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C 그룹 제빵공장에서 사망 사고를 낸 혼합기는 컴퓨터 그래픽 영상으로 그려낼 수 있을 만큼 그 위험성이 명백한 것이었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은 1년 전 가상현실(VR)로 혼합기 사고 구현 영상을 만들어, 반드시 안전장치를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회사 측은 경고를 무시했고, 사고를 당한 노동자는 안전장치가 없는 위험한 환경에서 혼합 작업을 해야 했다.
21일 안전보건공단 공식 유튜브 계정에는 ‘혼합기 작업 중 끼임! CG 기반 VR 체험’이라는 영상이 게재돼있다. 해당 영상은 지난해 6월 올라왔다.
혼합기 작업 중 발생할 수 있는 끼임 사고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연한 영상이다. 영상에 등장하는 혼합기는 물과 밀가루를 부어 반죽하는 설비다. 나선형의 날이 돌아가며 물과 밀가루를 섞는다. 설비 크기는 대략 허리 높이다.
영상은 ‘방호조치가 안된 혼합기를 사용한다면?’이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사업장에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한 콘텐츠’라는 설명도 따른다.
혼합기 앞에 노동자가 등장하며 본격적으로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노동자는 포대를 들어 혼합기에 밀가루를 붓는다. 설비 옆에 놓인 통에서 바가지로 물도 떠 넣는다. 노동자는 “잘 섞이면 반죽 작업은 끝, 기계로 하니까 쉽네”라고 말한다.
생각과 달리 혼합 작업은 만만하지 않다. “어 뭐야”라는 당황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전환된다. 노동자와 설비를 원경에 비추던 카메라가 혼합기 안쪽을 향한다. 날이 돌면서 반죽을 섞고 있다. 벽면에도 반죽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다.
노동자는 주걱으로 벽면을 긁어내기 시작한다. 돌아가는 나선형 날을 피해 왼쪽 면을 긁더니 날 위로 손을 뻗어 뒤쪽 면으로 주걱을 들이댄다. 그때, 비명과 함께 손이 기계로 빨려들어 간다. 곧이어 팔까지 말려들어 가면서 상반신이 혼합기 안쪽으로 고꾸라진다.
영상에 나오는 설비와 작업 방식은 최근 발생한 SPC 그룹 제빵공장 사망 사고와 흡사하다. 앞서 지난 15일 SPL 평택 공장에서 소스 혼합 작업을 하던 노동자 A(23) 씨가 사고를 당해 숨졌다. 영상 속 사고와 마찬가지로, 발견 당시 혼합기 안쪽으로 몸이 빨려 들어가 있었다.
A 씨도 혼합기 앞에서 일했다. 마요네즈와 고추냉이 소스, 땅콩 등을 부어, 샌드위치에 들어갈 소스를 만들었다. 3개의 날이 달린 스크루가 돌아가면서 재료를 섞는다.
SPL 사고 현장에 CCTV가 없어 정확한 사고 경위는 조사 중이지만, 배합기에 재료를 붓는 과정에서 사고가 났을 가능성이 있다. 소스를 만들 때 마요네즈나 고추냉이 소스를 넣는데, 1통에 10~20kg 정도다. 12시간 맞교대로 이뤄지는 장시간 노동 속에 통 무게를 못 이겨 무게 중심을 잃었을 상황을 추정해볼 수 있다.
안전보건공단은 영상에서 “가동 중인 혼합기 날 부위에 신체 일부가 접근하면, 날과 회전부에 몸이 말려들어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사고 방지 대책도 제시된다. 뚜껑이 열리면 배합기 작동이 멈추는 장치다. 안전보건공단은 “혼합기는 덮개가 설치돼야 하며 혼합기 가동 중에 덮개를 개방하면 작동이 즉시 멈추고 덮개가 개방 중인 상태에서는 혼합기를 작동시켜도 가동되지 않도록 연동장치를 설치해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연동장치란, 두 개의 회로(뚜껑 열림과 스크루 작동)가 동시에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인터록’을 이른다.
또한 “혼합기에서 내용물을 꺼내거나 정비, 수리, 청소 등 작업하는 경우 혼합기 작동 멈추고 기동 스위치 점검 중임을 알리는 표지를 부착 후 해당 작업을 실시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A 씨는 안전장치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작업했다. 뚜껑을 아예 제거한 상태에서 작업이 이뤄졌다.
SPL 공장 혼합기는 대부분 인터록이 적용되지 않은 채 가동되고 있었다. 고용노동부는 사고 당일, 사고 발생 작업과 동종·유사 재해가 우려되는 혼합 설비에 대해 작업 중지를 내렸다. 대상 기계는 7대였다. 인터록이 설치돼 작업중지 대상에서 제외된 설비는 2대에 불과했다.
안전보건공단이 주요 위험 작업으로 소개했지만, 회사 측은 안전 교육조차 제대로 실시하지 않았다. SPL 노동자들은 회사 측이 설비 위험에 대해 안전교육을 한 적이 없다고 호소했다. 서류상 형식을 갖추기 위해 한 달에 한 번 안전교육을 받았다는 서명만 받았다고 한다.
시민들은 안전보건공단 영상을 보고 A 씨가 얼마나 위험한 작업을, 얼마나 허술한 환경에서 하다가 사고를 당했는지 알게 되면서, 그간 사고 방지 대책을 세우지 않은 회사 측에 대한 비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 누리꾼은 영상 댓글로 “영상만 봐도 위험해 보이는데, 실제 일하는 노동자들은 얼마나 위험을 감수하면서 일할지”라며 “사람 고용해서 쓰면 안전하게 일할 환경을 만들어줘야지, 비용절감이라니”라고 지탄했다. 또 다른 누리꾼은 “이렇게 영상이 있고 충분히 위험 감지를 하고도 그 사달이 난 거냐”며 “절대 불매”라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