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 한국노총, 민주노총 등 노동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19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 집무실 인근에서 돌봄·의료·교육 등 복지 민영화 선언, 윤석열 정부 규탄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2.09.19. ⓒ뉴시스
정부의 복지서비스 민영화 기조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복지 민영화는 서비스 질과 노동차 처우를 저해한다는 지적이다. 정부 기조는 복지 공공성을 강화하는 국제 사회 기류와도 상반된다.
참여연대, 민주노총, 한국노총,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 등 노동·시민단체는 19일 오후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돌봄·의료·교육 등 복지서비스 민영화를 내세우는 정부를 규탄했다.
앞서 안상훈 대통령실 사회수석비서관 지난 15일 “돌봄·요양·교육·고용·건강 등 분야에서는 서비스를 민간주도로 고도화할 것”이라며 “이를 통해 창출되는 서비스 일자리는 다시금 노동시장 취약계층을 위한 괜찮은 ‘일자리 저수지’로서 기능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120대 국정과제에도 ‘사회서비스 혁신을 통한 복지·돌봄서비스 고도화’ 계획이 담겼다.
하지만 노동·시민단체는 복지서비스의 공공성을 오히려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김진석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는 대통령실의 복지 정책 방향 발표와 관련해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은 복지 분야에서 민간 주도의 서비스를 강조하고 있는 점”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어느 때보다 돌봄 공백 문제가 심각한 우리 사회 현황을 고민한다면, 국가가 시민의 삶을 책임진다는 자세로 사회서비스 분야를 공공 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한 과감한 재정과 인력 확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도 “민생이 위기에 처한 현 상황은 어린이, 장애인, 노인 돌봄을 정부가 책임지고 서비스의 품질을 높이고 보장성을 확대해나가는 것이 급선무”라고 했다.
복지 민영화, 서비스 질 저해하고 열악한 노동자 처우 야기
정부의 기조대로 복지서비스를 민영화할 경우 그 폐해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양경수 위원장은 “돌봄 제도는 현재에도 90% 이상을 민간이 운영하고 있고 이에 따른 부정비리 문제가 날로 확대되고 있다”며 “국가 재정과 사회보험료가 돌봄서비스의 질을 향상하는 데에 쓰이는 것이 아니라 민간업자들의 돈벌이로 전락한 지 오래”라고 말했다. 민간 기업은 약자를 위한 양질의 서비스 제공보다 이윤 창출에 골몰한다는 것이다.
김태인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 부위원장도 “민간 주도의 사회서비스는 노동자의 열악한 처우 문제, 서비스 질의 문제, 부정수급, 비리 시설의 난립 등 사회서비스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유치원 3법(유아교육법·사립학교법·학교급식법 개정안) 통과의 계기가 된 유치원 비리 사태는 복지서비스 민영화 문제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례였다.
박민아 정치하는엄마들 공동대표는 “아이들 교육과 좋은 먹거리를 위해 써달라고 했던 교육비가 원장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일을 지켜보며 민간 위탁에 내몰린 돌봄이 정부 무책임 하에 얼마나 허술하게 운영되고 있었는지 알게 됐다”고 전했다.
이어 “공공이 책임져야 할 영역이 민간에 넘겨지면 비용은 상승하고 질은 담보되지 않는다”며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은 이를 알면서도 서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고, 그마저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복지서비스 민영화는 열악한 노동자 처우도 야기한다. 김진석 교수는 “사회서비스 노동은 민간 주도 구조에서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하고 열악한 노동조건과 노동환경에 신음하고 있다”며 “여기에 투여되는 재정을 절감하면서 어떻게 ‘일자리 저수지’를 만들겠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고 꼬집었다.
실제 고용노동부가 올해 3~6월 498개 돌봄업종에 대해 근로감독을 한 결과, 노동법·근로기준법을 한 건 이상 위반한 시설은 470곳(94.4%)에 달했다. 근로감독 한 달 전 예고하고 자가진단표와 노무관리 가이드북을 배포해 시정 기회를 줬지만 효과가 없었다.
이에 노동 현장에서는 격양된 목소리가 나왔다. 노우정 전국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 돌봄서비스노동조합 위원장은 “정부는 아이와 노인의 돌봄까지 시장에 팔아 장사하겠다는 만행을 멈춰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 위원장은 “국가가 열악한 돌봄현장 개선을 책임져야 할 상황에서 민간에 맡기는 건 시대착오적”이라며 “돌봄서비스 질을 높이는 가장 빠른 길은 돌봄노동자 고용과 노동조건, 서비스매뉴얼 등 등을 국가에서 책임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상훈 사회수석이 지난달 2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룸에서 취학연령 하향 정책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2.08.02. ⓒ뉴시스
한국 복지 공공성, 글로벌 스탠다드 미달
이미 복지서비스는 민간 비중이 압도적이다.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어린이집·노인·아동·장애인 등 9개 영역 사회복지시설의 국공립 비율은 13.4%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국공립 직영 비율은 1% 수준이다. 나머지는 위탁 운영이다.
한국 복지서비스 공공성은 국제사회 기준에 비추어 봐도 크게 못 미친다. 허권 한국노총 부위원장은 “한국은 전체 예산 중 사회복지지출이 12%밖에 되지 않는 턱없이 부족한 예산을 사회복지에 배정하고 있다”며 “반면, OECD 국가 평균은 20%로 턱없이 부족한 예산을 사회복지에 배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제사회에서 자본주의 선봉장을 자처하는 미국도 복지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허권 부위원장은 “미국도 대기업 세금을 높여 공공의료 강화에 활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과시켰다”며 “공공성 강화를 위한 재정 투입이 급선무인 상황에서 한국만 거꾸로 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난달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는 제약회사 약값 인상분 제한, 건강보험 본인부담금 한도액 설정, 민간보험 정부 보조금 지원 연장 등 내용이 포함됐다.
노우정 위원장은 “돌봄과 요양을 후퇴시켜 본질적으로는 의료 민영화를 추진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하기도 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16일(현지시간) 백악관 스테이트 다이닝룸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하고 있다. 2022.08.17. ⓒ워싱턴=AP
사회서비스원 무력화하고, 복지 예산도 사실상 축소
현재 복지서비스 민영화 방안으로 사회서비스원 통폐합이 추진 중이다. 사회서비스원은 지방자치단체 산하 공공기관이 복지 시설을 운영해 공공성을 강화하자는 취지로 도입됐다. 당초 복지 시설을 지자체가 직접 운영한다는 목적이었으나 제도 시행 과정에서 시설 지원 수준으로 역할이 축소됐다.
이마저도 복지서비스 공공성 강화 의미가 통폐합으로 퇴색하고 있다. 울산은 사회서비스원과 여성가족개발원 통폐합을 추진하고 있다. 각각의 영역에서 역할 하는 두 기관을 합쳐 사회서비스원 제도를 형해화 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김태인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 부위원장은 “사회서비스원을 비롯해 사회서비스·복지체계를 통폐합하는 것은 오히려 약자의 소외를 가중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복지 예산 축소에 따른 여파도 우려된다. 내년도 보건·복지 분야 예산안은 올해 본예산 대비 11.8% 증가한 109조원을 편성했다. 물가상승률에 비해 예산 증가 규모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구체적으로는 기초생활보장제도 분야에서 기준중위소득을 소폭 올리면서 예산이 늘었다. 기준중위소득은 기초생활보장 급여 지급 기준으로 활용된다. 내년도 기준중위소득 증가율은 5.47%다. 올해 하반기 물가상승률은 6%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이날 기자회견을 주최한 단체들은 “기준중위소득 인상에 따른 저소득계층 생계비와 기초연금 찔끔 인상 이외 공공성이 담보된 인프라 확충 예산은 찾아보기 어렵고, 대신 민간의 자본을 활용한 예산안을 제시하고 있다”며 “부자에 대한 감세를 대대적으로 펴면서 시민들의 삶과 직결되는 복지예산은 민간에 맡기거나 각자도생하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민주노총울산지역본부는 지난 1일 오전 시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울산시는 사회서비스원 졸속 통페합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2022.09.01. ⓒ뉴시스
원포인트 입법 추진 움직임…민영화 가속화 우려
정부가 복지서비스 민영화를 위한 입법을 추진하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대표적인 규제 완화 법안인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이다. 보건, 복지, 교육, 언론, 정보통신 등 서비스 산업 전반에 대한 규제 완화를 통해 공공서비스 영역까지도 민간 자본의 참여가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해당 법안은 국민적인 반발로 국회에 계류 중이다. 정부는 입법이 여의치 않자, 복지 분야만 별도로 법 제정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양경수 위원장은 “이명박 정부 시기 2011년 정부 입법으로 발의된 뒤 의료 민영화 등에 대한 국민 반대로 폐기해야 마땅한 악법을 윤석열 정부가 부활시키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공석인 보건복지부 장관이 임명되면 이러한 복지서비스 민영화 추진은 본격화될 전망이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는 오는 27일로 예정된 상황이다.
김진석 교수는 대통령실의 복지 정책 방향 발표에 대해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일관되게 주장해온 민간과 시장 주도의 정책 운용 기조를 재확인한 것으로 보인다”며 “복지부 장관도 임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별도로 복지 민영화 방향을 발표한 건 정책 추진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시도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공공성보다 효율화를 중시하는 인사들이 복지 관련 요직에 포진한 상황도 우려를 더한다.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재직한 안상훈 사회수석비서관은 주로 복지 재정 효율성을 연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규홍 후보자는 기획예산처와 기획재정부 등을 거치며 30여 년간 예산과 재정 업무를 담당하다가 현 정부에서 복지부 1차관으로 발탁된 인물이다. 복지 전문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민아 공동대표는 “돌봄은 비즈니스가 아닌 인간의 기본권”이라고 강조했다. 복지서비스를 돈벌이 수단으로 볼 것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 질적·양적으로 개선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