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한 분배가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 _ 대번영의 시대

[연재] 추석 연휴에 만나는 재미있는 경제역사①



*편집자 주 - 지난 설에 이어 추석 명절을 맞아 경제역사에서 벌어졌던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사건들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연휴 기간 동안 모두 네 건의 경제역사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바랍니다.

① 공정한 분배가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 _ 대번영의 시대
② 미·소의 자존심 싸움, 인류의 발걸음을 우주로 이끌다 _ 우주 경쟁
③ 달러, 용과 호랑이를 동시에 덮치다 _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④ 석유를 향한 미국의 광기 _ 이라크 전쟁


1998년 아시아 출신으로는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경제학계의 마더 테레사’ 아마르티아 센(Amartya Kumar Sen)은 영국 유학시절 극심한 인종차별을 겪었던 인물이었다. 센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가 묵었던 하숙집 주인은 “너는 밖이 안 보이지만, 밖에서는 네가 보인다”라며 센에게 밤에 커튼을 열지 말 것을 지시했다. 이런 혹독한 인종 차별을 겪으면서 센은 자신만의 후생경제학을 개척했다.

이전까지 노벨경제학상은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경제를 성장시킬까?”를 주로 고민한 시장주의자들의 차지였다. 하지만 센은 “어떻게 하면 부를 보다 공정하게 나눌까?”를 고민한 인물이었다. 신자유주의가 극성을 부리던 1998년, 주류경제학에서 분배의 문제가 다시 한 번 경제학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것이다.

센은 단언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역사의 진보는 성장의 문제가 아니라 분배의 문제다. 풍부한 물질의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역사의 진보다”라고 말이다. 사회적 생산물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그리고 공정한 분배가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그 해답을 대공황 이후 미국이 누린 대번영기에서 찾아보자.

공정한 분배, 중산층을 형성하다

성장에 대한 신화와 시장에 대한 종교적 믿음은 1930년 대공황을 겪으면서 와르르 무너졌다. 이후 미국은 ‘국민들을 먼저 부유하게 하는 것’에 모든 힘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공정한 분배가 경제 성장의 엄청난 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했다. 이른바 미국 자본주의에서 가장 풍요로웠던 ‘대(大)번영’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흔히 미국의 대번영은 1947년부터 1975년에 이르기까지 장장 28년에 이르는 긴 기간을 말한다. 이 시기 미국이 이토록 풍요로울 수 있었던 가장 중대한 변화는 중산층의 확대였다.

대공황 이전까지 미국에서는 중산층의 존재가 매우 미약했다. 미국이 벌어들인 전체 소득 중에 최상위 1% 부자들이 보유한 부의 크기는 전체의 25%나 됐다. 부자 1%가 국민소득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극심한 불균형이 존재한 것이다.

대량생산에는 대량소비가 뒤따라야 한다. 그래야 공장에서 만든 물건이 팔리고 경제가 돌아간다. 하지만 최상위 부유층이 소득의 대부분을 가져가버리는 바람에 미국의 소비 시장은 완전히 꼬였다. 부는 더 빠른 속도로 양극화를 향해 달려갔고, 평범한 국민들은 물건을 살 돈이 없었다.

하지만 중산층의 확대는 이런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다. 평범한 국민들의 호주머니가 풍요로워지면서 공장에서 만드는 물건들이 생산되는 족족 팔리게 된 것이다. 모든 집안 저녁 식탁마다 닭고기가 올라왔고, 가정마다 자동차를 한 대씩 보유하는 마이카(my car) 시대가 열렸다. 미국 경제의 대번영기는 바로 ‘중산층의 확대’와 같은 뜻이었다.

대공황 이전을 묘사한 미국의 영화들을 보면, 미국의 상류층 집안은 유럽 여느 나라 상류층들과 마찬가지로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을 부렸다. 하지만 대번영 시기를 거치면서 이런 하인들이 싹 사라졌다. 이들 대부분이 새롭게 중산층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대번영의 초석, 강력한 증세(增稅) 정책

대공황으로 최악에 몰렸던 미국 경제는 도대체 어떤 마술을 통해 대번영기를 맞이한 것일까? 미국 뉴욕시립대학교 경제학 교수이며 2008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은 대번영을 이끈 동력으로 ①강력한 증세 정책과 ②막강한 노동조합의 존재를 꼽는다.

대번영기 미국 정부는 막대한 돈을 세금으로 걷어 그 돈으로 댐도 짓고 도로도 건설하는 방식으로 일자리를 만들어 냈다. 또 루스벨트 대통령이 초석을 다진 사회복지정책도 대폭 강화했다.

대번영기를 이끈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기타

실업자에게 보험금을 지급하고 일할 능력이 없는 노인과 극빈자, 장애인을 돕는 다양한 제도를 실시한 것이다. 이 덕분에 미국의 극빈층은 가난에서 벗어나 중산층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시기 미국 정부는 세금을 도대체 어디서 걷었을까? 당연히 돈을 많이 버는 기업들과 부자들로부터 집중적으로 세금을 걷었다. 지금 우리나라의 최고소득세율은 45%다. 연소득 10억 원이 넘는 부자들에게 이런 세율을 적용한다.

그렇다면 대번영기 미국의 최고 소득세율은 몇 %였을까? 놀라지 마시라! 무려 91%였다. 잠깐 이랬다가 말았던 게 아니고 미국은 무려 20년 가까이 91%라는 어마어마한 최고 소득세율을 유지했다.

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줄 때에는 증여세(贈與稅)라는 것을 뗀다. 우리나라의 최고 증여세율은 50%다. 하지만 대번영기 미국의 최고 증여세율은 무려 77%였다. 법인세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최고 법인세율은 25%(이것도 윤석열 정권이 깎으려 하고 있음)인데 대번영기 미국 기업들이 내야했던 최고 법인세율은 45%나 됐다.

한마디로 당시 미국은 부모가 부자라고 해서 자식도 당연히 부자가 되는 ‘금수저’가 근본적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나라였다. 재산을 물려주려 해도 증여세가 엄청났고, 고액 연봉을 받아도 막대한 세금을 내야 했다. 이 덕분에 가장 잘 사는 최고 부유층의 숫자는 계속해서 줄어든 반면, 복지혜택을 누린 최하위 계층의 소득은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소득수준 최상위의 맨꼭대기층을 세금으로 누르고, 소득수준 맨아래층을 복지로 떠받친다. 위아래를 꽉 누르면 당연히 중간이 뚱뚱해진다. 크루그먼 교수가 이 시기를 ‘위아래를 눌러 가운데를 뚱뚱하게 만들었다’는 취지로 대압착기(Great Compression)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강력한 노동조합, 대번영의 또 다른 기틀

크루그먼이 꼽은 대번영의 또 다른 동력은 바로 노동조합이었다. 대공황 이전까지 미국의 노조 가입률은 10%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다. 대공황이 마무리된 1935년만 해도 이 수치는 12%에 불과했다.

그런데 1945년 노조 가입률이 35%로 훌쩍 뛰었다. 이 시기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권익을 찾기 위해 대거 노동조합을 결성했고, 대공황 이전까지 노동조합을 탄압했던 미국 정부도 우호적으로 태도를 바꿨다.

그래서 “노조가 경제를 말아먹는다”는 말은 한심한 이야기다. 노조의 강화는 노동자의 권익이 강해진다는 것은 곧 노동자들의 소득이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노동자라는 존재는, 공장에서는 일을 하는 사람이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물건을 사는 소비자로 변한다. 즉 안정적 소득을 보장받는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건을 충분히 사 주는 든든한 소비자 계층이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노동조합이 강한 나라일수록 중산층의 숫자가 많다. 이 중산층이 바로 대번영기의 초석이 됐다는 것은 더 말 할 필요가 없다.

1980년대 이후 미국 경제는 대번영기를 마치고 조금씩 쇠락하기 시작했다. 1980년 집권한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1911~2004) 대통령은 이른바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로 불리는 새로운 경제정책을 앞세워 대번영기에 유지됐던 증세 정책을 대부분 포기했다.

그리고 노조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바탕으로 노조를 억제하면서 미국의 노조가입률은 2008년 금융위기 무렵에 다시 20% 선으로 추락했다. 길고 풍요로웠던 대번영의 시기가 막을 내리고 마침내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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