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장애인 탈시설 지원 조례 시행 2주 만에 ‘입소 희망자가 있다면 시설을 이용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관리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전 자치구에 발송한 것으로 확인됐다. 장애인 자립 생활을 우선시하는 조례의 기본 원칙에 역행하는 방침으로, 사실상 시가 나서서 시설 입소 허용을 권장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11일 ‘민중의소리’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시는 지난 7월 25일 시내 25개 자치구의 장애인 정책 담당 부서에 오세훈 서울시장의 직인이 찍힌 ‘장애인거주시설 입소 관련 안내문’을 보냈다. 같은 달 11일 제정된 ‘장애인 탈시설 및 지역사회 정착지원에 관한 조례’의 시행 2주 차에 접어든 시점이었다.
공문은 “입소 적합 판정을 받은 장애인들의 시설 입소가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음으로써 당사자 및 보호자로부터 관련 민원이 발생하고 있는 실정”을 전제로 “권한 있는 기관으로부터 입소 적합 판정을 받은 장애인이 시설을 이용하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관리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 공문은 서울시 25개 자치구 내 모든 시설에 그대로 하달됐다.
공문을 받은 서울시 노원구 장애인복지과 관계자는 ‘민중의소리’와 한 통화에서 “조례 통과에 따라 너무 탈시설 쪽으로 시의 입장이 해석될 여지가 있으니 거주시설도 좀 신경 써서 처리해달라는 내용이 핵심 요지”라며 “정원 한도 내에서 각 시설 상황에 맞게 입소 희망자들한테 적극적으로 안내를 하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무작정 탈시설 쪽으로 해서 입소를 거부하거나 축소하지 말라는 것”이라며 “조례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하라는 취지다. 탈시설과 거주시설 이용을 비율 있게 해야지 탈시설을 빌미로 거주시설 이용 희망자에게 불이익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서울시 역시 “입소를 희망하는 장애인의 민원과 욕구” 때문에 해당 공문을 내려보냈다고 시인했다. 서울시 장애인복지정책과 담당자는 통화에서 “시설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분들, 서비스를 이용하고 싶어 하는 분들을 못 들어가게 하는 것도 하나의 인권침해”라고 주장하며 “공문은 민원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낸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서울시가 찬반 여론에 휘둘려 단순히 ‘시설 또는 탈시설’의 이분법적 선택지를 두는 건 애초에 시가 약속한 탈시설 정책 기조와 어긋난다.
서울시의 ‘장애인 탈시설 지원 조례’는 “장애인이 독립된 주체로서 지역사회에서 자립해 생활하면서 완전한 사회통합을 이룰 수 있도록” 필요한 사항과 시의 책임을 규정한다.
조례를 통해 서울시는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보편적인 자립생활이 가능하도록 장애인 당사자 관점에서 정책을 기획하고 집행할 것 ▲지역사회에서 장애인의 인권 보장을 최우선으로 할 것 ▲탈시설 및 지역사회 정착에 필요한 공적 자원을 충분히 지원할 것을 기본 원칙으로 약속했다.
아울러 서울시가 지난 2017년 말 마련해 2018년부터 올해 말까지 적용하는 ‘제2차 장애인거주시설 탈시설화 추진 계획’은 ‘탈시설 가속화와 거주시설 변화’를 시가 적극적으로 견지할 방향으로 명시한다. 시는 해당 계획에서 ▲탈시설 지원체계를 내실화하고 ▲장애인의 시설 입소를 제한·방지하며 ▲장애인이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도록 개선하는 것을 자신들의 의무로 강조했다.
나아가 서울시의 탈시설 조례는 지난 2014년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의 권고에 기반해 나왔다는 점, 보건복지부도 장애인복지시설 사업 안내를 통해 시·군·구청장에게 장애인의 불필요한 시설 이용을 지양하도록 주문한 점 또한 서울시의 퇴보를 뒷받침한다. 탈시설 정책 실행은 조례에도 적시된 오세훈 서울시장의 책무다.
규칙 따로, 행동 따로 서울시에 혼란 겪는 현장 전장연 박경석 “시설 방치 책임 회피, 당사자 중심으로 봐야”
실제로 서울시가 보낸 ‘시설 입소 허용’ 공문은 현장의 탈시설 정책 적용에 걸림돌로 작동하고 있다. 서울시 자치구 중 등록 장애인 수가 가장 많은(서울시 장애인 현황 통계 참고) 강서구의 장애인복지과 관계자는 “탈시설 조례가 있는데 이런 공문을 보내면 탈시설도 하고 시설 입소도 하고 둘 다 하라는 걸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며 “조금 혼란스러운 시기”라고 밝혔다.
은평구 장애인복지과 관계자는 “서울시의 공문 취지 그대로 각 시설에 공문을 내려보냈다”며 “시설 입소 인원을 줄이는 데만 너무 포커스를 맞추지 말고 입소를 희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능하면 입소하도록 조치해 달라는 공고 형태”라고 전했다.
영등포구 사회복지과 관계자도 “서울시 측으로부터 ‘조례가 제정됐지만 탈시설과 거주시설 지원 정책 간에 균형적인 지원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시에서 시설이나 탈시설과 관련한 내용에 대해 걱정 어린 우려를 표한 분들에 대해 그렇게 답변하고 있고, 우리도 그렇게 대응해야 한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이러한 서울시의 태도는 ‘어렵게 만든 조례를 사문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로 이어진다. 서울시를 피감기관으로 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은 ‘민중의소리’에 “조례 제정 2주 만에 오 시장이 공문을 보낸 건 자기모순”이라며 “탈시설 원칙에 맞는 시정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대표는 통화에서 “서울시가 나서서 신규 입소를 강조하는 건 시설 정책을 유지하고,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을 정면으로 위반한 사건”이라며 “조례는 형식적인 것이 된 거고, 실질적으로 시설 정책을 강화하는 방식의 속내를 내세운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 대표는 “시설은 그 자체적으로 반인권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며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가족이 원한다는 핑계로 지금 형태의 시설을 마치 하나의 대안처럼 방치하는 건 서울시가 책임을 회피하는 아주 잘못된 처사다. 당사자의 인권을 중심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어 박 대표는 “윤석열 정부 들어서 시설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며 “시설의 장애인을 은폐시키고 감금하려는 정책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장애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거주시설 운영자들의 이익과 부모들의 단체 행동에 눈치를 보는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국가 책임과 지방자치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문제”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