 그 외 노동에 관련 내용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학교급별 교육목표’ 중 고등학교 교육목표에 등장하는 “성숙한 자아의식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일의 가치를 이해”라는 부분뿐이었다. 이마저도 ‘노동’이라는 단어는 빠졌다.
2022년 8월 교육부가 공개한 ‘초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 시안 중 교육부가 노동에 관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주장하는 부분. ⓒ발표문 캡처
앞서 교육부는 지난 문재인 정부 때인 지난해 11월 ‘2022 개정 교육과정 총론 주요사항’을 발표하면서 “일과 노동에 포함된 의미와 가치 등을 교육목표에 반영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전 학년에 적용되는 교육과정 총론의 공통사항은 총 7부문인데, 그중 두 번째인 ‘미래사회 및 환경변화에 대응하는 교육 내용 강화’ 부문에 노동에 관한 내용이 포함됐던 것이다. ‘노동’이 교육과정 총론에 명시된다면 이번이 최초가 될 전망이다.
유은혜 당시 교육부 장관은 같은 해 10월 국회 교육위원회 종합감사에서 “내실 있는 학교노동인권교육 지원 계획을 수립하고, 교과에서 노동인권교육이 체계적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내용을 강화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2021년 11월 교육부가 발표한 ‘2022 개정 교육과정 총론 주요사항’ 중 노동교육에 관한 내용. ⓒ발표문 캡쳐
이는 갑자기 이뤄진 게 아니라, 오랜 공론화 끝에 결정된 것이었다.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가 건의해 국가교육위원회, 교원·시민단체의 의견 수렴 등을 거쳐 문재인 정부 때 가시화가 된 것이었다. ‘노동인권교육’을 강화하는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로 정권이 교체된 후, 교육부가 최근 발표한 새 교육과정 총론 시안에는 정작 노동에 관한 내용이 쏙 빠져 있었다. 그동안 노동에 관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해오던 노동계와 교육계는 “국민 기만”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민주노총을 포함한 167개 단체가 모인 ‘학교부터노동교육운동본부’는 논평을 내고 “노동이 총론 주요사항에 명시되었다가 오늘 총론 시안에서 빠진 것은 매우 분노스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운동본부는 “작년 총론 주요사항 발표 이후 오늘의 총론 시안 발표까지 바뀐 것이 있다면 정부가 바뀐 것 뿐”이라며 “이는 윤석열 정부가 노동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떠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도 “아무런 설명 없이 삭제한 의도는 무엇인가. 지난해와 올해는 정권이 바뀌었을 뿐인데, 정권이 바뀌었다고 교육목표의 핵심 내용이 바뀐다는 게 말이 되는가”라고 반발했다.
이에 대해 교육부는 ‘노동’이라는 표현이 안 들어갔을 뿐이지 관련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8월 31일 국회에서 학교부터노동교육운동본부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 참석해 “고등학교 교육목표에서 ‘성숙한 자아의식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일의 가치를 이해하고 자신의 진로에 맞는 지식과 기능을 익히며 평생 학습의 기본 능력을 기른다’는 내용을 추가했다”며 “직접적이지 않지만 다양한 의미와 가치를 반영하려고 연구진이 고심한 결과를 내놓은 것”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지난 정부에서 발표한 ‘교육과정 총론 주요사항’에 노동에 관한 내용이 포함된 것에 대해선 “총론이 국가교육과정의 공통적이면서도 일반적인 기준이라는 성격을 고려해서 ‘주요사항’에 일과 노동의 의미와 가치를 반영해서 제안한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 (교육 과목에 대한) 각론이 이뤄지고 있다”며 “나온 의견을 전달해 추후에 논의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현재 새 교육과정 총론 시안에 맞춰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노동인권과 산업안전보건’ 과목 신설에 관련 내용이 담기면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8월 31일 국회 의원회관 간담회의실에서 학교부터노동교육운동본부 주최로 ’2022 개정 교육과정 총론 노동인권교육 방향은?’ 토론회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김주현 전국특성화고노동조합 경기중서부지회장이 발언을 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현실과 동떨어진 교육부의 인식에 대한 비판 교육과정 총론에 노동이 담겨야 하는 이유는?
하지만 교육부의 이런 해명을 두고 교육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노동에 관한 교육은 이미 각 지역 교육청과 개별 학교 차원에서 일부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국가교육과정이 아니다보니 대부분 체계적이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이뤄져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오랫동안 제기돼왔다. 지역이나 학교에 따라 노동에 관한 교육 격차가 크다는 비판도 있다.
김주현 전국특성화고노동조합 경기중서부지회장은 이날 토론회에서 “학교(특성화고)에서 노동인권교육은 1년에 2번 정도 듣는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에는 코로나 사태 이전이었기에 대강당 등 많은 학생이 모일 수 있는 공간에서 강사가 PPT 자료 등으로 설명해주는 식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고등학교에서 들은 모든 노동교육의 주된 내용은 최저임금이 얼마인지, 근로계약서 쓰는 법, 회사에 몇 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해야 하는지, 이메일 보내는 방법, 명함 건네는 방법 등이었다. 이런 내용은 누구나 쉽게 인터넷으로 알아볼 수 있는 정도의 내용이었다”며 “살면서 분명하게 알아야 하고, 자신의 노동가치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정보들이지만, 1년에 몇 차례 진행하지 않는 노동교육 시간에 누구나 알 수 있고 쉽게 알 수 있는 내용들을 하는 것은 의미가 크지 않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그는 “학교에서 열심히 눈치 보는 법만 배우고 사회에 나가면 직장에서 임금체불, 부당해고, 직장 내 괴롭힘, 성희롱을 당해도 눈치 보며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며 “결국 왜 눈치를 보고 말을 못하냐고, 또는 사회생활이니 일단 참아야지라며 도리어 피해를 당한 우리에게 뭘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황당할 뿐”이라고 성토했다.
학교에서 노동인권교육을 하는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공군자 서울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전 운영위원장은 “일하는 청소년들이 근로계약서를 몰라서 못 쓴 게 아니라 알아도 작성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못 한 것”이라며 “사회권으로서 접근하는 게 아니라 개별적인 사안으로 본다면 (노동교육의) 그 의미성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또한 그는 “각 지역 교육청별로 노동인권교육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도 차별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라며 “어떤 지역의 학생은 태어나서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노동인권교육을 받지 못하고, 어떤 지역의 학생은 여기저기서 여러 번 교육을 받는다. 교육 내 차별이 이뤄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직업진로교육’과 ‘노동인권 교육’은 엄연히 다르다는 지적도 나왔다. 새 교육과정 총론 시안을 보면, 현재 신설 과목으로 논의되고 있는 ‘노동인권과 산업안전보건’ 외에는 ‘일’과 관련해선 ‘진로’와 ‘직업’에 관한 교육만 이뤄진다.
이에 대해 공 전 위원장은 “진업진로교육은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탐구하는 것이라면, 노동인권교육은 노동에 대한 인식, 노동의 가치, 노동자로서의 권리, 타인의 노동에 대한 존중, 권리구제 방안, 건강권, 산업안전, 인권을 존중하고 존중받는 경험 등에 대한 것으로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며 “그러나 총론은 직업진로교육만 언급하고 노동인권교육을 배제함으로써 학생들에게 반쪽짜리 교육만 편성하는 꼴이 됐다”고 질타했다.
8월 31일 국회 의원회관 간담회의실에서 학교부터노동교육운동본부 주최로 ’2022 개정 교육과정 총론 노동인권교육 방향은?’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민중의소리
노동계와 교육계, 교육부에 ‘노동’ 교육과정 반영 촉구 법 제정 움직임도 잇따라
이는 노동계와 교육계가 그동안 노동에 관한 교육을 단순히 강화하고 확대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교육과정 총론에 명시해야 한다고 요구해온 배경이다. 교육과정 총론을 기준으로 세부적인 교과과정이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처럼 주먹구구식으로 교육이 이뤄질 수 밖에 없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전명훈 서울시교육청 노동인권 전문관은 “사실은 국가교육과정에 많은 내용을 넣을 순 없다. 분량 한계도 있다. 그런 만큼 교육과정은 각론 구성이나 전체 교육과정 내용 체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며 “노동에 대해 많이 서술하지 않더라도 ‘노동’이란 글자가 들어가는 것과 안 들어가는 것의 차이는 노동교육 과정에 많은 차이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진숙경 경기교육연구원 미래교육연구팀장은 “우리 학생의 75%는 노동자가 된다. 그렇다면 나머지 25%에겐 노동인권교육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사용자가 되더라도 노동자에게 어떤 존중의 마음 가질지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노동인권교육은 민주시민으로서 누구나 받아야 할 가장 기초적인 교육”이라며 “국가교육과정을 통해 모든 학생이 포괄적으로 노동인권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노동자의 범주 바뀌고 있다는 건 특히 중요한 지점이다. 전통적인 노동자 뿐만 아니라 플랫폼 노동자 등 여러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며 “이들에게도 노동인권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고등학생만 노동을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른들로부터 ‘너 공부 못하면 저렇게 된다’는 식의 얘기를 들으면서 육체노동을 하는 분들을 천대하는 관점이 어렸을 때부터 형성되고 있지 않나”라며 “노동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서부터 성장발달과정에서 하나하나 익히고 토론하면서 비판적 시각을 갖고 고민해나가는 것이지 무작정 ‘다 존중해야해’라는 식으로 강요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고 꼬집었다.
학교부터노동교육운동본부를 포함해 관련 단체들은 향후 대응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일단 교육부가 9월 13일까지 교육과정 총론 시안에 대한 의견을 수렴한다고 밝힌 만큼, 노동에 관한 내용이 포함돼야 한다는 의견을 지속적으로 피력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진 팀장은 “예를 들어 총론 시안에 ‘국가교육과정의 변화를 요청하는 주요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에 ‘노동환경의 변화’라는 식의 언급이 있으면 된다”며 “지금은 고등학교 교육목표에만 ‘일의 가치’가 언급돼 있는데 ‘일과 노동의 가치와 의미’로 봐야 할 것이고, 초·중학교 교육목표에도 그런 내용이 담겨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각론의 내용도 함께 보강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설규주 경인교대 교수는 “2022년 개정 사회과 교육과정(시안)에 노동 관련 표현이 절대적으로 많으냐 적으냐, 또는 적절하냐 아니냐와는 별개로, 2015년 개정 사회과 교육과정과 비교했을 때 양적, 질적 측면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교육현장에선) 사실 총론보다는 ‘성취기준’을 교과서를 만들 때 많이 본다. ‘성취기준’은 교과서를 구성하는 전제가 되는 문건이다”라며 “여기에 (‘노동’이라는 단어 하나가 들어가면 교과서에 한두 페이지라도 (관련 내용이)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법제정을 통해 노동인권교육을 제도화하는 방법도 있다. 21대 국회에선 더불어민주당 강병원 의원과 이수진 의원(비례대표)이 각각 ‘노동인권교육 활성화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이들 법안에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가 노동인권교육의 활성화를 위한 시책을 수립·시행해야 한다는 내용과 고용노동부 장관이 초·중등교육법에 따른 학교 교육과정에 노동인권교육에 관한 내용을 포함될 수 있도록 교육부 장관에게 요청할 수 있으며, 요청을 받은 교육부장관은 이를 반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이 공통적으로 담겼다. 무소속 윤미향 의원도 ‘학교노동인권교육의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학교 노동인권교육의 책무 범위를 학교장부터 지자체, 국가까지 폭넓게 명시하고, 국가와 지자체가 학교 노동인권교육 활성화를 위한 시책을 수립·시행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다.
윤 의원은 “(교육과정 총론 시안에 ‘노동’이 빠져서) 굉장히 복잡한 심정”이라며 “비록 정부가 교육과정에서 ‘노동’을 삭제하더라도 국회에서 법을 제정하면 될 것이다. 국회 교육위원회에 제출돼있는 노동인권교육 관련 법이 제정되면 길이 열리지 않겠나”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교육위원회 차원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고 법안이 계류 중”이라며 법안 처리의 시급성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