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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갑의 수요뮤직] 음악이 할 수 있는 일의 최소치

재즈 피아니스트 조윤성의 즉흥 음반 [노르딕 챈트]

재즈 피아니스트 조윤성의 즉흥 음반 노르딕 챈트 ⓒ조윤성

‘라싸로 가는 길’, ‘조로서도’, ‘구루’, ‘Morning Pray’, ‘시바의 춤’, ‘Nordic Chant’, ‘티베트로 간 바흐’, ‘동방미인’, ‘헬싱키의 새벽종’, ‘아궁의 시’, ‘마방의 계절’, ‘운남의 밤’으로 이어지는 곡의 제목은 세계 지도를 펼쳐놓은 듯 하다. 재즈 피아니스트 조윤성이 9월 6일 발표한 정규음반 [노르딕 챈트]의 수록곡 제목을 따라 읽다 보면, 누군가의 여행에 동행한 것 같다. 실제로 조윤성은 라싸에 가고, 헬싱키에서 새벽종 소리를 들었을까. 그리고 운남의 밤에 머물렀던 시간이 같은 제목의 곡을 연주하게 만들었을까.

그렇지 않고서는 제목을 이렇게 붙였을 리 없다. 하지만 조윤성이 프리 임프로비제이션으로 곡을 연주할 때마다 반드시 곡 제목 같은 기억과 심상을 단단히 품고 연주했는지를 확인하지 못했다. 으레 그럴 거라고 짐작하고 들을 뿐이다. 자타공인 한국 최고의 재즈 피아니스트로 오래 활동해온 조윤성은 그동안 재즈의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면서 수많은 연주자들과 협연했다.

하지만 이렇게 혼자만의 온전한 프리 임프로비제이션 음반을 내놓은 것은 처음이다. 뮤지션이 음반을 발표하는 이유는 수없이 많으니 이 음반 또한 마찬가지이겠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재즈 피아니스트가 이렇게 미니멀한 음반을 내놓았을 때, 이것이 적어도 자신에 대해 진실해지려는 의지의 소산이 아닐 거라고 추정하기는 불가능하다.

자신이 연주하는 피아노 하나만 가지고, 미리 곡을 쓰지 않고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음악임에도 거의 모든 곡들은 계속 다듬어 완성한 곡처럼 정갈하고 차분하며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준다. 이런 음악을 흡수하기 위해 재즈를 공부할 필요는 없다. 재즈를 모르고, 음악을 많이 듣지 않았다 해도 거부감 없이 들을 수 있는 음악이다. 아무 생각 없이 틀어두어도 거슬리지 않을 음악이다. 그 편안함과 소박함을 정교하게 축조하고도 매끄럽게 만들어 내기 위해 조윤성은 오래도록 피아노를 연주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윤성- 라싸로 가는 길

그런데 조윤성이 지목한 지명과 명사, 동사 가운데 상당수는 종교와 영혼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있다. 라싸는 신의 땅이고, 구루는 깨달음을 전하는 스승이다. 아침의 기도, 시바의 신화, 찬트, 새벽종을 치는 곳이 무엇을 말하고 어디인지 다들 안다. 새와 쥐만 다닐 수 있는 길이라는 ‘조로서도’, 이제는 차 브랜드처럼 들리는 ‘동방미인’을 비롯해 다른 세계를 펼치는 곡들이 함께 담겨 있지만, 절반의 곡들이 현세에서 내세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예사롭지 않다.

그러다보니 이 음반은 장르의 언어를 향한 실천만으로 완성한 음반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보고 품고 지향해온 신성한 세계의 기록이자 고백처럼 느껴진다. 유한하고 우연한 삶밖에 살 수 없는 인간이 세계의 본질을 인식하고 그 곳에 닿으려는 순수하고 도저한 마음으로 기원하는 이야기를 표현했다 해도 억측은 아닐 것이다.

수록곡들을 지배하는 느린 흐름과 공백, 그리고 음의 경건한 연결에서 다른 이야기를 연상하기는 어렵다. 감정을 표출하는 대신 주저앉히고, 손을 가슴에 모은 채 연주한 듯 고즈넉한 음의 기운과 서사는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다. 각각의 제목이 표방하는 세계의 정수가 현현한 것처럼 경건하게 흐르는 음률과 프레이징은 그동안 알고 있던 조윤성 대신 다른 조윤성으로 인도한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의 반복이라고, 이런 음악은 새롭지 않다고, 이런 음악으로는 세계를 구원할 수 없을 거라고 폄하하지 말자. 이런 음악은 선택받지 못하고, 기억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지만 이 음반이 흐르는 동안만큼의 평화는 누구도 흔들지 못한다. 때로 음악이 방파제가 되기도 한다. 조윤성은 그렇게까지 거창한 의도는 없었다고 수줍어할까.

그저 자신의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건반을 두드렸을 뿐일지라도 부지불식간에 음악은 누군가의 마음을 씻어 정화하고, 삶의 수많은 조각들을 은근하게 물들여준다. 순결하고 간절한 기도는 소중하다고, 당신이 지나온 발자취는 부질없지만은 않다고 당신의 편이 되어준다. 이 음반에서 음악이 할 수 있는 일의 최소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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