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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갑의 수요뮤직] 윤석열 정부가 틀어막은 이랑의 노래

이랑의 세 번째 정규 음반 '늑대가 나타났다' 커버 이미지 ⓒ사진 = 유어썸머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 10월 16일 일요일 오전 10시에 부산시민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제43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뮤지션 이랑의 노래가 배제 당했다. 11월 21일 월요일 저녁 JTBC 뉴스의 단독보도에 의하면, 원래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은 이 기념식에 이랑을 섭외했다. 이랑은 재단측의 요청으로 자신의 대표곡 가운데 하나인 ‘늑대가 나타났다’를 부를 예정이었다.

이 곡은 지난해 이랑이 발표한 정규음반 [늑대가 나타났다]의 타이틀곡이며, 올해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고상 격인 ‘올해의 음반’을 수상하게 만든 주역이다. 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저항의지를 은유적이면서 직설적으로 표현한 곡은 이랑의 형형한 정신과 창작력을 만방에 알리면서 오늘의 민중가요로 널리 공인받았다.

그런데 기념식 3주 전 행정안전부에서 이랑이 행사에서 부르려한 곡 가운데 ‘늑대가 나타났다’를 빼라고 지시했다 한다. 하지만 기념식의 감독과 이랑은 이 요청을 거절했다. 그 결과 이랑의 공연은 무산되고 말았다. 실제로 올해 기념식에서는 피아니스트와 성악가의 공연이 펼쳐졌다.

사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은 행안부의 예산을 받는 위치여서 행안부의 요구를 무시하거나 거절하지 못한다. 이 과정에서 이랑에게 ‘늑대가 나타났다’ 대신 ‘상록수’를 불러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엄연한 창작곡이 있고 그 곡을 부르겠다고 밝힌 뮤지션에게 다른 이의 곡을 요청하는 일은 분명한 검열로서 적절하지 않을 뿐 아니라 무례하기까지 하다.

이랑, 늑대가 나타났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행안부가 행사를 주관하는 단체의 기획 의도를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개입했으며, 이랑의 노래를 통해 항쟁의 의미를 현재화하려는 주최측과 감독의 의지를 짓밟았기 때문이다. 또한 항쟁의 의미에 공감해 자신의 노래로 항쟁 정신을 계승하고 빛내려 했던 예술가의 열의를 끝내 무산시켰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없이 권위적이고 폭력적이다. 더욱 납득하기 어려운 점은 이 행사가 박정희 독재 정부를 무너뜨리는 기폭제가 되었던 부산마산민주항쟁을 기념하고 계승하기 위한 행사라는 사실이다.
 
윤석열 정부 행안부는 저항과 민주주의의 기념식에 과거 박정희 정부가 그러했듯 명확한 이유도 제시하지 않고 기획자의 판단과 예술가의 선곡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예술 표현의 자유를 검열했다. 예술가나 기획자보다 자신들이 우위에 있으며, 자신들의 판단에 부합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기회를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을 드러냈다. 이로써 자신들이 과거의 통치세력과 다르지 않음을 만방에 알린 셈이다.

가로막은 것은 노래만이 아니다. 항쟁의 정신까지 짓밟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BTS를 비롯한 케이팝 뮤지션이 해외에서 인기를 끌 때는 국력신장의 증거처럼 자랑스레 활용하면서, 뮤지션이 비판적 정신을 노래할 때에는 좌시하지 않는 모습은 현재의 통치세력이 얼마나 이중적이며 가식적인지 명명백백하게 보여준다.

사건 소식을 들으며 떠오르는 기억은 박정희 정권의 금지곡과 검열의 역사에서 그치지 않는다.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 검열이 지속되면서 예술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한 일들이 줄줄이 따라온다. 여러 번 정권이 교체되면서 민주주의가 안착되었다고 믿었던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기, 예술가들에 대한 지원 배제와 블랙리스트 사건까지 또렷하게 복귀한다.

이랑(Lang Lee) - 늑대가 나타났다(There is A Wolf) LIVE

최근 음악계에는 특정 지자체에서 ‘공연 섭외 금지 예술인 리스트’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은밀하게 떠돌고 있다. 블랙리스트의 유령은 죽지 않았다. 과거는 얼마든지 돌아올 수 있다. 윤석열 정부에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공모작에 개입하고, 이태원 참사 직후 각종 축제를 취소한 사례를 살펴보면 이 정부는 독재정부를 계승하고 부활시키는데 주저함이 없다. 이들은 예술 표현의 자유나 예술가의 생존에 대해 무지할 뿐 아니라 예술가를 존중하거나 배려하지 않고 두려워할 줄도 모른다.

어쩌면 이들은 부마항쟁 대신 군사쿠데타를 기념하고 싶을지 모른다. 마음에 들지 않는 노래는 방송 금지시키고, 활동을 정지시켜 버려도 된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장관이 단정한 옷을 입고 기념사를 하기 전, 예술가는 은밀하게 마이크를 빼앗겼다는 사실은 하나를 보면 열을 알게 한다.

왜 특정 정당 정부에서는 같은 일이 반복될까. 예술가를 존중하는 보수정부를 갖는 일이 왜 이리 어려울까. 하지만 예술가의 입을 틀어막아도 노래는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정부는 예술가의 입을 틀어막아 예술가의 일을 빼앗고 마음을 짓밟지만, 그 정부는 번번이 몰락해 어떤 권력도 예술 위에 있을 수 없음을 증명했다.

바람도 햇살도 막지 못하고 노래도 막지 못한다. 노래와 싸우지 마라. 그러라고 맡긴 권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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