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의 자존심 싸움, 인류의 발걸음을 우주로 이끌다 _ 우주 경쟁

[연재] 추석 연휴에 만나는 재미있는 경제역사②

*편집자 주 - 지난 설에 이어 추석 명절을 맞아 경제역사에서 벌어졌던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사건들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연휴 기간 동안 모두 네 건의 경제역사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바랍니다.

① 공정한 분배가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 _ 대번영의 시대
② 미·소의 자존심 싸움, 인류의 발걸음을 우주로 이끌다 _ 우주 경쟁
③ 달러, 용과 호랑이를 동시에 덮치다 _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④ 석유를 향한 미국의 광기 _ 이라크 전쟁


행동경제학과 경영학에는 후광효과(Halo effect)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할로 이펙트’라고 읽기도 하고 ‘헤일로 이펙트’라고 읽기도 한다. 헤일로(Halo)라는 단어가 ‘후광’이라는 뜻이다.

하나의 일에 대한 평가가 나머지, 혹은 전부의 평가에 꽤 강한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말한다. 어떤 일에 대한 후광이 다른 것들을 밝게 비추는 효과라고나 할까?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쯤 되는 개념이다.

『헤일로 이펙트』의 저자 필 로젠츠바이크(Phil Rosenzweig)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 박사는 이런 예를 든다. 어떤 기업의 매출과 이익이 치솟았다고 하자. 그러면 그 좋아진 실적이 온갖 후광효과를 발휘해 그 기업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든다. 사람들은 그 기업의 리더가 매우 뛰어난 전략과 비전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고, 그 회사 노동자들도 상당히 유능하며, 기업문화도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꼼꼼히 따져보면 그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 예를 들어 정주영의 현대그룹이 성공을 거뒀다는 후광효과에 눈이 멀어 정주영처럼 무모한 도전을 일삼았다가는 기업 말아먹기 딱 좋은 거다. 하나를 보면 하나만 알아야지, 하나를 보고 함부로 열을 예단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쓸 데 없는 고퀄 경쟁

지금부터 우리는 20세기 중반을 수놓았던(!) 미국과 소련의 치열했던 우주 경쟁(Space Race)을 살펴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부분을 회고할 때마다 ‘쓸 데 없이 고퀄(높은 퀄리티)’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1957년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Sputnik-1)를 쏘아 올리는 데 성공하면서 미국과 소련 두 나라의 우주 경쟁이 막을 올렸다. 그리고 이는 1970년대 중반까지 약 20년 동안 ‘스페이스 레이스’라는 말에 걸맞을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됐다.

그런데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해봐도 ‘두 나라가 이 일에 이렇게 미친 듯이 매달릴 필요가 있었나?’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이 시기 미·소 양국이 이룬 기술적 성취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20세기 동서 냉전이 인류에게 안겨준 가장 긍정적 효과 중 하나가 이것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 시대 상황에만 국한해서 생각한다면 이 엄청난 기술의 발전은 그 시절 현실에 비해 뛰어나도 너무 뛰어났다. 상상해보라. 1957년이면 아직 자동차도 충분히 대중화가 되지 않았던 때다. 그런데 인공위성이 막 하늘을 날아다닌 거다.

1959년 소련의 루나 3호(Lunar-3)는 달 뒷면 촬영에 성공했는데, 이 시기는 일반인들이 카메라를 가지고 있는 경우조차 드물었다. 그런데 비행체를 날려 달의 앞면도 아니고 뒷면까지 사진을 찍은 거다.

1969년 미국은 마침내 달의 표면에 인류를 착륙시켰다. 그런데 1969년이면 경부고속도로도 개통되지 않았을 때였다. 서울에서 부산을 가려면 기차로 12시간씩 걸리던 시절이었는데 인류가 달에 착륙하다니, 놀랍기도 하면서 ‘아니, 지금 그게 급한 게 아니잖아?’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게 ‘쓸 데 없이 고퀄’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원래는 미사일을 쏘고 싶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주 경쟁의 시발점은 1957년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한 것에서 시작됐다. 그런데 소련이 개발한 이 인공위성은 애초부터 우주를 향한 순수한 열정(?)에서 시작된 게 아니었다.

당시 미국에 비해 경제력과 첨단 군사기술면에서 뒤쳐졌던 소련은 미국에 맞서기 위해 기어코 핵무기를 개발했다. 미국에 이어 소련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핵보유국이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전쟁이 벌어졌을 때 이 핵무기를 미국에 떨어뜨릴 마땅한 수단이 없었다는 데 있었다. 물론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서 했던 것처럼 폭격기를 출격시켜 미국 본토에 핵무기를 떨어뜨릴 수는 있다. 하지만 당시 소련의 기술력으로는 그 넓은 태평양을 건너 미국 공군과 해군의 강력한 방어선을 뚫고 미국 본토까지 날아갈 첨단 전투기를 만들 능력이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소련의 핵무기는 빛 좋은 개살구 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에 폭격을 가할 수 없는 핵무기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래서 소련이 새롭게 총력을 기울인 분야가 대륙을 슝슝 날아다니는 장거리 미사일 기술이었다. 최소 사정거리가 수천km에서 최장 수만km에 이르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 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 본토에 핵무기를 투하할 능력을 갖추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친 소련은 총력을 기울인 끝에 마침내 1953년 ICBM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 기술을 개발하던 와중에 소련은 ‘미사일을 아예 대기권 밖으로 쏘아올린 뒤 미국 본토로 내리꽂으면 어떨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기술 개발에 총력을 기울인 끝에 소련은 마침내 인공위성을 지구 대기권 밖으로 날려 보낼 기술을 개발했다. 중간고사에서 만점 받으려고 열심히 영어를 공부하다 보니 실력이 토플에서도 만점을 받을 수준에 이르렀다고나 할까?

우주를 향한 꿈? 아니면 체제 선전의 도구?

뜻밖의 성과를 얻은 소련은 이 기술을 체제 선전에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대기권 밖으로 위성을 쏘아 올리는 기술은 그 자체로도 군사적 의미가 상당했지만, 소련의 기술력을 만천하에 알리는 엄청난 홍보 효과도 가져다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의 맹주이긴 했어도 당시 소련은 여러 면에서 미국에 비해 한참 열세였던 나라였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소련이 우주선을 먼저 쏘아 올린다? 이건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단번에 만천하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우주로 향한 첫 나라가 소련’이라는 훈장이야말로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최고의 후광효과 아닌가?

실제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우주로 쏘아 올리자 미국이 받은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재래식 무기로 육지에서나 힘을 좀 쓰는 것으로 알려졌던 소련이 단번에 미국과 버금가는, 아니 미국을 뛰어넘는 기술 강국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이 받은 충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미국에서는 이를 ‘스푸트니크 쇼크’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런데 이 쇼크는 서막에 불과했다. 스푸트니크 1호가 우주로 날아 오른 지 한 달 뒤인 11월 3일, 소련은 살아있는 개를 태운 스푸트니크 2호를 또 한 번 우주로 쏘아 올려 미국을 경악에 빠뜨렸다.

사실 미국 본토에 미사일을 꽂는 것이 목적이라면 인공위성에 굳이 개를 태울 이유가 없었다. 개가 인공위성을 운전할 것도 아니지 않나?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스페이스 레이스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중 어느 쪽 체제가 우월한가를 다투는 어마어마한 문제로 비약돼 있었다.

두 달 뒤인 12월 6일 미국은 개발 중이던 인공위성 뱅가드를 발사대에 올렸다. 예정대로라면 뱅가드는 이듬해 말이나 돼야 발사될 예정이었는데 스푸트니크 쇼크를 당한 미국이 일을 서두르는 바람에 발사가 1년 가까이 당겨진 것이다.

그런데 야심차게 쏘아올린 뱅가드가 고작 1미터 남짓 떠오르다가 그대로 폭발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미국 정부는 체제 선전을 위해 발사 장면을 TV로 생중계까지 했는데, 뱅가드는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바동대다 가라앉는 듯한 처참한 모습으로 폭발해버렸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이 장면을 지켜본 소련이 얼마나 기뻤겠나? 당시 소련의 지도자였던 니키타 후르쇼프(Nikita Khrushchev, 1894~1971)는 폭발 참사 이후 미국에 공식 조문을 보냈다.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닌데 조문은 무슨 조문인가? 흐루쇼프는 그냥 미국을 조롱하고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흐루쇼프는 ‘선봉’이라는 뜻의 뱅가드라는 이름에 대해 “뱅가드보다 리어가드(Rearguard, 후위)로 부르는 게 낫겠다.”고 비아냥거리면서 미국의 염장을 제대로 질렀다.

이듬해인 1958년 1월, 미국이 마침내 익스플로러 1호(Explorer-1) 발사에 성공하며 체면을 살리는 듯 했으나, 2월 재기전에 나선 뱅가드가 발사대를 떠난 뒤 14초 만에 또다시 폭발하면서 스페이스 레이스의 초반 주도권을 완전히 소련에 넘겨주고 말았다.

미국의 승리로 막을 내린 후광효과 경쟁

이후 두 나라는 누가 먼저 사람을 우주로 쏘아 보내느냐에 사활을 걸었다. 스푸트니크 쇼크와 뱅가드 참사로 체면을 구긴 미국은 사람을 우주로 보내는 일에서만큼은 반드시 소련을 이기겠다고 결심했다.

미국 정부는 육해공군이 각자 추진하던 우주 개발 창구를 미국 항공우주국(NASA)으로 일원화하고 새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세계 최초의 유인(有人) 우주 비행 탐사를 꿈꿨던 머큐리 계획(Project Mercury)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소련은 이 분야에서마저도 미국에 앞서나갔다. 1961년 4월 12일 인류 최초의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Yuri Alekseyevich Gagarin, 1934~1968)을 태운 보스토크 1호(Vostok-1)가 대기권을 벗어나 지구 궤도를 선회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미국의 첫 유인 우주 비행이 그 해 5월 5일이었으니 미국은 단 20여일 차이로 또 한 번 세계 최초 타이틀을 소련에 넘겨주고 말았다.

소련의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 ⓒ기타

미국은 1969년 7월 20일 마침내 아폴로 11호를 달에 착륙시키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인류가 지구 밖 별에 최초로 발자국을 찍은 순간이었다.

이후 양측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며 스페이스 레이스를 지속했다. 그러나 초반 기세를 장악했던 소련에게는 이 레이스를 최종승리로 이끌 지구력이 부족했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의 대(對) 소련 경제 공세가 제대로 먹히면서 양측의 경제력 격차가 날이 갈수록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91년 소련이 사실상 붕괴되면서 이 경쟁은 미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스페이스 레이스의 본질은 미·소의 체제 경쟁이었지만 이 경쟁은 결과적으로 인류 기술의 비약적 진보를 낳았다. 그리고 이 경쟁은 미·소가 벌인 그 어떤 지저분한 경쟁에 비해서도 낭만적이었다.

가가린이 “지구는 푸른빛이었다.”라는 메시지를 보내왔을 때 인류의 가슴은 얼마나 뜨거워졌으며,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 1930~2012)이 달에 발자국을 찍었을 때 인류가 품은 꿈의 크기는 또 얼마나 커졌던가? 체제를 빛나게 할 후광효과를 노린 이 레이스가 인류의 시선을 끝없는 우주로 향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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