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마음의 저울] 뉴노멀 시대, 회귀의 시간이 되지 않으려면

2022년 10월 15일 오후 3시경 판교 SK C&C 데이터센터에 불이 나면서 소위 ‘카카오 먹통’ 사태가 발생하였다. 가입자 4,600만 명을 보유하고 있는 플랫폼 대기업에서 벌어진 일이라 더욱 충격이 컸다.

“최대한 리스크 시나리오 세웠다고 생각했지만 화재는 예상할 수 없는 사고였다.”

사고 후 카카오 부사장이 한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홍수와 지진 등 자연재난이나 화재, 폭발, 핵오염 등 사회적 재난 등에 대해서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으로 정의되어 있다. 그런데 최대한 재난에 대비했다고 하면서도 인명 피해가 없었던 화재에 의한 장애조차에는 대비하지 못했다니, 이야말로 모순이 아닌가.

우리는 지난 몇 년간 전대미문의 코로나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재난의 일상화를 경험하였다. 매일매일 코로나 감염자수 통계나 백신 접종 등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비대면 문화로 인해 사람들과 실제로 접촉하기보다 온라인에 익숙해지면서 카톡방이나 밴드방 등에서 떠도는 소문을 충실히 나르는 숙주의 역할조차 마다하지 않는 이들도 생겼다. 오직 자신의 편함만 생각하거나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여성, 노인, 장애인, 외국인, 소수자 등 사회적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혐오와 증오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이들도 있다. 이렇듯 차별주의가 극성을 부리고 있는 시대에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는 인간의 존엄성추구나 행복추구권을 말하는 일은 과연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것일까.

많은 과학자들이 코로나19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2020년 세계보건기구가 코로나19를 팬데믹으로 부르기 시작한 이후 2022년이 된 지금은 ‘포스트 코로나(post corona), 뉴노멀(new normal)’의 시대라고 한다.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에 대해서는 누구도 확실하게 장담하지 못하지만 ‘미래의 현실은 과거와 분명히 다르다’라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몇 가지 우려되는 변화에 대해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 시대는 ‘위기의 상시화’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각국의 경제위기와 교역위기, 안보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데도 마땅히 중재하는 세력의 균형추가 없는 것처럼, 우리 사회도 강릉의 미사일 낙탄 사고나 카카오 먹통 사태, 레고랜드 사태 등과 같이 언제 어디서 무엇이 터질지 모르지만 한번 사고가 나면 우리의 일상을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는 전시적 공포와 패닉이 상존하고 있는 사회를 살고 있다. 하지만 위기와 재난의 상시화에 믿고 맡길만한 세력이나 안전핀이 확실하게 마련되었다고 어려운 상황이다.

둘째, 코로나19 이후에도 팬데믹은 언제 어디서든 창궐할 수 있다. 1975년 이후 50개가 넘는 신종 감염병이 발생했는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 번의 팬데믹이 발생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Jared Mason Diamond)의 『총,균,쇠』, 윌리엄 맥닐(William H. McNeill)의 『전염병과 인류의 역사』의 주장처럼, 이제 전염병은 인간 역사의 배경에 머물지 않고 전면에 등장했다. 방역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셋째, 위기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혐오와 차별주의를 강화할 것이다. 코로나19로 지친 국민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돌보는 것이 우선임에도 불구하고 내년도 예산심의나 현재 집행하는 행태를 보면 현 정권이나 지자체의 행정은 이에 관심이 없는 듯하다. 오히려 위기를 특정 대상에게 돌리는 등 편견을 확산하는 언론 플레이를 일삼거나 근거 없는 소문을 떠벌리는 빅마우스를 양산하여 사회적 지배담론으로써의 차별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공정하게 담당해야 할 감사원, 검찰과 경찰도 기득권층에는 너그럽고, 특정 대상에게만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으니 과연 그들이 주장하는 자유 민주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검찰공화국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헷갈릴 정도다.

22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 앞 세종대로에서는 촛불행동 주최로 ‘김건희 특검·윤석열 퇴진 전국집중 촛불대행진(퇴진 촛불)’이 열렸다. ⓒ뉴시스


위기 상시화의 뉴노멀 시대
반공과 반동으로 회귀해선 안 된다
돌봄과 치유의 역사로 새로운 뉴노멀 만들어야


올해 겨울은 유난히 강추위가 닥쳐올 것이라고 한다. 추위야 어떻게든 버틸 수 있지만 코로나19를 버텨온 수많은 사람들의 심리적 추위는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스럽다. 더욱 염려스럽다. ‘비접촉’ 문화와 사이버 공간의 확대, 개인주의 심화로 사회적 고통까지 개인의 고통으로 감내해야 하는 호모 파티엔스(homo patiens)가 출현하는 사회에서 현 정권이 위기를 빌미로 인간적인 삶의 질을 높이기보다 통제하고 폐쇄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기까지 하니 앞으로 어떤 트라우마를 겪게 될지 더욱 더 염려스럽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위기의 역사였다. 그러나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반대편엔 도전과 극복의 역사도 펼쳐졌다. 위기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도 있겠지만 공감과 연대의 공간 또한 넓어질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포스트 코로나와 뉴노멀을 과거의 반공과 반동시대로 회귀하려는 기득권 세력들의 치밀한 공작은 이미 시작되었다.

역사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있다. 지금은 권력이 무소불위 통제력을 가지고 맘껏 힘을 부리지만, 세상과 인간을 보듬고 존귀하게 여기는 움직임 또한 도도하게 흘러온 민심의 역사가 있다. 또 으레 그런 것처럼 무엇이 더 인간다운 삶인지 성찰하고 사람을 품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고난이 있어도 돌봄과 치유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새로운 뉴노멀의 주인이 될 것이다.

한 철학자는 더러움이 없어진 것을 ‘깨끗이’라고 했다. ‘깨끗이’란 깨고 끝낸다라는 말이다. 여전히 깨어있지 못하기에 괴롭고 어둔 밤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편견과 차별이 힘을 부리는 세상에서, 그래도 세상을 살만하고 쉼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거리와 지역에서 마음과 생각을 나눈다면 이미 대동세상은 우리와 함께하는 것임을 확인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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